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영 “가장 차별적인 존재들이 동등한 관계를 맺을 때"
장애가 있는 몸들이 공연예술 역사에서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했을 것 같았거든요. 역사와 내가 지금 하는 작업들 혹은 내 몸의 경험 사이의 연결점을 찾고 싶었던 거예요.
글ㆍ사진 신연선
2024.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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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은 ‘실격당한 자’를 위해 변론을 한 김원영 작가가 내놓은 ‘몸을 위한 변론’이다. 그는 이 변론을 통해 공연이라는 “장애인의 몸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영역”에서 실은 얼마나 많은 장애인이 활동해왔는지를 따지며 “이들이 남긴 흔적이 지금 우리가 보는 수많은 세계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무용사에 감춰져 있던 장애인 무용수들을 소개하고, ‘다른 몸’의 힘을 직시하고, 나아가 그 자신이 무대에 오르면서 사유의 폭을 넓힌 그는 마침내 지극히 차별적인 존재들이 각자의 차별적 고유함을 가지고 온전하게 평등해지는 순간을 상상한다. 


“어느 무용수가 독특하고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냈다면 거기에는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몸들이 여러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예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장애가 우리 역사와 삶, 현실, 현재에 깊이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경험이며 거창하는 실존의 형식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계보가 있을까?


“약 4년 동안 이 책의 한 챕터를 쓰고 공연을 하고, 한 챕터를 쓰고 또 공연을 했다.”(347쪽)고 하셨어요. 꽤 긴 시간이잖아요. 책을 쓰던 시간은 또한 무용수가 ‘되어가기’도 했던 시간인 셈인데요. 춤 속에 든 폭발적인 에너지를 탐구하고, 그것을 글로 써내는 과정이 어떠셨어요? 

장애와 공연의 관계성에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그 중에서 특히 무용적인 공연에 관심을 두고 책을 구성하려고 했죠. 이 책은 그냥 무용사를 다룬 것이 아니고, 실제 공연 현장에서의 경험이나 동시대적인 문제의식들을 담는 게 중요했는데요. 원래 그렇지만 잘 모를 때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잖아요.(웃음) 쓰다 보니 모르는 게 너무 많았어요.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해온 분들이 많으신데 잘 모르면서 얘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최대한 자료도 많이 봐야 했죠. 또 실제 경험도 더 해봐야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이 계속 있었어요. 그래서 원고 진척이 잘 안 됐어요. 


그러는 중에 공연을 계속 했는데요. 거기서 얻은 것으로 다시 책의 구성을 바꾸기도 했거든요.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발생한 거예요. 사실은 지금도 책을 내도 되나 싶은 마음이 있어요. 무엇보다 내가 춤을 이렇게 춰봤네, 말하기에는 경험이 너무 적으니까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관심사가 “‘일시적인 배열’을 만든 것들의 역사였다”(243쪽)고 적기도 하셨는데요.

 이때 ‘일시적인 배열’이라는 건 춤에 대한 비유이기도 한데요. ‘역사 속에 나의 경험 혹은 장애인들의 경험과 연결된 것이 있을까? 계보가 있을까?’ 이런 궁금함이 있었죠. 여성주의에서도 여성 서사의 계보를 찾잖아요. 여성 작가들이 문학사에서 찾기도 하고요. 그런 차원에서 비슷한 희망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동시대 영역에서는 얘기가 되고 있지만요. 과거에는 누군가가 없었을까, 궁금했어요. 장애가 있는 몸들이 공연예술 역사에서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했을 것 같았거든요. 역사와 내가 지금 하는 작업들 혹은 내 몸의 경험 사이의 연결점을 찾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을 통해 역사에 기록된 탁월한 무용수를 소환하고, 그에게 있던 장애인 가족의 경험 등을 읽어낸 부분이 중요하게 보였어요. 

사실 ‘이사도라 덩컨’의 언니가 다리를 절었다는 것을 몰랐다가 책을 준비하는 동안 자료를 보고 알았어요. 이미 한국에 번역이 되어서 나온 책들에 담긴 내용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주목을 잘 하지 않죠. 물론 그의 언니가 덩컨에게 어떻게 직접적인 영향을 줬는지에 관해서는 제 역량을 넘어서는 영역이지만요.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덩컨은 안무적 질서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표출, 자기진정성과 같은 모더니즘 춤의 시대를 열었거든요. 그런데 왜 그는 언니의 춤에 대해 자서전에서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을까, 이런 궁금증이 들고요. 그러니까 자신의 언니는 덩컨이 생각하기에 같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무용수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겠죠. 그런 것들이 흥미로웠어요. 



