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성 돋보이는 은둔의 소설가 쿳시의 작품 세계
이름이 꽤 낯설다 싶은 해외 작가의 번역서가 적잖이 나와 있다면, 그 작가는 십중팔구 노벨상을 받은 작가이기 쉽다. 저작권에 구애됨이 없었던 예전일수록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농후한데 체슬라브 밀로슈, 엘리아스 카네티, 옥타비오 파스 등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다.
200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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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꽤 낯설다 싶은 해외 작가의 번역서가 적잖이 나와 있다면, 그 작가는 십중팔구 노벨상을 받은 작가이기 쉽다. 저작권에 구애됨이 없었던 예전일수록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농후한데 체슬라브 밀로슈, 엘리아스 카네티, 옥타비오 파스 등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다. 또한, 이들이 쓴 책의 한글판 번역서는 노벨상 수상 연도와 그 이듬해에 출간이 집중된 경향을 보여주었다. 하나의 작품이 여러 군데서 나오는 중복 출판도 많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을 고비로 이러한 마구잡이식 출판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94년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가 해적판이 나돈 거의 마지막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노벨상의 후광은 여전히 대단한 것이어서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나오기가 무섭게 수상 작가의 책이 서점에 깔린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이미 우리 출판?독서계에도 익히 알려진 작가의 수상이 잦은 까닭에 기 출간본들이 새 단장을 하고 출시되는 상황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귄터 그라스와 A.S. 네이폴이 그러한 가까운 예에 속하고, 2003년 수상자인 존 쿳시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 사회에는 노벨 문학상을 떨떠름하게 여기는 풍조가 없지 않다. 노벨상에 열광하는 태도가 지닌 이른바 '문화사대주의'의 측면을 비판하는 것에는 동의하나, 노벨상 수상작의 '문학성'을 문제 삼는 것에는 선뜻 맞장구를 치기 어렵다. 사실, 노벨 문학상에 대한 출판계의 열기와 독자들의 반응은 예전만 못하다. 시인이나 제3세계권에 속한 소설가는 노벨상의 후광 덕을 못 본 사례가 허다하다.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끄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는 대부분은 영어, 불어, 독어권 작가들이다. 그나마 이제는 그것도 제한적이다.
필자는 노벨 문학상이 적잖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해도, 일년에 한번 세계적 수준의 해외문학을 접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소중한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문학이 침체의 그늘에서 좀처럼 벗어날 기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근자에는 우리 독자들에게 수준있는 문학을 향수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도 각별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전인류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존 쿳시의 작품들은 더욱 곱씹어 읽을 가치가 있어 보인다.
존 쿳시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강한 인상은 그것들이 결코 남의 얘기로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야만인을 기다리며』(왕은철 옮김, 들녘, 2003)와『추락』(왕은철 옮김, 동아일보사, 2000)이 특히 그랬는데, 이것은 소설의 밑바닥에 깔린 식민 지배 의식과 특정 계층의 권력 행사 같은 것을 우리도 겪어서일까. 물론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갈등은, 우리에게는 지역간?계층간 갈등으로 나타난다.
한국과 남아공은 한때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한 아픈 기억을 공유한다. 한국은 그 기간이 짧았고, 남아공은 꽤 길었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우리나라는 대만, 남아공, 이스라엘 등과 함께 초청 받지 못했다. 한국이 '반둥 회의'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북한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서였겠지만, 미국 블록의 일원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 모양이다. 아무튼 제3세계에 속하는 네 나라가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제외된 것은 반공, 호전성, 인종차별주의가 그 이유였다. 백인정권이 흑백 분리정책을 밀어부친 남아공은 만델라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국제 사회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외톨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가상 제국의 어느 변방 도시를 무대로 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는 그 도시의 치안 책임자인 무사안일의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다. 그의 직책과 업무와 일상, 그리고 바람 따위를 서술한 대목을 보자.
"나는 한가로운 변방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이다. 나는 교구세(敎區稅)와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경작지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주고 여기에 있는 하급 관리들을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1주일에 두 번씩 법정업무를 주재한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의 것을 바란 적이 없다."
또, 그는 평화를 선호한다. "나는 평화로운 게 좋다.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게 어쩌면 좋은 것일 게다." 도시에서 남쪽으로 2마일쯤 떨어진 곳의 모래로 덮혀 있는, 폐허로 변한 집들의 흔적을 발굴하는 게 취미다. 지위를 적절히 활용해 여자를 밝히는 늙은이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고생으로 편하게 먹고"산다는 것은 인정한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문명이라는 게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는 "문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그는 원주민 소녀를 고문했던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하다는 것도 잘 안다.
수십년간 이어진 변방 도시에서의 그의 평온한 일상은 제국의 수도에서 파견된 고위급 보안 요원 죨 대령의 출현으로 무참히 깨진다. 포로로 끌려와 고문을 당해 눈이 먼 원주민 소녀에게 동정심을 느낀 그는, 소녀를 보살펴 주고 원주민들에게 그녀를 데려다 준다. 이러한 그가 사관학교를 나온 젊은 장교에게 다음과 같이 비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나를, 수년 동안 이렇게 침체된 곳에서 게으른 토착민들의 방식에 맟춰 살다 보니 구태의연한 생각에 젖어 있고,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 하는 위태로운 생각을 하는 한심한 민간인 관리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그는 야만인과 내통한 죄로 치안판사직에서 쫓겨나고 갖은 곤욕을 치른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변방 도시 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받는 도시 행정 책임자로 복귀한다. 치안판사가 했던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는 더 이상 권위적이지 않다. 소설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묘하게 읽히는 힘이 있다. 다만, 흡인력이 강한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 것은 아쉽다.
