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면 많은 창작자가 신간을 들고 결집하는 아트 북 페어가 있습니다. 올해로 17회를 맞이한 언리미티드 에디션(이하 UE)입니다. 참가팀과 관람객 모두에게 명실상부한 연례행사로 자리 잡은 UE의 기획자 이로를 만났습니다. 가장 궁금했던 건 어떻게 17년을 지속할 수 있는지입니다. 모든 일에는 생명력이 있기 마련인데 UE는 어떻게 매년 뜨거운 용암처럼 활력을 내뿜을 수 있을까요. 감탄이나 낭만의 시선을 한 꺼풀 벗겨낸 뒤, 그에게 실무적인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긴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는 길 “여러분도 어떤 기간에만 나올 수 있는 작업으로 갱신을 해주세요, 저희도 갱신을 하겠습니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뒷부분에 묵직한 방점이 찍혀 있는, 일종의 약속이자 선언입니다. 매년 포스터뿐 아니라 로고, 서체까지 행사의 외형을 전면적으로 새롭게 구축한 뒤, 다양한 층위에서 지금 현재 펼쳐지고 있는 작업들을 초대하는 UE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 박선경
형식 없음의 형식
언리미티드 에디션(이하 UE)을 함께 만들고 있는 구성원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행사 전반을 공동으로 꾸려가는 기획단이 있습니다. 기획단은 저를 포함해 이보영, 남선우, 이도현, 김청, 이렇게 다섯입니다. 외부에서 함께 작업을 해주시는 분들도 계신데, 쭉 합을 맞춰 온 분도 있고 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경우도 있어요. 올해 기준으로는 그래픽 디자이너 박선경, 공간 디자이너 박길종, 서체 디자이너 장우석이 함께 합니다.
1년 사이클이 궁금해요. 예를 들면 올해 UE17 기획 회의는 언제 시작하셨나요.
기획단 멤버들한테 미안하지만 행사가 끝난 직후에 바로 시작합니다.(웃음) 미세하게라도 하부적인 업무를 하면서 1년을 다 사용하고 있어요. 행사가 끝나면 내년 기획을 시작하고 연초부터 기초적인 회의들을 진행한 뒤 참가팀을 모집하고 여름에 개별 발표를 합니다. 11월까지 참가팀 분들은 작업 준비를 하시고, 저희는 아이덴티티를 만들거나 키워드를 쌓으며 어떤 방식으로 이번 행사를 진행할지 구체화합니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오늘 UE17 포스터가 공개되었는데, 지금부터 3-4주가 가장 바쁜 시기로 거의 모든 걸 불태워서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UE 기획단에서 매년 한 해의 키워드를 선정한다고 들었습니다. 외부에는 공개하지 않으시죠. 내부에서 키워드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궁금합니다.
네, 오로지 내부 공유용으로 키워드를 정하고 있습니다. 엄밀한 방향이나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키워드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어요. 좀 더 고집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키워드가 문학적이거나 추상적인 문장, 단어 혹은 그래픽의 형태일 수 있습니다. 일종의 마음가짐 혹은 유희라고 할 수 있죠.
아무도 모르는 키워드이기 때문에 바깥에서는 관찰할 수 없지만, 저희에게는 올해 이 부분은 꽤 끌어올려서 성립시켰구나 저 부분은 실패했구나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기준점이 됩니다. 심지어 그게 성립했다고 반드시 기뻐할 필요조차 없을 수 있죠. 매년 박선경 디자이너가 키워드를 제시할 뿐이고 저희는 그에 따라 그래픽이나 공간 디자인 방식 등의 합을 맞추며 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진행 과정에서 휘발되거나 외부에서 감지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또 키워드를 공표하지 않기 때문에 선정 과정이 간단합니다. 가령 박선경 디자이너가 “제가 생각하는 올해의 문장은 이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단 한 명도 반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상관이 없으니까, 저희 내부의 작동 원리로만 쓰이니까요.
처음 들었을 때 공표되지 않음을 포함해서 적절한 형식이다, 저 형식을 어떻게 찾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편으로 왜 굳이 축제의 테마를 정해놓고 비공개로 하는지에 관해 궁금증이나 의아함, 나아가 어쩌면 무책임함을 느끼실 수 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무엇보다 저희가 이 행사를 지속하고 싶기 때문인 것 같아요. 기획단 모두가 본업이 따로 있기 때문에 자체적인 원동력과 흥미를 잃지 않게 해주는 구심점이 필요했습니다. 심지어 저조차도 코어는 서점 유어마인드의 운영이니까요. 저희 모두 생업이 UE가 아니다 보니 너무 사무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면 자칫 추진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택한 거죠.