괄호를 벗겨내고


몸을 움츠려온 긴 시간을 깊이 후회한다는 내용도 있었는데요. 무용수가 되는 과정, 그러니까 휠체어에서 내려와 내 몸의 힘과 움직임을 느끼는 전복적인 시간을 거치면서 작가님께도 굉장히 많은 것들이 변화했을 것 같아요. 

변했어요. 책에서 거듭 강조했듯 드라마틱한 도약은 아니고, 그저 점진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같지만요. 사소하게는 일상 생활에서도 변화가 있어요. 예컨대 지금은 힘들면 그냥 바닥에 매트를 깔고 눕거든요. 법대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안 그랬어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오후 2-3시쯤이 되면 너무 허리가 아팠어요. 한 번 누워서 허리를 펴주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저는 중간중간 서거나 하지 않으니까 피로가 척추에 누적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스트레칭도 하고, 잠깐 누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절대 못 한 거죠. 나중에 장애인 학생 휴게실이 생겼지만 다른 층에 있어서 가기 쉽지 않기도 하고, 가서 한번 누우면 한 시간씩 지나가니까 잘 안 갔어요. 그러다 허리가 아파서 보면 다른 친구들은 꿋꿋하게 같은 포즈로 계속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땐 복잡한 생각이 들었죠. 지금은 그러지 않거든요. 힘들면 그냥 눕기도 하고, 중간중간 스트레칭도 해요. 


그 외에도 매사에 정신적인 무엇으로 해내겠다는 생각보다는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 너무 힘들진 않은지를 의식하게 됐어요. 그것들이 제 삶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됐죠. 직업적인 측면에서도 전에는 스스로 반신반의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지금은 한계를 별로 두지 않아요. 재미있어 보이고, 필요하다면 그런 움직임을 선택하고 그런 곳에 가요. 많이 달라졌어요.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몸’이라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몸에 비하면 정신적인 측면, 지적인 능력을 그동안 많이 얘기해 왔다는 느낌도 받았고요. 몸의 가능성, 움직임의 에너지가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더라고요. 

저는 스스로도 그렇지만 장애가 있는 동료나 친구들의 몸을 더 주목하게 돼요. 과거에는 그러한 몸에도 ‘불구하고’ 평등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 몸이라는 것을 괄호 안에 넣는 연습을 했던 것 같거든요. 반면 지금은 그 움직임 자체, 그 사람의 몸 자체의 힘이나 가능성을 더 유심히 보게 돼요. 다시 말해 괄호를 연 거예요. 괄호를 쳐야만 관계의 평등성을 전제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괄호를 벗겨내고 그것을 전면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어요. 


몸에 대한 얘기라면, 작가님이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대학원에 지원했던 경험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때 나는 내 몸을 보호하고 감추고 보살피는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는 데 거의 성공한 것 같았다”(33쪽)고 하셨거든요. 

시험을 보기 전까지는 부끄럽고, 대기실에 있는 다른 지원자들 사이에서 너무 큰 위화감을 느꼈어요. 두 가지 생각이 있었는데요. 하나는 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 였죠. 내가 너무 기이한, 호기심의 대상이거나 어처구니 없는 사람으로 보이면 어떡하지, 라는 외부적인 시선이 있었고요.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시선이었어요. 힘들지만 이것을 잘 해내면 글로 쓸 수 있겠다, 이야기가 된다, 하고 이 상황을 대상화, 소재화 하는 시선 말이에요.  

그런데 막상 오디션이 다가오니까 이런 시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더라고요. 춤추는 몸이 된 거예요. 그렇게 시험장에 들어가 교수님들 앞에서 뭔가를 하는데 그 순간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걱정을 잊고 몰입하게 되더라고요. 온전하게 그 시공간에 있었다는 감각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었어요. 참 기분 좋은 경험이었죠. 그렇지만 그 다음 내용이 중요해요. 거의 성공한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대학원은 떨어졌다는 것. 그러니까 나를 잊는 것과 ‘좋은 춤’을 추는 것은 똑같지 않다는 것이고요. 온전한 몰입이 전부가 아니라 잘 해야 하고, 잘하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되는데요. 저는 부족했기 때문에 떨어진 거죠. 


