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널기 시작하다
<빨래>의 시작은 언제인가요?
<font color="#c001cb">추민주 : </font><font color="#5c585a">2003년 12월 17일, 18일에 연극원에서 졸업 공연으로 올라갔던 작품이고 우리 세 명과 함께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이 여신동, 김태영, 이재준, 오미영, 민준호에요. 다 잘됐죠? 제 자랑을 하자면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추민주와 함께 작업을 하면 다 잘된다’(일동웃음). 아, 그때 성기웅 연출도 참여를 했어요. 기타 연주를 했죠. 다들 친구였고, 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때는 학교 작품이었으니까 전문적으로 잘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같이 작품을 만드는 분위기 자체를 저는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대신 작곡가가 좀 고생을 했죠.(웃음)</font>
<font color="#0162f4">민찬홍 :</font> <font color="#5c585a">아무래도 학교 작품인 만큼 체계적인 프로덕션의 단계를 거치면서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작품을 쓰고 연출을 하는 추민주 연출님의 상황에 따라서 준비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공연을 완벽하게 준비하기에는 굉장히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학생이었고 어렸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었어요. 대본을 먼저 쓰고 곡 작업을 하다보니까 막판에 연습을 하면서 남은 곡을 쓰게 됐는데 그때는 일주일 정도 집에 처박혀서 곡을 쓰면서도 좋았어요. 작업을 하는 느낌보다는 노는 느낌, 작업을 하는 것이 곧 노는 일이었죠.</font>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font color="#5c585a">서나영이라는 이름도 주연을 맡은 친구의 이름을 쓴 거예요. 처음부터 나영이한테 가서 ‘네가 내 졸업 작품에 출연을 해, 그리고 작품 속에 니 이름을 쓸게’ 그렇게 던지면서 시작을 한 거였죠.(웃음) 이 작품은 시작부터 그래요. 반지하방에 살 때 옥상에 빨래를 널러 갔더니 방글라데시 청년 세 명이 있었어요. 웃통을 벗고 트렁크 팬티 차림으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가씨가 나타나니까 자기들끼리 니가 인사해, 니가 인사해 하고 서로 미루다가 빨래를 턱하니 입더니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어왔어요. 이 작품이 태어나게 된 그 순간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 같아요. 그 날은 일기에 그 이야기를 길게 썼어요. 그 사람들이 나한테 했던 말들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고요. 그러다가 시간이 좀 흘러서 졸업 작품을 하게 됐을 때, 결국 작가든 연출가든 세상에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럼 내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가 했을 때, 나를 공연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마을이고 여기서 만났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서울에서 방을 찾아다니면서 대본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났어요. 그리고 수많은 빨래들을 봤죠. 가난한 학생이었으니까 가난한 동네에 살았고, 그 빨래들을 많이 본 거죠. </font>
<font color="#fe2419"></font>
<font color="#fe2419">최세연 :</font><font color="#5c585a"> 난 공연한 첫날이 기억이 나. 어떤 그림이었는지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데, 처음 대본을 받고 나서는 그냥 그 당시에는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의 옷을 준비할까 그 생각밖에 안 났어요. 그때의 나는 이들처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거 같아.</font>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이쪽이 제일 고생을 했죠. 세연이는 그때 이미 프로로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중에서 가장 전문적이었어요. 작업하는 방식도 가장 프로페셔널했기 때문에 세연이는 정말 다르다 생각을 했어요.
<font color="#fe2419">최세연 :</font><font color="#5c585a"> </font>이미 영화 쪽에서 3년 정도 일했을 때였어요. 그때 집이 구리였는데 거기까지 가서 엄마 옷, 할머니 옷을 쓸어오곤 했어요. 돈이 없다보니까 배우들에게 말도 안 되는 사이즈의 옷을 입히기도 했는데 이재준 연출이 푸대처럼 큰 바바리 코트를 입고 연기를 하는 모습은 지금 영상으로 봐도 웃겨요. 그때 우리가 학생이었지만 정말 풋풋하게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좋더라고요.
