책은 집이다. 독서는 위대한 불굴의 동료다
나는 독서 운동에 회의적이다. 일차적인 이유는 모든 운동(movement)이 썩 마땅치 않아서다. 새마을 운동이 대표하는 관변 운동의 폐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양심적인 사회 운동에도 부작용이 따른다.
글ㆍ사진 최성일
200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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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서 운동에 회의적이다. 일차적인 이유는 모든 운동(movement)이 썩 마땅치 않아서다. 새마을 운동이 대표하는 관변 운동의 폐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양심적인 사회 운동에도 부작용이 따른다. 단적인 예가 사회 일반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노동 운동의 부패상이다. 만물이 유전(流轉)하듯, 모든 운동은 반드시 타락한달지.

또 내가 독서 운동에 의심을 품는 까닭은 꼭 그렇게 해서까지 책을 읽힐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저 좋아서 열심히 책 읽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책을 멀리하거나 싫어하는 학생을 책과 친해지게 하는 것이 독서 교육이라는 교육 현장의 목소리는 감동적이다. 하지만 나는 독서 교육에서 진정한 교육의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보다는 사회 전반의 인식과 분위기가 바뀌어야 학생들이 맘 편하게 책 읽는 풍토가 조성되리라 믿는다.

나는 독서 교육을 강화한다는 당국의 방안이 영 미덥지 않다. 2001년 봄, 신학기를 맞아 대형 서점에 진열된 고등학교 『독서』(지학사, 1996) 교과서를 사서 훑어보고 실망감을 느낀 일이 있다. 기존 국어 교과서의 독서 관련 내용과 별 차이가 없어 그랬는데 그 독서 교재의 머리말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 책은 1992년 10월 30일 교육부가 고시하고, 1996년 3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된 제6차 교육 과정 중 고등 학교 국어과의 독서 교육 과정에 따라 편찬된 ‘자율 학습’용 교과서이다.”

독서 점수를 내신 성적에 반영하는 독서 교육 강화 방안은 자율 학습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한국 바둑이 세계 정상에 오른 건 바둑을 담당하는 정부 부서가 없어서였다’는 속설을 지지한다.

나는 추천도서 목록도 탐탁치가 않다. 그건 우리가 요즘 접하는 도서목록들이 자의적인 기준에 의하거나 변덕을 부려서가 아니다. 쓸데없이 권위를 등에 업거나 목록이 부실한 탓이다. 독서 관련 내용으로 말문을 연 것은 미국 작가 애너 퀸들런(Anna Quindlen)의 한국어판 세 권의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책과 독서로 봤기 때문이다.

『독서가 어떻게 나의 인생을 바꾸었나?』(임옥희 옮김, 에코리브르, 2001)는 퀸들런의 독서론이다. 100쪽 남짓한 분량이되 내용은 알차다. 우리말 제목은 원제목을 그대로 옮겼다(How Reading Changed My Life). 그녀에게 책이 지닌 의미부터 살펴보자.

"나에게 최상의 것은 언제나 집에 있었으며, 내 자리를 표시하듯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책 속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상상의 인물들이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그들의 생명을 되돌려 받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얼한 사람들이 있는 곳은 바로 그곳이었으며, 그곳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조용하고 어두운 바다가 있었다."

어떤 재미난 놀이보다 책읽기를 더 좋아한 아이인 애너는 책 속에서 다른 세계뿐 아니라 그녀 자신 속으로의 여행을 즐기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나는 내가 누군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갈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 세상과 나 자신에 관해 감히 무엇을 꿈꿀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결국 그녀에게 “독서는 언제나 나의 고향이었으며 나의 양식이었고, 위대한 불굴의 동료였다.” 그러나 그녀는 “우월감이나 발전을 위해, 심지어 배우기 위해 책을 읽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그 어떤 행위보다 책읽기를 사랑했기 때문이 읽었을 뿐이다.” 이쯤 되면 내노라 하는 독서가 중에서도 상고수에 속한다. “목적 없는 독서에 대해 내심 적대적”인 미국 사회의 실상에 비추면 더욱 그렇다.

한편으론 안전한 보호막이자 편안한 도피처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느낀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 이유를 나에게 말해 주는 단어에 둘러싸여 있다. 혹은 비가 현관 지붕을 세차게 두드릴 때, 나를 이 우울에서 벗어나도록 햇살이 눈부신 다른 곳으로 데려다 주는 그 몇 시간 동안이나마 책은 우리를 도와준다.” 애너 퀸들런은 책의 이런 ?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책은 “안식처를 제공한다.” 아울러 “독서는 북새통의 집에서 상상적인 나만의 방으로 도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애너 퀸들런은 대학의 핵심 교과과정을 구성하는 독서의 유형에 관한 논의가 교육 목적이 아닌 독서의 기능을 종종 무시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논의는 지적인 면에만 관심이 있지 정서적인 면에는 무관심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이것은 미국의 삶을 가장 많이 바꾸게 한 책에 대한 물음에서 배움을 위한 독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기도 하다. 독서의 정서적인 미덕은 말하자면 이렇다.

“독서가 주는 경이감의 하나는 사람들이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오직 교육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적어도 정신사회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훌륭한 장점이 된다.”

“텔레비전이 출현하기 이전, 책은 세계의 또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인간적 유사성과 신비함 모두를 발견하도록 해주는 가장 좋은 도구였다.”

