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나눠 갖자는 ‘부단 운동’을 전개한 사회개혁가
현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면서 사회개혁가인 비노바 바베(1895~1982)의 이름은 우리에게 일찍이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저서와 그의 전기가 번역된 것은 근자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비노바 바베는 틱낫한과 비슷한 유형의 해외 저자라고 할 수 있다.
200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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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면서 사회개혁가인 비노바 바베(1895~1982)의 이름은 우리에게 일찍이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저서와 그의 전기가 번역된 것은 근자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비노바 바베는 틱낫한과 비슷한 유형의 해외 저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출판?독서계의 수용 양상에서 비노바 바베와 틱낫한은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점을 보인다.
우리 출판?독서계에서 2002년부터 일기 시작한 틱낫한 붐은 2003년 초 그의 방한으로 정점에 달했다. 그런데 틱낫한의 책들은 10여 년 전에도 소개되었고, 그는 이미 두세 차례 우리나라를 다녀간 바 있다. 반면, 비노바 바베의 책들은 2000년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말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책들은 틱낫한 붐에는 훨씬 못미치는 적은 수의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헌데, 비노바 바베의 전기는,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꽤 오래 전에 한글로 활자화되었다. 1970년을 전후로 출판사 세 곳을 옮겨가며 출간된 위인 선집 『세계의 위인상』에 비노바 바베 편도 실려 있다. 세 개의 『세계의 위인상』 가운데 가장 나중 것인 대일출판사(1973) 판을 보면, 비노바 바베는 “역사를 창조한 100인전”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
또한, 이 책의 출간 당시를 기준으로 비노바 바베는 수록 인물 가운데 몇 안 되는 생존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 책에 실린 비노바 바베의 전기는 세로짜기 2단 조판으로 3쪽밖에 안 되는 분량이지만 그의 생애를 잘 압축하고 있다. 『세계의 위인상』에 수록된 비노바 바베 약전의 내용은 근자에 번역된 그의 책들에 겹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지금까지 번역된 비노바 바베 관련서는 모두 네 권이고, 앞서 말한 대로 모두 2000년 이후에 나왔다(국립중앙도서관 데이터베이스 검색에서 2000년 이전의 비노바 바베 관련서를 찾지 못했다). 이 네 권의 번역은 김문호 씨가 도맡았다.
『비노바 바베』(실천문학사, 2000)는 그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소개한 최초의 책이다. 이 책은 전기로 분류되지만 막상 읽으면 자서전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든다. 1인칭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다. 이 책을 지은 칼린디는 바로다 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받은 직후인 1960년 비노바 바베를 만났고, 그녀는 언론?출판과 관련해서 비노바 바베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칼린디가 꼼꼼하게 기록한 비노바 바베의 강연과 대화가 바탕이 되었다. 비노바 바베는 인도 카스트의 최고 계급인 브라만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육체노동자를 자임한다.
“나는 육체노동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좋은 전성기인 32년 동안을 노동을 하며 지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사회가 행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그런 형태의 노동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특히 노동 가운데서도 인도 사회가 천시하고 경멸하는 형태의 노동, 즉 똥 치우는 일, 옷감 짜는 일, 목수일, 농사 등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비노바 바베는 평생 책을 가까이 한 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제도 교육과는 거리를 두었다. 비노바 바베가 대학입학자격 증명서를 불태운 사건은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일화로서 전기들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다. 먼저 30여 년 전의 약전에 나타난 관련 대목을 보자.
“그가 19세 되던 1916년, 자신의 학교증명서를 불에 태워버렸다. 옆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래서 바베를 꾸짖으며 물으니까, “아마 그건 내게 이제 필요 없을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칼린디의 『비노바 바베』에는 이 장면이 좀더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집을 떠나기 전에 나는 가지고 있던 모든 자격증들을 불살랐다. 대학입학자격증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사슬들을 단번에 잘라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몹시 걱정을 하시며 왜 그런 것들을 불사르느냐고 물으셨다.
“이제 이런 것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대답하셨다.
“지금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냥 보관한다고 해로울 건 없지 않겠니?”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녜요 어머니, 나는 월급 받는 일은 절대로 안 할 겁니다.”」
영국 식민지 치하 인도 감옥에서의 비노바 바베의 일화는 그의 비범함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범에 대한 특별 대우와 옥중 투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가 위험인물로 분류돼 보내진 벨로레 감옥에는 정부의 비용으로 갖가지 사치스런 물품이 차입되었던 모양이다. 비노바 바베는 이런 관행이 “우리를 지극히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며, 우리의 운동에 활력을 없애버리고자 의도된 것이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것들을 싫어했다.
