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동화는 주인공이 꿈을 이루는 순간에 끝을 맺는다. 이러한 해피엔딩이 현실에서도 유효할까? 동화가 아닌 이상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이다. 지금 조정은의 시간은 <레 미제라블>의 판틴 앞을 지나고 있다.
무대 위 조정은은 언제나 동화 속 해피엔딩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대 밖 그녀는 오랜 꿈을 넘어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판틴으로, 배우로, 그리고 조정은으로.

메이크업·헤어 | 이창은, 진주(라메종0809) 스타일리스트 | 이지영
<font color="#9b014f">드디어 <레 미제라블>이 서울 공연을 앞두고 있네요. 장기간의 지방 공연을 끝내고 오랜만에 갖는 휴식인데,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font>
지금 배터리 충전 중이에요. 정말 잘 쉬고 있죠. 특별한 일을 하기보단,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한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책도 읽으면서 편히 지내고 있어요. 그러다가 서울 공연 오픈을 생각하면 살짝 떨리기도 하고요.
<font color="#9b014f">지난해 11월 용인을 시작으로 대구, 부산에서 <레 미제라블> 공연을 했어요. 지방 투어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힘든 점은 없었나요?</font>
개인적으로 지방 투어는 참 좋은 과정이었어요. 지역의 극장들이 다 달라요. 대구 공연장은 굉장히 크고, 부산 공연장은 규모가 작았죠. 작은 극장에서는 디테일한 것들을 잘 살리고, 큰 공연장에서는 디테일한 부분을 크게 표현하는 연습을 하며 무대에 적응해 갔어요. 특정 공간에서는 어떻게 하면 연기나 노래가 잘 전달되는지 공연을 통해 배울 수 있었죠. 배우들끼리 동고동락하면서 단단해지기도 했고요. 두 달가량의 시간을 한 극장, 한 숙소에 같이 지내면서 더욱 끈끈해졌죠. 그래서인지 용인, 대구, 부산 공연을 모두 본 분들은 작품의 결이 점점 단단해지는 느낌이라고 하더라고요. 연습실에서 하는 연습 이상의 연습을 한 것 같아요.
<font color="#9b014f">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레 미제라블’ 열풍이 불었어요. 무대에서도 이를 실감했나요? </font>
<레 미제라블>을 한다고 했을 때 뮤지컬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잘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영화가 개봉하고 나니깐 더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반응이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워낙 잘 만든 영화고 무대에서 보여줄 수 없는 디테일한 이야기를 친절히 설명해 주니깐 참 좋더라고요. 사실 공연 도중에 영화가 개봉한 것이 장단점이 있어요. 굳이 홍보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려졌지만, 한편으론 그게 부담이 되기도 했어요.
<font color="#9b014f">대구 공연 당시 배우들이 함께 영화를 관람했죠. 무대 위 판틴이 영화 속 판틴을 마주한 기분은 어땠어요?</font>
앤 해서웨이=판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게끔 역할을 잘 소화해냈어요. 배우로서 정말 아름다워 보였죠. 가끔 차에서 OST를 듣는데, 노래만으로도 이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공감돼요. 하지만 공연할 때는 일부러 안 들었어요. 드라마 구성상 무대에서 ‘I Dreamed a Dream’은 영화와 너무 다른 노래거든요.
<font color="#9b014f">무대에서 ‘I Dreamed a Dream’은 어떤 정서를 담고 있나요? </font>
영화에서는 처참한 일들을 겪은 판틴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부르는 노래잖아요. 뮤지컬에서는 판틴이 공장에서 쫓겨나자마자 이 노래를 불러요. 이제 막 절망이 시작되는 시점이기 때문에 감정을 끌어내는 게 쉽지 않죠. 기존 작품과 앞뒤 상황이 달라져서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그래서 연출의 디렉션에 최대한 집중해서 이 노래가 나올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몰입했어요. 관객들을 잘 설득해 판틴을 순진하고 순수한 여자로 느끼게끔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제 몫이에요.
<font color="#9b014f"><레 미제라블>을 처음 접했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계원예고 시절, 김달중 연출의 수업을 들으면서 <레 미제라블> 영상을 처음 봤다고요? </font>
선생님이 외국에서 <레 미제라블> 10주년 기념 DVD를 구입해 오셨어요. 당시 한국에선 구할 수 없는 영상이었죠. 콘서트였지만 연기, 노래, 모든 것이 완벽했어요. 너무 충격적이었죠. 그때 레아 살롱가를 보고 놀랐어요. 무대에 오른 유일한 동양인이었거든요. 그래서 레아 살롱가는 제가 참 좋아하는 배우에요. <레 미제라블>을 무대에서 처음 본 것 역시 고등학교 때였어요. 교복을 입고 해외 투어 공연을 보러 갔죠. 그때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결혼식 장면에서 살짝 졸았던 기억도 나네요.(웃음)
<font color="#9b014f">그 당시 끌렸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font>
에포닌이었어요. 5년 전, 에포닌으로 <레 미제라블> 오디션을 보고 떨어지기도 했어요. 그땐 제가 판틴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신기하게 이번엔 에포닌에게 마음이 안 가더라고요. 판틴의 상황이나 노래들이 귀에 들어왔죠. 그만큼 나이를 먹어서인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긴 했구나 싶어요.