2013년 공연된 ‘극단 애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를 연기한 백우람 배우의 깊고 풍부한 얼굴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경험한 것은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몸의 특별한 모습’이 아니라, 블라디미르가 된 배우 백우람의 몸이었다”(210쪽)고 하신 내용이 떠오르네요. 

물론 가끔씩 아주 놀라운 순간들이 발생해요. 전혀 그림을 그린 적 없고, 춤도 춘 적 없는 사람이 어떤 예술 활동을 할 때 너무나 놀랍게 빛나는 순간을 볼 때가 있거든요. 그렇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에게만 경이롭지 주변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아요. 글쓰기도 마찬가지잖아요. 정말 몰입해서 써도 독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도취적 몰입감 만으로 나보다 더 큰 세계에 접속하기는 어려운 것 같고요. 물론 저의 한예종에서의 경험은 합리적인 입시 제도 등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요. 기본적으로 제가 그때 배운 것은 몰입이 주는 가치에 더해, 몰입만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당연한 진실이었어요. 


관련해서, ‘잘 추는 춤’과 ‘좋은 춤’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잘 추기 위해 애쓴 사람이 좋은 춤을 출 가능성이 열린 세계를 상상한 부분도 있어요. 

그 내용은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의 윤리학에서 생각을 약간 변형한 것인데요. 잘 사는 삶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책임 있게, 최선으로 만들기 살아가는 것이겠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잘하는 여러 방식을 통해서 잘 사는 삶을 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잘 사는 삶이 좋은 삶은 아닐 수도 있거든요. 무엇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은 그 시대의 평가 기준이나 다양한 비평의 차원에 달려 있는 문제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삶이나 좋은 춤은 되게 선물 같은 거예요. 어떤 작가가 아주 위대한 문학 작품을 남겼다고 해봐요. 그런데 그 작품을 쓴 300년 전에는 그걸 전혀 좋은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 시대였다고요. 이때 그 작가는 잘 썼지만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마침 시대를 타고 나서 자기가 한 것을 좋은 것이라고 인정받는 사회에 산다면 그건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바라는 세상은 루게릭병이 상당히 진행되어 안구마우스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도 실제로 ‘좋은 춤’을 출 가능성(다시 말해 좋은 춤이라는 선물을 받을 기회)이 열린 세계다. 일단 그 사람이 ‘잘’ 추기 위해 애써야 함은 물론이다.(중략) 이런 무용수가 있다면 이제 그 무용수가 얼마나 좋은 춤을 출 수 있는지 여부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가 속한 공동체에 달렸다. 그 공동체는 춤을 위한 접근성을 얼마나 다채롭게 상상할 수 있는가? 접근성에 관해 숙련된 기술을 연마한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좋은 춤’에 대한 편협한 기준을 성찰하고, 중증장애가 있는 사람도 자신을 표현하고 기존에 존재하는 예술에 대한 담론/전통/역사에 자기 경험과 한계를 적절히 통합하는 훈련 기회를 어느 만큼 얻을 수 있는가?”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 339쪽)



복잡한 맥락에서 생각하기


책을 일종의 ‘말 걸기’라고 한다면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은 온전한 평등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 책을 쓰면서 독자에게 기대한 것이 있겠죠?