벵갈 지역에서는 기근이 발생했는데도 교도소 측에 간이침대와 의자 같은 것들을 요구하고, 그것들을 주지 않으면 소란을 피우면서 ‘투쟁’ 운운하는 동료 양심수들을 못마땅해했다. “결국 정부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면, 우리는 그것을 개선이요, 승리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승리요, 개선인가! 그것은 어리석음이요 패배일 뿐이었다.”
당시 식민지 인도의 감옥에서 정치범들에게는 책을 읽을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물론 반입 금지 도서들은 수감자들에게 독서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양심수들은 열 권 넘게 신청해도 한두 권밖에 반입 허가가 나지 않는데 비해, 비노바 바베는 책을 신청하는 대로 반입이 허가되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에 죄다 얼간이들만 앉아 있어서 그렇지요. 무엇이 진짜 위험한 것인지를 모르니까요. 만일 정부가 그걸 알았더라면 『(바가바드) 기타』나 『우파니샤드』는 들여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기타』를 가지고 기초를 튼튼히 쌓지 않았더라면 간디 선생은 아마도 그렇게 ‘위험한’ 간디는 되지 않았겠지요.(중략) 삶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다루는 책들만이 독재권력을 파괴할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비노바 바베는 감옥에서 강연자로서 큰 인기를 모았다. 둘리아 감옥에서 함께 수감된 성자들을 상대로 시작한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강연이 일반 남자 죄수와, 남자 죄수와의 접촉이 금지된 여자 죄수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심지어 어떤 간수는 자신의 아내까지 데려와 비노바 바베의 강의를 들었다.
『천상의 노래』(실천문학사, 2002)는 비노바 바베가 감옥에서 행한 『(바가바드) 기타』 강연록이다. 그는 『기타』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는 주된 이유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바가바드) 기타』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항상 도움이 된다고 덧붙인다. “『(바가바드) 기타』는 삶에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무(스바다르마)를 강조합니다. 만일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하나의 강력한 받침대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시간’은 2004년 출판?독서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주제어 가운데 하나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불기 시작한 ‘아침형 인간’의 위력이 여전하고, ‘저녁형 인간’에다 ‘잠자는 기술’을 조언하는 책까지 등장했다. 여기에다 예전의 베스트셀러였던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정신세계사, 1990)가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황소자리, 2004)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그런데 『비노바 바베』에는 비노바 바베의 시간관이 언급돼 있어 눈길을 끈다. 그는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안배하는 계획을 생각해냈는데 우선, 하루에 여덟 시간은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한다. “나머지 열 여섯 시간 가운데서 다섯 시간은 목욕하고, 밥 먹고, 다른 육체적인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한다. 두 시간은 영성활동, 즉 기도와 신앙서적 읽기, 예배적인 의미를 지닌 실잣기, 또는 다른 예배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한 시간은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완결 짓기 위해서 완전히 자유시간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럼 이제 남아있는 여덟 시간에는 무얼 할까? 비노바 바베는 그 시간을 공적인 활동, 다시 말해 생활비를 버는 일에 써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비노바 바베는 탁월한 사회개혁가였다. 그는 토지헌납 운동인 ‘부단 운동’을 주도했다. 비노바 바베는 지주들에게 땅이 없는 이들을 위해 6분의 1의 토지를 공유하자고 요구했는데 그 근거는 이렇다. “인도의 가정들은 평균적으로 아들을 다섯 명 정도 두고 있기 때문에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여섯 번째 아들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비노바 바베는 삼중의 변화를 사회개혁의 목표로 삼았다. “먼저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개인의 생활습관에 변화가 있어야 하며, 그것이 사회구조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가 시크교를 보는 관점은 우리에게 인도 사회 불안의 한 요소로만 알려져 있는 시크교도에 대한 시각 교정을 유도한다. “시크교의 기본적인 원리는 이런 것입니다. 온 세계가 하나의 인종이요, 하나의 공동체다. 그 안에서는 구별도 없고 카스트의 차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정신이지요.”
그런데 비노바 바베는 ‘부단 운동’을 이끌며 인도 전역을 돌아다닐 적이나 정부의 요청으로 분쟁을 중재하러 갈 때에도 주로 걸어다녔다. 『세계의 위인상』에 실린 그의 약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네루 수상은 이 지역(아삼 州-인용자)을 바베가 방문해 주기를 바랐고 그래서 비행기를 제공했지만 바베는 비행기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4천 마일이나 도보여행을 했었다. 하루 평균 10마일을 걸어서 5개월이나 걸렸다.”