<font color="#0162f4">민찬홍 :</font> 저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그냥 무조건 재미있었던 거 같아요. 그 당시와 지금은 제가 추 연출님의 대본을 받아보는 기분이 좀 달라요.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1~2년 동안 알고 있었고 추 연출님이 처음 쓴 대본을 보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때는 마치 팬이 작품을 보듯이 그냥 다 좋아했어요. 약간 팬심이 있었던 거 같아요. 새로운 대본을 받아볼 때 작업자의 입장에서 비판의식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 저에게 어떤 의식이 형성된 후부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사실은 이 작품이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었구나 하는 것도 몇 년 후에 더 깊이 알게 됐어요.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12월 17일 공연인데 첫 곡이 11월 30일에 나왔죠. 너무 빠듯하게 부탁을 했어요. 찬홍이가 좀 늦게 작업을 시작했는데 노래 연습도 시켜야 하고 곡도 써야 하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았죠. 찬홍이의 첫 곡이 나왔을 때는 우리 모두 정말 기뻐했어요. ‘서울살이 몇 핸가요’가 첫 곡, 그다음이 ‘빨래’였어요. 그땐 정말 다같이 재밌었어요. 사진도 많이 찍었죠.
<font color="#000000">마음으로 하는 빨래</font>
첫 공연 때 러닝타임이 몇 분이었죠?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1시간 25분? 지금은 두 시간 반이에요. 노래는 리프라이즈 포함 7곡에서 18곡으로 늘었고요. 아, 또 작업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제가 처음에 ‘슬플 땐 빨래를 해’를 빼곡한 대사로 적었어요. 그런데 찬홍이가 그걸 보더니 ‘누나, 이거야 말로 노래야. 여기서 노래가 나와야 하고 노래로 이 장면을 풀어야 해’라고 말을 해줘서 그때 가사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서 넣었더니 이 작품이 딱 완성이 됐어요. 그 역할을 찬홍이가 했죠.
<font color="#fe2419">최세연 :</font> 둘이 되게 잘 맞아. ‘내 딸 둘아’도 원더스페이스에서 공연할 때 되게 금방 만들었던 곡이지?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두산에서 미팅이 있어서 갔다가 커피숍에 앉아서 썼지. 그런데 내가 짧은 시간에 금방 써서 얘한테 넘기면 노래도 금방 나와. 내가 지지부진하면 얘도 그래.
<font color="#fe2419">최세연 :</font> 그 곡을 정은 언니가 처음 불렀는데 내가 그 곡을 듣고 펑펑 울었어요. 그리고 ‘한 걸음’, ‘안녕’도 정말 금방 나왔어요. 그런 합이 정말 잘 맞아요.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처음에는 그 곡들의 가사를 지금의 두 배로 줬지. 찬홍이가 ‘누나, 사설시조 이제 그만’ 그랬어.(웃음) 그렇게 조율해 가는 과정도 재밌어요. 학교를 다닐 때부터 우리는 작품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하고 공동 작업을 하는 게 몸에 좀 배어있어요. 그리고 각자 생각해 와서 회의를 많이 했어요. ‘한국말 다 알아’는 이쯤에서 극의 분위기가 한번 밝아져야 하니까 이 곡은 춤곡이었으면 좋겠다든가, 이 타이밍은 곡이 들어가야 한다 아니다, 이런 걸 회의에서 결정하고 집에 가서 가사를 써서 찬홍이한테 넘기는 식이었어요. 중극장인 두산아트센터로 넘어가면서 ‘한 걸음’과 ‘안녕’이라는 나영과 솔롱고의 아리아가 각각 한 곡씩 나오게 됐는데, 솔롱고가 부르는 아리아가 한 곡 생기면, 나영이가 부르는 아리아도 똑같이 한 곡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끝까지 고집한 것도 작곡가였어요. 그렇게 둘의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면 그 곡이 들어가야 할 타이밍은 어딜까, 그건 제가 찾아냈어요. 술 마시면서 흥얼거리는 걸로 시작했죠. 그런 식으로 작업을 했어요.
<font color="#0162f4">민찬홍 :</font>이 작품의 특징이 있다면 세 번에 걸친 개발 과정이 있었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초연을 한 후에 두 번 정도 보완할 기회가 있었어요.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03년에 졸업 작품을 올리고, 얘는 군대를 가고, 04년에 제작을 준비해서 이듬해 처음 국립극장에서 발표를 할 때는, 작곡가가 없었어요. 그리고 06년에 다시 이 작품이 올라갈 때 다른 작곡가들이 새로 작업을 했고 그해 하반기에 얘가 제대를 했을 때 07년도에 다시 공연을 하기로 결정이 났죠. 그때 전체 공연을 민찬홍 작곡가의 곡으로 통일하기로 확정했는데 그러면서 비로소 지금의 <빨래>가 됐어요. 사실 06년에 얘가 군대에 가 있을 때 제가 굉장히 긴 편지를 보냈어요. <빨래>를 준비하는 동안 나에게는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고, 사실 좀 힘든 일이었고, 다시 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고, 나의 상태는 이러한데 나의 상태를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했죠. 이 작업을 하면서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친구이자 작곡가인 찬홍이가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했던 심경 토로 같은 거였죠.