책의 말미에는 ‘한여름 꼬박 걸려 읽을 수 있는 두껍고 훌륭한 책 10권’을 비롯한, 도서모록 11개가 실려 있다. “독서목록은 자의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독서목록을 좋아한다.” 필자 역시 그렇다. 그런데 애너 퀸들런이 제시한 목록들은, 주제마다 책이 10권으로 한정된 것은 맘에 들지만, 우리 독자를 확 끌어당기기에는 좀 밋밋하다. 아마도 영미 문학 작품이 주류여서 그런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공경희 옮김, 뜨인돌, 2001)은 단아한 소품이다. ‘행복한 삶으로의 작은 (길) 안내(A Short Guide to a Happy Life)’라는 원제목대로 길지 않은 분량이다. 단숨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다. 10분만에 후딱. 하지만 그렇게 빨리 한번 읽고 마는 건 이 책을 제대로 읽는 게 아니리라. 적어도 두세 번은 찬찬히 음미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런 대목은 더 많이.

-작년에 나는 아버지에게 이런 엽서를 받았습니다. “네가 쥐들의 달리기에서 1등을 한다면, 네가 여전히 쥐라는 뜻이다.”
-존 레논은 다코타에서 총에 맞기 전, 이런 구절을 적었지요. “당신이 다른 계획을 세우느라 바쁜 동안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이 곧 인생이다.”
-죽어가면서 ‘회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걸’이라고 후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노숙자의 이야기 중에서 그가 노숙자 쉼터로 가지 않는 이유.
-그는 바다를 응시하며 말했습니다. “저 풍경을 봐요, 아가씨. 저 풍경을 보라구요.”


『단 하나의 진실(One True Thing)』(임옥희 옮김, 디자인하우스, 1996)은 미묘한 가족관계를 다룬 장편소설이다. 소설에서 똑똑한 딸과 지적인 교수 아버지, 그리고 현모양처형의 어머니는 삼각관계를 이룬다. 그렇다고 근친상간적이거나 심각한 애증이 병존하는 구도는 아니다. 아버지와 그를 닮은 딸은 냉정하게 그려지나 어머니의 따사로움이 둘의 차가움을 상쇄한다.

소설의 1부는 자궁암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딸의 간병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의 자전적 내용을 감안하면, 애너 퀸들런은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을 소재로 삼은 듯 싶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궁암으로 나이 마흔에 세상을 떠났는데, 대학생이던 애너 퀸들런은 학교를 휴학하고 집안 일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기도 했다.

딸은 어머니를 돌보면서 차츰 어머니와 가까워진다. 둘의 관계를 복원하는 촉매제의 하나가 바로 독서다. 어머니와 딸은 독서 클럽을 만들어 함께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눈다. 딸이 간병에 지쳐 힘겨워 할 무렵, ?머니는 끝내 숨을 거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어야 하건만,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검 결과, 어머니의 직접 사인이 모르핀 과다 복용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소설의 2부는 어머니에 대한 안락사 혐의를 받은 딸의 재판이 줄기를 이룬다.

에필로그에선 후일담을 전한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잡지사 기자로 일한 바 있는 딸은 정신과 의사가 돼 있다. 8년 후의 상황이다. 그녀의 의대 진학은 어머니의 투병과 죽음을 지켜봐서가 아니라 에이즈에 걸린 이웃을 문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다 남동생의 성적 정체성도 새로운 진로 설정에 적잖이 작용했다. 아무튼 우연한 기회에 딸은 아버지와 화해하고, 사귀던 남자 친구와 결혼하기로 다짐하면서 소설은 끝맺음을 한다.

짧은 대화체 서술의 비중이 높은데다 이야기의 흐름도 빠른 편이어서 소설은 속도감 있게 읽힌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 좀더 세부 묘사에 치중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래도 『단 하나의 진실(One True Thing)』은 재미가 있고, 교훈적인 읽을 만한 소설이다. 딸이 학교를 한 해 쉬면서까지 병든 어머니를 돌보는 상황은 요즘 우리 현실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어서 의아하기도 했다. 현재 이 소설은 절판 상태에 있지만, 이러한 시대착오성(?)으로 인해 재출간을 장담하진 못하겠다.

아무튼 애너 퀸들런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그녀의 독서론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나 역시 그 대목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애너 퀸들런이 말하는 애너 퀸들런은 이렇다.

"나는 가족과 친구와 친숙함과 책에 둘러싸여 집안에 머물기를 더 좋아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여행에 관해 좋아하는 점이다. 비행기 안에서 혼자 행복하게 책읽는 것, 그런 것이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여행이다. 어린 시절의 내 자아가 날개를 가질 수 있다면 오직 그녀의 영혼만이 높이 솟구쳐오르게 하고 싶다. 책이 비행기이며 기차이며 길이다. 책은 행선지이며 여정이다. 책은 집이다."

덧붙임 말- 권위적인 독서론을 비판하는 애너 퀸들런의 견해를 크게 반긴다.

“교육받은 자들의 독재가 활짝 꽃피웠다. 말하자면 독서를 하는 올바른 방법이 있고 그릇된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릇된 정도 이상으로 나쁜 독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영원한 것일 뿐 아니라 즐길 만한 것, 안정된 것, 감동적인 것, 매료시키는 것만을 가치 있게 보는 사람을 일컫는 코드화된 단어가 바로 ‘약간 교양 있는 중간층(middlebrow)’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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