그는 부단 여행을 하는 동안 왜 그렇게 걸어다니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그가 걷기를 고집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 다니는 것보다는 도보로 다녀야 그 지방과 그곳의 사람들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걸어서 여행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상상하지도 않았던 의외의 것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도보로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노바 바베는 마하트마 간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계의 위인상』의 짧은 전기는 도입부에서 그런 점을 확실히 밝혔다. “현재 또 하나의 인도인이 수 백만의 자유민으로부터 간디가 받던 숭배를 받고 있다. 비노바 바베라는 인도 사람이다. 그는 여러 지역에서 제2의 간디로 존경받고 있는데 그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간디의 제자로서 22세 때 간디의 아쉬람(공동체-인용자)에 참석하여 오늘날 70이 가깝도록 열심히 일하였기 때문이다.”
『비노바 바베, 간디를 만나다』(오늘의책, 2003)는 어째서 그가 간디 사상의 계승자로 평가받고 있는지 잘 말해 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비노바 바베는 곡진한 해석을 통해 간디의 사상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아래의 구절은 그 단적인 보기다.
“그는 진리와 비폭력을 사회활동, 정치, 건설 프로그램, 공공 기구, 교육과 연결지었고, 진리와 비폭력은 사회의 향상을 위해서 그리고 공공활동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또한 그런 것들이 사회적 섬김의 시금석이 된다고 선언했다.”
비노바 바베는 위대한 인물들로부터는 그들의 이념만 취해야지, 그들의 삶에서 나타난 우연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해선 안 된다고 경계한다. 그런데 이런 점은 간디뿐만 아니라 비노바 바베에게도 적용돼야 할 듯 싶다. 인도 출신의 생태주의자인 사티쉬 쿠마르가 엮은 비노바 바베 사상선집이라 할 수 있는 『버리고, 행복하라』(산해, 2003)에 담긴 비노바 바베의 삶의 철학은 그것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섣불리 받아들이기에는 곤란한 측면이 있다. 비노바 바베의 철학이 인도 사회에 기초해 있는 데다 벌써 한 세대가 흘러서 그런지 몰라도 세상사를 단순하게 바라본 대목이 적잖다.
아무튼 사티쉬 쿠마르는 간디에게 있어 비노바 바베가 한 역할을, 비노바 바베에게 하고 있는 듯 싶다(『비노바 바베』에도 사티쉬 쿠마르의 글이 첫머리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비노바 바베는 간디와 사티쉬 쿠마르를 이어주는 가교인 셈이다.
우리 출판?독서계에서 2002년부터 일기 시작한 틱낫한 붐은 2003년 초 그의 방한으로 정점에 달했다. 그런데 틱낫한의 책들은 10여 년 전에도 소개되었고, 그는 이미 두세 차례 우리나라를 다녀간 바 있다. 반면, 비노바 바베의 책들은 2000년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말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책들은 틱낫한 붐에는 훨씬 못미치는 적은 수의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헌데, 비노바 바베의 전기는,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꽤 오래 전에 한글로 활자화되었다. 1970년을 전후로 출판사 세 곳을 옮겨가며 출간된 위인 선집 『세계의 위인상』에 비노바 바베 편도 실려 있다. 세 개의 『세계의 위인상』 가운데 가장 나중 것인 대일출판사(1973) 판을 보면, 비노바 바베는 “역사를 창조한 100인전”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
또한, 이 책의 출간 당시를 기준으로 비노바 바베는 수록 인물 가운데 몇 안 되는 생존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 책에 실린 비노바 바베의 전기는 세로짜기 2단 조판으로 3쪽밖에 안 되는 분량이지만 그의 생애를 잘 압축하고 있다. 『세계의 위인상』에 수록된 비노바 바베 약전의 내용은 근자에 번역된 그의 책들에 겹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지금까지 번역된 비노바 바베 관련서는 모두 네 권이고, 앞서 말한 대로 모두 2000년 이후에 나왔다(국립중앙도서관 데이터베이스 검색에서 2000년 이전의 비노바 바베 관련서를 찾지 못했다). 이 네 권의 번역은 김문호 씨가 도맡았다.
『비노바 바베』(실천문학사, 2000)는 그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소개한 최초의 책이다. 이 책은 전기로 분류되지만 막상 읽으면 자서전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든다. 1인칭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다. 이 책을 지은 칼린디는 바로다 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받은 직후인 1960년 비노바 바베를 만났고, 그녀는 언론?출판과 관련해서 비노바 바베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칼린디가 꼼꼼하게 기록한 비노바 바베의 강연과 대화가 바탕이 되었다. 비노바 바베는 인도 카스트의 최고 계급인 브라만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육체노동자를 자임한다.