<font color="#9b014f">원캐스트인 데다가 송스루 뮤지컬이다 보니 배우에게 부담감이 클 것 같아요. 실제로 무대에 올라보니 어떠세요?</font>
작품이 흠 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기 때문에 계속 무대에 올라도 질리지가 않아요. 지금도 음악이 나오면 너무 떨려요. 배우들이 하나같이 이 작품은 긴장을 풀 수가 없다고 입을 모아요. 앙상블에서부터 장 발장까지, 역할이 작든 크든 다 긴장을 해요. 성화 오빠도 “이쯤 되면 어떤 걸 더 보여줄까 생각하는 타이밍인데 그럴 수가 없다”라는 말을 했어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격려도 되고 위로도 됐죠. 또 작품이 송스루다 보니 한국말의 한계가 느껴질 때 제일 속상해요. 아무리 가사를 잘 붙인다고 해도 원어 그대로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잖아요. 항상 긴장된 상태에서 가사를 잘 공감할 수 있게 전달하려고 고민해요.
<font color="#9b014f">배우들을 긴장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요?</font>
무대에 오르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아, 이 작품이 정말 훌륭하구나!’예요. 메시지도 좋고 음악도 아름답고, 어느 하나 아쉬운 부분이 없어요. 그런데 작품이 참 좋은데 배우가 너무 아쉽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잖아요. 저는 지금 이 작품의 한 퍼즐이에요. 퍼즐이 작든 크든 내가 그 퍼즐이 들어갈 곳에 잘 맞게끔 역할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큰 거죠. 고무줄이 팽팽히 당겨져 있는 느낌이에요. 이 작품을 잘 마무리하고 나면 이젠 어려운 게 없을 것 같아요. 그만큼 무대가 저를 트레이닝 시키고 있어요.
<font color="#9b014f">공연을 하는 동안 배우 조정은이 느낀 판틴은 어떤 인물인가요?</font>
판틴은 꿈의 상징이에요. 냉정한 현실과 맞부딪혀 꿈이 점점 무너져갈 때 가장 큰 절망을 느끼는 역할이잖아요. 무대에서 판틴은 영화와 달리 압축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뭔가 거창하기보다는 정말 순수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녀 같은 순수함이 아니라 꿈에 대해서만큼은 정말 순진한 인물인 거죠.
<font color="#9b014f">결국 판틴의 꿈은 이루어진 걸까요?</font>
네. 저는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 장 발장이 그녀의 딸을 끝까지 잘 보살펴주었고, 또 마지막에 판틴이 나와서 장 발장을 데리고 가잖아요. 판틴이란 여자가 어렸을 때 꿈꾸었던 순진하고 순수한 사랑은 깨졌을지라도 또 다른 사랑, 즉 코제트에 대한 엄마로서의 사랑은 이루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그렇게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font color="#9b014f">결국 <레 미제라블> 속 인물들은 치열하게 세상의 변화를 이루어내죠. 그러한 에너지가 배우 조정은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 같아요. </font>
저도 이 작품을 끝냈을 때 제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요. <맨 오브 라만차>의 알돈자에 이어 <레 미제라블>의 판틴을 연기하면서 사실 절망을 많이 느꼈어요. 역할 때문에 느껴지는 절망도 있고, 이 역할을 맡은 배우로서 느끼는 절망도 있었어요. 그동안 마음이 좀 복잡했어요. 배우로서 한계도 많이 느꼈고, 아무도 공감할 수 없는 외로움도 많이 느꼈거든요. 그동안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웠던 탓도 있고요. 이번에 판틴 역을 맡으면서 제 안에서 바닥을 치는 순간들이 많았어요. 바닥까지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도 쳐봤고, 그냥 놓아버리고 바닥을 쳐야겠다는 마음도 먹었죠. 하지만 한편으론 지금 시점에서 이 작품을 하게 된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판틴이 배우로서의 조정은, 서른다섯 살의 한 사람으로서의 조정은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거든요. 지금은 절망들을 겪어내는 시기인 거고, 작품이 끝났을 땐 조금 더 가벼워져 있을 것 같아요. <레 미제라블>은 정말 제게 의미가 큰 작품이에요.
<font color="#9b014f">이러한 시기가 뮤지컬에 대한 생각도 변화를 시켰을 것 같은데요? </font>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뮤지컬은 ‘꿈’이었어요. 이제는 정말 내 직업으로 바뀌는 순간에 와 있는 것 같아요.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위해 달려왔어요. 목표가 확실했죠.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약 오르기도 했고요. 꿈을 좇아 여기까지 왔는데 꿈이 직업으로 바뀌면서 좀 혼란스러웠어요. 지금까지 작품이 제 인생의 90%였거든요. 그렇다고 결과물이 항상 좋았던 건 아닌데, 너무 고지식하고 순진하게 작품에 내 인생을 다 건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작품은 작품일 뿐 오해하지 말자.(웃음) 이제 그 비율을 효과적으로 줄이면서 저도 즐겁고 배역에도 충실할 수 있는 방향을 찾으려고 해요. 지금 뮤지컬이 저에게 주는 의미는 확실히 달라졌어요. 더 이상 꿈이라기보다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큰 스승 같은 존재에요. 작품을 통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제 교만함도 보고, 절망도 느끼고, 순리도 깨닫고 있어요. 이제 뮤지컬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큰 매개체인 거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5호 2013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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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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