이 소설의 번역자는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 소설이 마치 이라크 전쟁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통렬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고 했지만,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소설의 내용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도 그대로 투사할 수 있다.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에서 찾지 못한 대량살상무기만이 '야만인'은 아니다. 예전의 '야만인'이 북한의 침략 위협이었다면, 요즘의 우리에게 대표적인 '야만인'은 해외 신용등급 하락일 것이다.
제국에 충성하는 군인과 관리들은 야만인의 침략을 '학수고대'하지만 야만인은 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야만인은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를 닮았다. 쿳시는 베케트 전문가이기도 하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법적 절차라는 건 단순히, 많은 수단들 중 하나일 뿐"이라거나, "돈도 없고 줄도 없고 학벌도 변변치 않은 젊은이들이 정상에 이른다는 건 힘든 일"이라는 지적은, 이것이 제국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오늘 우리의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영 헷갈린다.
『추락』(왕은철 옮김, 동아일보사, 2000)의 주인공인 영문학자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치안판사와 닮은꼴이다. 우선, 연배가 비슷하다. "그는 이혼까지 한, 쉰 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한다." 자기 직업에 충실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해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그의 몸은 건강하고 정신은 맑다. 직업상, 그는 학자다. 혹은 그래 왔다. 가끔씩은 그의 중심부는 학문적인 일에 관련돼 있다. 그는 그의 수입과 기질과 감정적인 수단의 반경 내에서 살아간다. 그는 행복한가? 대부분의 척도로 보자면 그렇다. 그는 그렇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가 『추락』(왕은철 옮김, 동아일보사, 2000)의 주인공인 영문학자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오이디푸스 왕〉 의 마지막 후렴구를 잊은 건 아니다. 죽기 전에는 누구도 행복하다고 말하지 말라."
이윽고 그의 행복한 삶은 파국을 맞는다. 그는 추문에 휘말려 대학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교수라는 직위를 앞세워 제자인 여학생을 농락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기에 동정의 여지는 별로 없다. 그는 대학 당국의 타협 제안을 거절하고 깨끗이 물러나 남아공의 동부 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는 딸을 찾아간다. 그는 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청교도적인 시대야. 사생활은 공적인 일이 되지. 사람들은 성적인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거야. 그들은 가슴을 쥐어뜯고, 뉘우치고, 가능하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구경하기 원했지. 사실상 TV쇼를 원한 거지."
그의 딸 루시는 흑인들의 땅에서 농장을 일군다. 그녀는 흑인 세 명의 습격을 받아 윤간을 당하고 임신까지하게 되지만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루시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여기 머무는 것에 대한 값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며, 평화를 위해 치러야 할 희생 정도로 여긴다. 데이비드 루리는 딸이 선택한 삶과 행동에서 약간의 자극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의 삶의 행로를 완전히 뒤흔드는 차원은 아니다.
『포』(조규형 옮김, 책세상, 2003)와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왕은철 옮김, 책세상, 2001)는 '소설가 소설'로 부를 만하다. 물론 전형적인 소설가 소설은 아니지만 말이다. 두 소설에는 공히 소설가가 등장한다. 『로빈슨 크루소』를 독특하게 패러디한『포』에 나오는 포는 바로 『로빈슨 크루소』의 원작자인 다니엘 디포다. 글쓰기의 자의식을 주제로 삼은 듯도 하나, 이 소설을 통해 쿳시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포는 이런 말을 한다.
"책을 쓰면서, 참으로 자주 의심의 미로에서 길을 잃었지요. 내가 터득한 비결은 서 있는 곳에 표시나 표지를 달아 놓아, 다시 모색의 길에 나설 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만들어 길을 잃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지요. 일단 표시를 하고 나면, 모색을 계속하지요."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다름 아닌, 도스토예프스키다. 왕은철 교수(전북대 영문학)는 이 작품이 "쿳시의 개인적인 숨결이 가장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아니 간접적이고 우회적이어서 더욱 가슴 아프게, 배어 있는 소설"(『현대문학』2000년 9월호)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양아들의 죽음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쿳시의 아들은 자살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5』(범우사)의 2001년 6월 18일치를, 장정일은 쿳시의 소설들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날 독서일기의 끝에 붙은 사족이 재미있다.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 백인인 J.M. Coetzee는 『야만인을 기다리며』(두레, 1982-인용자)에서는 쿠찌,『마이클 케이』(정음사, 1987-인용자)에서는 코에체,『추락』에서는 쿳시로 불리웠다. 세 사람 모두 좋은 번역자들이어서 어떤 이름을 사용할까 고심하다가, 작가와 친분을 가진 『추락』의 번역자를 따라 쿳시라고 쓴다(왜냐하면 그의 이름을 직접 불렀을 테니까. 이를테면 "헤이, 쿳시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 잔 하세.")"
그런데 더 정확한 발음은 '쿳시이'인 모양이다. 한국인 친구와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이름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다. "정확한 발음은 쿳시이(kut-SEE)입니다. 두 번째 음절에 강세를 주면서 '시이'라고 길게 발음하고, 첫 음절은 풋(put)과 운이 맞는 쿳(kut)으로 발음하면 됩니다."(『21세기 문학』제4호, 1998년 가을-겨울호)
서면 인터뷰이기는 해도 국내 문예지에 실린 쿳시와의 인터뷰는 아주 귀한 자료다. 쿳시는 은둔자로도 유명한데,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후 지금까지 그는 어느 매체와도 인터뷰를 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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