<font color="#000000">빨래, 세상으로 나오다 </font>
학교 울타리 밖에서는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문제들이 있었을 거 같아요.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그쵸. 학교는 엄청난 울타리죠. 저는 이렇게 지하에서 살게 될 인생이라고는 상상을 못했어요. 학교에서 작업을 할 때 바깥의 현장에 대해서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었지 경험도 없었거든요. 넓은 창에서 햇살이 쏟아지는 나무 책상에 앉아, 때로는 마룻바닥에 누워서 조용하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환경에서 그게 좋은 줄도 모르고 그냥 맘껏 누리다가 바로 반지하 연습실로 쫓겨난 거죠. 일단 환경의 차이가 엄청났고요. 또 학교에서 연출이자 제작자이자 기획자인 입장에 있다가 밖으로 나왔으니 프로듀서가 필요한데, 프로듀서와의 조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 투자자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관객과 어떤 식으로 만나야 할 것인가를 대신 결정해주는 제작사가 있었다면 우리의 방향은 굉장히 달라졌겠죠.
<font color="#fe2419">최세연 :</font> 애초에 저희는 <빨래>를 가지고 프로 무대에 가야겠다는 목표로 시작한 게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초청이 되고 상을 받으면서 어어…하는 사이에 이렇게 된 거였어요. 그러다보니까 저희는 계획된 프로 의식 같은 게 없었어요. <빨래>를 사랑하는데 돈이 없으니 각자 다른 직업에서 얻은 돈으로 50만 원씩, 30만 원씩, 마지막에는 진짜 다들 지갑을 다 털어서 19만 원씩 모았죠. 처음에는 대여섯 명이었는데 생활이 힘들어지니까 중간에 나가는 친구도 있고, 또 이 작품을 사랑해서 새로 들어온 친구도 있고 그랬어요. <빨래>말고 다른 작품에서 버는 돈을 모아서 <빨래>를 무대에 올린 거죠. 그러면서 큰 기획사에서 프러포즈도 받았고, 공동 제작을 하자는 회사도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내성이 생기니까 우리끼리 부딪혀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게 06년 하반기 상명아트홀에서의 공연을 하고 나서였어요. 그때부터 우리가 자립을 한 거죠.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세연이는 의상 하느라고 자기 돈을 얼마나 많이 끌어다 썼는지 몰라요. 07년쯤 됐을 때는 우리도 현장에 대한 감이 생기고 내성도 좀 생기고 또 어떤 길을 가야겠다, 이 판 안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자리매김을 해야겠다는 의식이 생겼어요.
<font color="#fe2419">최세연 :</font> 주변에서 <빨래>에 대한 좋은 입소문도 났지만 우리는 작품에 대한 이유 모를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어요. 어디서 난 자신감인지 관객 점유율은 2퍼센트, 3퍼센트인데 계속 판을 키웠어요. 우리가 미친 거죠.(일동 웃음) 그러면서 원더스페이스를 거쳐 두산아트센터에 올리면서 점점 더 이 작품이 확실해진거죠.
각본상을 받은 건 언제였죠?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2005년 초연 때요. 그것도 되게 재밌어요. 그때 최지원이 대표로 있을 때였는데 ‘우리 여기 내려고 하는데 괜찮겠어?’라고 묻길래 ‘왜에?’라고 했어요.(웃음) ‘뭐 재밌잖아, 한 번 내보자’ 하고 또 잊었어요. 그때 연습 기간 내내 반주를 정말 열심히 해줬던 친구한테 ‘내가 상을 받게 되면 네 이름을 꼭 이야기해줄게’라고 했어요. 빛을 보는 게 없는 자리에서 묵묵히 제일 열심히 해주는 그 친구가 정말 고마웠거든요. 그런데 진짜 노미네이트가 돼서 수박 식구들은 맨 뒷좌석에 앉아 있었어요. 수상자가 ‘명랑시어터 수박 <빠…>’라고 한 순간 그 친구들이 초고음으로 소리를 꽥 질렀죠.(웃음)
수상 소감이 화제였어요.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석관동 주민들에게 감사하고 강아지에게 고맙다고 했는데 강아지가 그 반주해주던 친구의 닉네임이었어요. 그런데 그 수상 소감 때문에 제가 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생겼죠. 지금도 저희 어머니께서 부모에게는 감사 안 하고 강아지한테 감사했다고 아주 그냥… (웃음) 참 감사한 일이었죠. 그 상을 받으면서 제가 이 업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느낌을 받았고, 또 많은 분들을 알게 됐죠. 좋은 계기였어요.