그러면 참가팀을 초대할 때 특히 주의를 기울이는 측면이나 기준이 있을까요?
이것도 저희의 운영 방식에 관해 잘 말씀을 드려야 하는 부분인데, 그것조차 구체적으로 명문화된 기준을 만들어 놓지는 않았습니다. 명문화를 하면 명문화된 텍스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배제해야 하잖아요. 테두리 바깥의 사람들과 함께 모이려고 행사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스스로 모순이 발생하죠.
이런 점을 이해하는 8~9명의 심사단을 꾸린 다음에, 심사단이 자신의 기준에 따라 각자 올해 초대하고 싶은 팀을 구성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도 다 같이 모여서 협의하지 않고, 각자의 결과를 합산한 뒤 최종 통계를 내서 결정합니다. 물론 초대하지 못해 정말 아쉬운 분들도 많이 계시죠. 참가팀 리스트의 경계 안팎은 사실 서로 다르다고 말하기 어려운 미묘한 균열들이 생기는 지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UE라는 테두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면 참가팀 리스트를 인위적으로 배열하며 UE가 지향하는 바를 강하게 내세우지 않더라도 행사를 완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도 해요.
그래서 누군가 UE 초대 기준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설명 드리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대신 심사단 중 한 명인 저의 기준은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의 경우에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많은 부분이 애매하거나 무너져 있더라도 본인의 색을 강하게 드러내는 지점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또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보기도 하죠. 각자 보는 관점이 서로 다 달라요.
거기서 UE의 다양성이 시작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맞아요. 저희가 동일한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동일한 전공을 갖고 있지도 않고, 동일한 지역에서 오지 않았고, 모든 게 다 뒤섞여 있는 집단이거든요. 그러니까 타이포나 인쇄나 일러스트 어느 하나에 포커스가 맞춰진 결과값이 나오지 않는 거죠.

ⓒ 임효진
선 바깥으로 빗겨나기
그럼 이로님 전공은 무엇인가요?
국어국문학입니다.
디자인이나 사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문학이군요.
그래서 오히려 더 이런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학교를 다닐 때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시절을 다 통과하고 결국에는 책을 만들고 서점을 운영하고 페어를 꾸려 나가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익숙한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가 아닌 것에 흥미가 갔습니다. 잘 모르는 세계를 보고 싶어 일러스트나 사진과 같은 시각적인 작업에 시선이 향했던 것 같아요.
바깥을 가보고 싶으셨군요. 언리미티드 에디션 역시 이름에서부터 바깥을 향한 관심을 드러내죠. 직접 지으셨나요?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우연하고 자연스러운 계기로 만들어진 행사예요. 김광철 편집장님이 홍대에서 <GRAPHIC>을 만드시던 시절에, 어느 날 저희가 사무실에 놀러가서 외로움을 토로한 거죠.(웃음) 독립출판물을 만들며 닿지 않는 벽에 소리치는 기분에 관해 말씀드렸을 때, 편집장님이 정말 순간적으로 제시한 게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페어를 열어야 한다, 두 번째는 그 페어의 이름은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다, 라고요. 사람들이 잘 안 믿는데 김광철 편집장님이 그 짧은 시간에 두 가지 진단을 내려서 고한 거거든요.
저희한테는 약간 운명처럼 소중하고도 이상한 시작이었습니다. 사운을 걸고 기획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저희에게 온 행사였고, 저희 역시 다른 의견이나 반론을 제시하지 않았어요.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이름이 굉장히 모순적이라 좋은 에너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한 해에 유어마인드라는 책방을 열고 바로 UE도 개최하셨잖아요. 원래 행동파이신가요?
너무 절실해서 행동하는 거였어요. 제가 진취적이거나 행동파여서가 아니라 유어마인드를 시작했던 1, 2년 차 때는 심리적이든 재정적이든 어떤 식으로도 저희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없었어요. 오해를 하실 수 있는데 황무지처럼 아무도 안 오고 아무도 책을 안 샀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왜 그렇게 느꼈는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계속해서 설득하는 데 힘을 썼기 때문이에요. 당시는 지금과는 상황이 달라서 독립출판물을 보고 누군가 “이게 뭡니까”라고 물으면 “이것은 이러이러한 작업입니다. 이런 가치가 있고, 저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계속 설명하고 설득해야 했거든요. 지금은 오히려 저희가 뒤로 물러나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다가와 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그런 관계에서 오는 심리적인 보상이 굉장히 커요.