“나는 육체노동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좋은 전성기인 32년 동안을 노동을 하며 지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사회가 행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그런 형태의 노동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특히 노동 가운데서도 인도 사회가 천시하고 경멸하는 형태의 노동, 즉 똥 치우는 일, 옷감 짜는 일, 목수일, 농사 등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비노바 바베는 평생 책을 가까이 한 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제도 교육과는 거리를 두었다. 비노바 바베가 대학입학자격 증명서를 불태운 사건은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일화로서 전기들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다. 먼저 30여 년 전의 약전에 나타난 관련 대목을 보자.
“그가 19세 되던 1916년, 자신의 학교증명서를 불에 태워버렸다. 옆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래서 바베를 꾸짖으며 물으니까, “아마 그건 내게 이제 필요 없을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칼린디의 『비노바 바베』에는 이 장면이 좀더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집을 떠나기 전에 나는 가지고 있던 모든 자격증들을 불살랐다. 대학입학자격증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사슬들을 단번에 잘라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몹시 걱정을 하시며 왜 그런 것들을 불사르느냐고 물으셨다.
“이제 이런 것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대답하셨다.
“지금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냥 보관한다고 해로울 건 없지 않겠니?”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녜요 어머니, 나는 월급 받는 일은 절대로 안 할 겁니다.”」
영국 식민지 치하 인도 감옥에서의 비노바 바베의 일화는 그의 비범함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범에 대한 특별 대우와 옥중 투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가 위험인물로 분류돼 보내진 벨로레 감옥에는 정부의 비용으로 갖가지 사치스런 물품이 차입되었던 모양이다. 비노바 바베는 이런 관행이 “우리를 지극히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며, 우리의 운동에 활력을 없애버리고자 의도된 것이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것들을 싫어했다.
벵갈 지역에서는 기근이 발생했는데도 교도소 측에 간이침대와 의자 같은 것들을 요구하고, 그것들을 주지 않으면 소란을 피우면서 ‘투쟁’ 운운하는 동료 양심수들을 못마땅해했다. “결국 정부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면, 우리는 그것을 개선이요, 승리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승리요, 개선인가! 그것은 어리석음이요 패배일 뿐이었다.”
당시 식민지 인도의 감옥에서 정치범들에게는 책을 읽을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물론 반입 금지 도서들은 수감자들에게 독서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양심수들은 열 권 넘게 신청해도 한두 권밖에 반입 허가가 나지 않는데 비해, 비노바 바베는 책을 신청하는 대로 반입이 허가되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에 죄다 얼간이들만 앉아 있어서 그렇지요. 무엇이 진짜 위험한 것인지를 모르니까요. 만일 정부가 그걸 알았더라면 『(바가바드) 기타』나 『우파니샤드』는 들여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기타』를 가지고 기초를 튼튼히 쌓지 않았더라면 간디 선생은 아마도 그렇게 ‘위험한’ 간디는 되지 않았겠지요.(중략) 삶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다루는 책들만이 독재권력을 파괴할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비노바 바베는 감옥에서 강연자로서 큰 인기를 모았다. 둘리아 감옥에서 함께 수감된 성자들을 상대로 시작한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강연이 일반 남자 죄수와, 남자 죄수와의 접촉이 금지된 여자 죄수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심지어 어떤 간수는 자신의 아내까지 데려와 비노바 바베의 강의를 들었다.