배우 캐스팅의 기준은 어떻게 되죠?
<font color="#fe2419">최세연 :</font> 민주 언니는 얼굴 보고 뽑고요, 찬홍이는 작곡가니까 노래 보고 뽑죠.(웃음) 찬홍이는 실컷 캐스팅해 놓으면 전화해서 딴소리하다가 ‘누나,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누나, 이 배우 공연 한번 봐봐요’ 이래요.
<font color="#0162f4">민찬홍 :</font> 아, 몇 번 안 그랬어요. 저는 요즘에는 예스맨이에요.
일동 : 거짓말! 배우들이 그렇게 키 좀 낮춰달라고 해도 거절하면서.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너는 누가 어떤 곡을 불렀을 때 제일 기뻤어? 궁금하네.
<font color="#0162f4">민찬홍 :</font> 좋았던 기억이 몇 번 있죠. 내 머릿속에 있는 음악이 배우를 통해서 노래로 불린 순간은 머리로 음악을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죠. 그 감동 때문에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요. 5차 두산아트센터 공연 캐스트로 녹음을 했는데, ‘참 예뻐요’가 대표곡이라면 대표곡이잖아요. 홍광호 배우가 그 곡을 녹음하는데, 제 기억에 거의 한 번에 갔던 거 같아요. 아주 작은 디테일은 조금 손봤지만 거의 처음 불렀던 대로 오케이가 되어서 그 녹음이 남아있죠. 그때 참 좋았어요. 물론 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도 그랬지만 녹음을 하면서 들어보니까 반복해서 수정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한 번 딱 부른 것만으로도 이 노래를 가장 잘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고마웠고 기억에 많이 남아요.
<font color="#000000">일본으로 간 빨래</font>
학전에서 장기 공연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지하철 1호선>을 했던 배우들이 2008년에 대거 <빨래> 팀으로 들어왔고, 제작감독이었고 지금은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김희원 선배가 학전 출신이에요. 두산아트센터 이후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을 했을 때 애초에 관객과 가깝게 만나야 하는 작품이라는 판단을 했어요. 마침 <지하철 1호선>이 막을 내려 학전그린이 비어있다는 말을 들었고, 그렇다면 <지하철 1호선>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 그 기운을 받아서 그곳에서 공연을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 싶었어요. 김민기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선생님께서 어떤 말씀을 해주시던가요?
<font color="#c001cb">추민주 :</font> 소극장에서 창작뮤지컬을 계속한다는 것은 벌거벗은 기분으로 하는 작업이라고. 어떤 허위의식이나 어떤 부채 없이 만들어야 한다고, 그 작업에는 그런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죠.
일본 공연 당시 문화적이 차이 때문에 어렵지 않으셨어요?
<font color="#c001cb">추민주 : </font>처음에는… 막막했죠. 이분들과… 어떻게 이것을… 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스타일에 차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같은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같은 노래를 부른단 말이죠. 이미 그 곡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있고 일본 배우들이 그걸 알고 있었어요.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있었지만 이 작품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첫 리딩이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그 다음에 숙제가 있었죠. 굉장히 절제하고 예의 바른 이 감정들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 것인가. 공연 후에 제가 노트를 할 때 배우들이 둥글게 모여서 무릎을 꿇고 제가 할 말을 기다려요. 그래서 제가 의자에 앉아있지 않았어요. 저도 바닥으로 내려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죠. 인사를 할 때도, 표현을 할 때도 스킨십을 많이 했어요. 작품에서 나영이가 울 때 주위에서 쓰다듬어주고 위로해주는 걸 일본 배우들은 이해를 못했어요. 사람이 울고 있으면 혼자 있게 해줘야지 왜 우는 사람에게… 이런 거죠. 그런데 우리 감성으로는 우는 사람을 내버려두는 문화가 아니잖아요. 아,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단순히 한국의 뮤지컬을 일본에서 올리는 게 아니라 진짜 문화를 교류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경험이었어요.
시대의 변화를 작품에 반영하실 생각이에요?
<font color="#fe2419">최세연 :</font> 사람들이 <빨래>가 어느 시대 배경인지 알쏭달쏭해 하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이 작품은 현재의 서울살이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맞춰가야 하는 게 있어요. 예를 들면 월세나 보증금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죠
<font color="#c001cb">추민주 : </font>아, 재밌는 게 있어요. 우리나라 최저임금이 2003년에 54만 원이었어요. 지금은 95만 원이거든요. 최저임금의 변화는 계속 가사에 반영을 해왔어요. 그건 재밌는 변화인 듯해요.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0호 2012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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