그럼 막막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직접 판을 차리셨던 거네요. 하지만 한편으로 최초의 시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열기나 에너지가 있죠. 1회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1회에 관해 제가 재밌게 기억하는 두 가지가 있어요. 초기에는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공간이 너무 좁아서 공연하는 바로 옆에서 책을 팔았어요. 관객과 음악가와 셀러와 손님의 경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취하지 않을, 취할 수 없는 결정이죠.
다른 하나는, 1회가 가진 특수성 중 하나였는데 그 누구도 부스를 신경 써서 꾸미지 않았어요. 지금은 어떤 면에서는 과열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많은 인파가 찾는 거대한 공간에서 부스를 보여줘야 하니 긴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준비하시죠. 서로 다른 부스들을 통해 시각적인 높낮이나 재미와 균형이 생겨나기 때문에 너무 감사한 일이죠. 다만 아무도 부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수함이 있는 것 같아요.
약간 고향 같은 느낌도 있으신가요?
저의 장점이자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그때를 그리워하지는 않아요. 그냥 지금이 좋아요. 그때는 그때 나름의 힘듦이 있었고 지금은 지금 나름대로 힘듦이 있죠. 그것들로 인해 저희가 볼 수 있는 경도 다르고요. 회차에 따라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서 17년 동안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갱신하는 회색들
UE1부터 함께 작업해 온 디자이너 박선경님과 참여한 <GRAPHIC> 51호 인터뷰에서,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옅은 회색’이라고 표현하셨어요. UE 구성원들은 다른 색을 말씀하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저희가 라운드 테이블을 안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UE가 라운드 테이블을 안 하는 게 어떤 분들께는 큰 실망이기도 하거든요. 왜 그 정도로 역사가 있는 플랫폼에서 올해를 진단하지 않느냐, 올해에 관해 토론하지 않느냐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거거든요.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올해는 이런 색입니다’라고 제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대화가 가능한 회색의 장을 여는 거죠. 저희가 생각하는 한 가지 철학, 한 가지 문제의식, 한 가지 논리로 UE를 끌어당기지 않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설정을 곳곳에 해두는 편입니다.
좋게 말하면 자율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산만함이라는 것을, 이를 답답하게 느끼거나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신 저희가 끝끝내 남기고 싶은 건 산만함이 고통이 아니라 열린 선택일 수 있도록, 현재 벌어지고 있는 흥미로운 여러 층위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모으는 것입니다.
옅은 회색으로서 UE의 정체성도 있지만 한편으로 매년 포스터와 로고, 서체까지 모두 바꾸시잖아요. 강력한 의지이고 선택이죠. 그래서 강한 에너지로 밀고 나간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저랑 박선경 디자이너의 기질이 만들어 내는 시너지 중 하나입니다. 둘 다 한 가지를 고정해서 지속하려고 하지 않거든요. 또 독립 출판이라는 신을 고정된 아이덴티티와 약속된 포스터로 보여주는 데 회의적인 편입니다.
저희가 어쩔 수 없이 한정된 인원, 한정된 시간, 한정된 예산으로 행사를 운영하면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매년 아카이빙을 할 것인가, 매해 리셋을 할 것인가. 두 가지를 다 하려면 더 많은 인원이나 예산이 필요하거든요. 저희는 매해 리셋하는 데 에너지를 다 쓰기로 한 거죠. 매년 출판물의 지형도가 조금씩 달라진다면, 그 다름이 느껴질 수 있도록 저희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씁니다. 3일 동안 북서울미술관을 활활 불태우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거죠.
일종의 동력으로서 재미나 즐거움을 위한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좀 더 실천에 가까운 거네요.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면 저희 모든 구성원들이 1년이 지나면 이미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작년 포스터의 맥락이나 로고의 메인 컬러, 서체의 시각적인 부분 등이 1년이 지나면 이미 과거가 된다는 입장이죠. 저희가 UE에 어떻게든 지금 활동하고 있는 분들을 모으고 싶다면, 저희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UE가 참여 조건으로 강제하는 게 신간이거든요. 신간이 없으면 신청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어떤 기간에만 나올 수 있는 작업으로 갱신을 해주세요 저희도 갱신을 하겠습니다. 이런 에너지를 공통으로 가지고 가는 거죠. 그런데 이게 정말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하는 말인데, 역사를 무시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저희의 한계 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저희는 지금에 방점을 찍는 쪽인 것이죠.