『천상의 노래』(실천문학사, 2002)는 비노바 바베가 감옥에서 행한 『(바가바드) 기타』 강연록이다. 그는 『기타』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는 주된 이유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바가바드) 기타』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항상 도움이 된다고 덧붙인다. “『(바가바드) 기타』는 삶에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무(스바다르마)를 강조합니다. 만일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하나의 강력한 받침대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시간’은 2004년 출판?독서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주제어 가운데 하나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불기 시작한 ‘아침형 인간’의 위력이 여전하고, ‘저녁형 인간’에다 ‘잠자는 기술’을 조언하는 책까지 등장했다. 여기에다 예전의 베스트셀러였던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정신세계사, 1990)가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황소자리, 2004)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그런데 『비노바 바베』에는 비노바 바베의 시간관이 언급돼 있어 눈길을 끈다. 그는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안배하는 계획을 생각해냈는데 우선, 하루에 여덟 시간은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한다. “나머지 열 여섯 시간 가운데서 다섯 시간은 목욕하고, 밥 먹고, 다른 육체적인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한다. 두 시간은 영성활동, 즉 기도와 신앙서적 읽기, 예배적인 의미를 지닌 실잣기, 또는 다른 예배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한 시간은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완결 짓기 위해서 완전히 자유시간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럼 이제 남아있는 여덟 시간에는 무얼 할까? 비노바 바베는 그 시간을 공적인 활동, 다시 말해 생활비를 버는 일에 써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비노바 바베는 탁월한 사회개혁가였다. 그는 토지헌납 운동인 ‘부단 운동’을 주도했다. 비노바 바베는 지주들에게 땅이 없는 이들을 위해 6분의 1의 토지를 공유하자고 요구했는데 그 근거는 이렇다. “인도의 가정들은 평균적으로 아들을 다섯 명 정도 두고 있기 때문에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여섯 번째 아들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비노바 바베는 삼중의 변화를 사회개혁의 목표로 삼았다. “먼저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개인의 생활습관에 변화가 있어야 하며, 그것이 사회구조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가 시크교를 보는 관점은 우리에게 인도 사회 불안의 한 요소로만 알려져 있는 시크교도에 대한 시각 교정을 유도한다. “시크교의 기본적인 원리는 이런 것입니다. 온 세계가 하나의 인종이요, 하나의 공동체다. 그 안에서는 구별도 없고 카스트의 차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정신이지요.”
그런데 비노바 바베는 ‘부단 운동’을 이끌며 인도 전역을 돌아다닐 적이나 정부의 요청으로 분쟁을 중재하러 갈 때에도 주로 걸어다녔다. 『세계의 위인상』에 실린 그의 약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네루 수상은 이 지역(아삼 州-인용자)을 바베가 방문해 주기를 바랐고 그래서 비행기를 제공했지만 바베는 비행기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4천 마일이나 도보여행을 했었다. 하루 평균 10마일을 걸어서 5개월이나 걸렸다.”
그는 부단 여행을 하는 동안 왜 그렇게 걸어다니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그가 걷기를 고집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 다니는 것보다는 도보로 다녀야 그 지방과 그곳의 사람들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걸어서 여행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상상하지도 않았던 의외의 것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도보로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노바 바베는 마하트마 간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계의 위인상』의 짧은 전기는 도입부에서 그런 점을 확실히 밝혔다. “현재 또 하나의 인도인이 수 백만의 자유민으로부터 간디가 받던 숭배를 받고 있다. 비노바 바베라는 인도 사람이다. 그는 여러 지역에서 제2의 간디로 존경받고 있는데 그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간디의 제자로서 22세 때 간디의 아쉬람(공동체-인용자)에 참석하여 오늘날 70이 가깝도록 열심히 일하였기 때문이다.”
『비노바 바베, 간디를 만나다』(오늘의책, 2003)는 어째서 그가 간디 사상의 계승자로 평가받고 있는지 잘 말해 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비노바 바베는 곡진한 해석을 통해 간디의 사상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아래의 구절은 그 단적인 보기다.
“그는 진리와 비폭력을 사회활동, 정치, 건설 프로그램, 공공 기구, 교육과 연결지었고, 진리와 비폭력은 사회의 향상을 위해서 그리고 공공활동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또한 그런 것들이 사회적 섬김의 시금석이 된다고 선언했다.”
비노바 바베는 위대한 인물들로부터는 그들의 이념만 취해야지, 그들의 삶에서 나타난 우연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해선 안 된다고 경계한다. 그런데 이런 점은 간디뿐만 아니라 비노바 바베에게도 적용돼야 할 듯 싶다. 인도 출신의 생태주의자인 사티쉬 쿠마르가 엮은 비노바 바베 사상선집이라 할 수 있는 『버리고, 행복하라』(산해, 2003)에 담긴 비노바 바베의 삶의 철학은 그것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섣불리 받아들이기에는 곤란한 측면이 있다. 비노바 바베의 철학이 인도 사회에 기초해 있는 데다 벌써 한 세대가 흘러서 그런지 몰라도 세상사를 단순하게 바라본 대목이 적잖다.
아무튼 사티쉬 쿠마르는 간디에게 있어 비노바 바베가 한 역할을, 비노바 바베에게 하고 있는 듯 싶다(『비노바 바베』에도 사티쉬 쿠마르의 글이 첫머리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비노바 바베는 간디와 사티쉬 쿠마르를 이어주는 가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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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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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과한 생각들로 스스로가 너무 힘들때가 많습니다.
생각을 뺄수있는 기술이 있다면 정말 참여하여 가르침을 얻고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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