갱신이라고 했을 때 코로나 시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의 실험을 하셨잖아요. 처음으로 온라인에서만 행사를 진행한 2020년의 UE@HOME, 책 100권을 적극적인 전시 형태로 구성한 2021년 UE 100이 있었습니다. 혹시 이런 기획을 번외처럼 또 진행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두 해가 저라는 인간을 조금 바꾸어 놓았습니다. 모순된 말일 수 있는데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너무 보람 됐지만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요.(웃음) 대신 감사한 건 저희가 선택한 매체가 실험이 가능했다는 점이죠. UE@HOME을 예를 들면 코로나 시기에 대형 서점이 온라인에서 유사한 방식을 취할 수는 없죠. 이미 거대한 온라인 시장에 몸담고 있었으니까요. 저희는 온라인 플랫폼이라는 게 없는 매체를 선택한 사람들이고 역설적으로 시장이 너무 작아서, 급변하는 상황에 맞춰서 무언가를 실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거죠. 비대면으로 책들을 회전시켰던 건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열기였고요. 행사장에서 대면하며 생기는 심리적이고 시각적인 열기와는 굉장히 다르게, 비대면의 열기는 전파적이거든요. 의미 있는 경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틀의 힘이 너무 강했어요.
전시의 형식을 취한 UE 100은 저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UE를 회색이 아닌 색으로 채워보는 시도를 한 해였어요. 사실 저희가 매년 UE를 해온 사람으로서 공간을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어요. 완전히 180도 다른 일이었습니다. 저희가 전시의 노하우가 없는 사람들이 아닌데 책만으로 전시를 만들어 내야 하는 미션은 정말 쉽지 않았어요. 17회 중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끝끝내 깨달은 건 저희는 결국 스스로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틀을 짜고 그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플레이를 함께 지켜보는 것, 그것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두 번의 실험이 스스로를 조금 바꾸어 놓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당시의 경험이 어떤 흔적을 남겼나요?
그 후에 저의 행동 패턴이나 유어마인드가 나아가는 방향이 좀 바뀌었습니다. 바깥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는 아니고요.(웃음) UE를 10년 이상 지속해 오는 동안에는 잘 인지하지 못했는데, 두 번의 변형적인 플랫폼을 경험한 뒤로는 처음으로 어떤 노하우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주 크게 뒤틀었을 때도 결국엔 했잖아요. 그걸 함께 완성해 낼 수 있는 노하우가 안에 있었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UE100. 100권의 책을 Measure(측정), Turn(턴), Move(무브), Select(셀렉트)를 테마로 보여준 전시 ⓒ손미현
가이드북과 맥도널드
UE는 매년 특정 시기에 열렸다가 닫히는 임시의 공동체 느낌이 있습니다. 모든 행사가 공동체의 감각을 주지는 않죠. 실제로 UE를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공동체라고 느낀 순간이 있으신가요?
잘 전달드릴 수 있도록 조심해서 말씀드려야 하는 내용인데, 저희 기획단 모두가 의식적으로 그런 감정을 차단하는 것 같아요. 참가팀 분들이나 관람객분들이 그렇게 느껴 주신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UE를 공동체라고 느끼면 변질되는 게 많아서,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약간 식구처럼 되는 마음을 경계하시는 거네요.
네 맞아요. 그래서 정말 사람들이 기가 차 하는 분량의 UE 가이드북이 있거든요. 행사 2주 전에 이메일로 가이드북을 배포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물어보고 싶은 내용의 대부분은 여기 답이 있습니다. 저는 이 멘트와 가이드의 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공동체라면 이런 방식으로 하면 안 되겠죠. 그런데 저희는, 3일 동안 좋은 행사를 만드는 일에 공감하신다면 우리끼리 으쌰으쌰 하는 게 아니라 여기 가이드가 있습니다 최대한 여기에 맞춰주세요 그래야 흥미로운 행사를 안전하게 완성할 수 있어요, 라는 메시지를 드리는 거잖아요.
UE를 잘 운영하고 싶은 데서 비롯된 선택이군요. 일종의 애정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답변을 들으며 문득 궁금해졌는데, 어쨌든 에너지의 총량은 정해져 있잖아요.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에너지가 무한정 공급되지 않고 소진이 될 때도 있는데 어떻게 대처하세요?
제 장점이자 단점인데 의미 부여를 잘 안 하는 편이라 가능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결과가 정말 잘 나왔을 때도 약간…흥분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소위 말하는 도파민이 잘 터지지 않는군요.
네, 도파민에 무딘 편입니다.(웃음) 2만 4천 명이 방문해 주셨다는 수치를 받으면 기획단으로서는 정말 잘된 일이잖아요. 하지만 개인으로서는 평소와 조금 다른 감동으로 다가와요. 대신 행사가 끝난 뒤에도 그렇게까지 허망해지지 않고요. 기질상 큰 동요가 없어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지금 조금 한계이기도 한 것 같아요. 슬픈 얘기인데 노하우가 늘어나는 그래프보다 나이가 드는 그래프의 힘이 더 세더라고요. 예전에는 밤을 새서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있는데, 이제는 점점 제약이 생기니 그에 따른 어려움이 있습니다. 기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지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기획단분들도 성향이 비슷한가요?
물론 조금씩 다르지만 도파민에 있어서는 다 비슷한 것 같아요. 행사가 끝난 뒤 매년 하는 세레모니가 있습니다. 다음 날 현장에 모여서 철수 작업을 해야 하거든요. 아무도 없는 미술관 휴관일에 가서 마무리한 뒤 맥도널드에 가는 게 저희들의 소중한 세레머니예요.(웃음) 맥도널드에서 나누는 대화들도 등고가 높지 않습니다. 이건 정말 문제였다고 강하게 지적하거나 반대로 너무 크게 가치부여를 하며 좋게 말하지도 않아요.

형식으로서 부직포 가방
이로님은 UE 기획자이자, 유어마인드 운영자이자, 작가이죠. 각각의 정체성이 조금씩 다를 것 같습니다. UE를 운영하며 길러진 근육에는 어떤 게 있나요?
UE랑 책방 업무는 너무 달라요. 가장 다른 건 1초 만에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일입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10초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하면 이미 지나가 버린 사건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순발력이 없는 사람인데 UE를 개최하는 3일 동안은 좀 다른 인간이 되는 것 같아요.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보다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눈앞의 사안을 해결하는 일에 온통 집중하는 편입니다. 서점의 경우에는 오히려 굉장히 느슨하고 긴 호흡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잔잔한 시도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변화를 지켜봐야 해요.
세 가지 중 기질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제 기질은 너무나 책방이죠. 유어마인드가 저한테 가장 잘 맞지만, 오히려 그래서 유어마인드만 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 같습니다. UE가 아니었으면 말라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재정적으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요. 유어마인드가 가지고 있는 느슨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플랫해지다 못해 얄팍해질 수도 있는데, UE가 1년에 한 번씩 커다란 자극을 주거든요. UE가 중요한 기준점이 되는 거죠.
신기한 밸런스이네요. 스스로에게 없는 근육이 요구되는데 그럼으로써 균형이 맞춰진다는 점이요.
362일을 거북이로 사니까 3일 동안 여우의 가면을 쓰는 건 오히려 재밌기도 해요. 만약 UE를 일 년에 두 번 한다면 못 버틸 것 같아요. 362일 동안 에너지를 응축했다 확 분출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만 셋팅을 해두고 지속하는 식이죠.
초반에 이야기를 나눈 키워드도 그렇고 어떤 형식이라고 할까요?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절한 균형으로서 형식을 찾아간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전략과는 다르게 시간이 흐르며 만들어진 포맷이 있는 것 같아요.
네, 전략과 형식은 다르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올해 UE17을 찾는 분들께 조금 이른 인사를 건넨다면요.
관람객 분들이 입장하실 때 부직포 가방을 나눠드리거든요. 집에 돌아간 뒤 부직포 가방 안에서 나오는 물건들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 어느 쪽으로든 판단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요. 250명의 시각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장에 다녀온 뒤 손에 쥐고 돌아온 물건들이 생각보다 스스로에 관해 많은 걸 알려주거든요. 각자 다양한 값이 나올 거예요. 내가 어떤 필터링을 통해 어떻게 이번 행사를 기록했는지, 2만 명의 관람객이 오셨다면 2만 명의 값이 다 다를 겁니다. 이를 위한 행사의 여러 장치나 설정들이 있어요.
저희가 현실적인 예산 문제 때문에 부스별로 벽을 완벽하게 못 세우지만, 돈이 있더라도 벽을 안 세울 거예요. 독립 출판물을 완벽하게 디귿자에 가둬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하거든요. 벽을 세우면 독립적이라는 장점이 있겠지만 산만하게 흐트러지지 않겠죠. 행사 공간이 어지럽거나 산만하고 부산할 수 있지만, 그런 산만함 속에서 내가 끝끝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임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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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미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쉽게 눈을 떼지 못하고 저장해 둡니다. 그 사람들...어떤 얼굴 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읽고 씁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
언리미티드 에디션
언리미티드 에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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