그저 서로가 비슷해지는 것, 혹은 비슷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성립하는 평등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얄팍한 평등일 거예요. 오히려 개개인의 삶을 한계 안에 가두는 평등이겠죠. 커트 보니것의 「해리슨 버저론」이라는 단편소설에 평등주의가 실현된 사회가 나오는데요. 거기서는 발레 무용수의 발에 무게추를 채워요. 너무 잘하는 사람이 생기면 평등이 깨지니까요. 온전히 평등한 관계란 다른 존재와 차별화되는 사람들이 각자 차별화되는 그 모습으로 누군가와 평등한 상태에 돌입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 온전한 평등이죠. 역설적이지만 가장 차별적인 존재들이 동등한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이상적인 평등, 온전한 평등이 가능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평등이라는 말을 좀 더 복잡한 맥락에서 생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차별도 마찬가지예요.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불합리한 차별은 당연히 문제가 있는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차별이란 말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타인보다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럼으로써 고유한 내가 되거든요. 여기서 잘한다는 건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어요. 남보다 더 웃길 수도 있고, 요리를 잘할 수도, 어떤 움직임을 잘 할 수도 있죠. 그 부분에서 각자가 차별화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성이 생기고요. 따라서 차별이라는 말도 우리의 열망이나 존재 방식에 더 깊이 관련되는 맥락에서 생각해 보기 바랐어요. 


접근성을 위한 실천을 다룬 부분이 있잖아요. 접근성을 의식하는 구성원이 많아진 세상을 상상하니까 일종의 해방감까지 느끼게 되더라고요. 

제가 기본적으로 생각한 접근성은 어떤 사람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의식하는 것이에요. 사실 누구나 모든 타자를 의식할 수는 없어요. 다 한계가 있죠. 예컨대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은 발달장애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책이거든요. 저에게도 발달장애인 지인이 몇 명 있지만요. 만약 그보다 가까운, 아주 친한 관계에 발달장애인이 있었다면 저는 지금보다 더 신경 썼을 거예요. 다른 버전을 낸다든가 책 해설 영상을 만들어보는 등의 고민을 더 했을 것 같은데요. 거기까지 못 간 거예요. 그냥 여기서 얘기하는 취지를 나중에 공연이나 강의 같은 것을 통해 얘기할 수 있겠지, 정도의 생각뿐인 것이죠.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접근성을 생각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적어도 ‘어떤 것에 배제되고 있는 타자가 있을 수 있다고 의식하는 것’ 자체가 작동하는 이상 사회가 하나의 목표나 의도를 위해서 타자를 배제한 채 달려가는 것을 막아준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실제로 작가님이 그러한 ‘온전한 평등’의 가능성을 엿본 경험이 많았던 거죠?

최근 몇 년간, 제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공연계의 변화를 보며 많이 느꼈어요. 연극하는 현장에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서 작업하는 걸 많이 보거든요. 거기엔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있는데요. 이 사람들이 작업을 오래 해오면서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거예요. 어색한 배려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몸에 익은 태도를 볼 수 있어요. 회의나 연습을 하는 방식이든 술자리를 찾아갈 때든 상관없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상황이 진행되고요. 


중학교 때 제가 같이 생활했던 장애인 친구들 중에 탈시설을 해서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근데 많은 경우는 집에 있어요. 그러니까 사회생활이 없어요. 특히 언어장애가 있다면 관계 맺기가 불리하죠. 복지관 프로그램 이수하고 끝나면 집에 오는 게 전부거든요. 반면 지금 연극 현장이나 ‘노들야학’ 같은 장애 운동 현장을 보면 정말 달라요.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깊이 참여하잖아요. 그들도 서로 싸우긴 하겠지만 어쨌든 나름의 동등한 관계성을 만들어내거든요. 그래서 책에 등장한 친구 ‘김태훈(가명)’을 떠올리면서 ‘그 형이 연극을 좋아했다면, 그래서 연극하는 커뮤니티에 그 형이 참여했다면, 그러면 그 형도 자신의 장애와 상관없이 여기 내가 만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깊이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같은 생각을 하게 돼요. 


아무래도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가 ‘관계’ 그리고 ‘연결’이었거든요. 각자에게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닫힌 세계’가 서로에게 ‘깃드는’ 관계를 통해서 연결된다면 열린 세계가 가능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낙관도 하게 됐고요.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특히 물리적인, 신체로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예요. 지금은 옛날과 비교했을 때 장애인 유튜버도 많고, 방송에도 많이 등장하죠. 예전에 저는 완전히 고립돼 있었지만, 지금은 장애인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잖아요. 또 전에 비하면 사람들 사이에 평등에 대한 감각도 훨씬 높아졌고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고등학교 때 친구와 맺었던 관계처럼 진짜 몸을 가지고 뭔가를 해볼 기회는 줄어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예전에 복지관 같은 곳에 대학생들이 봉사활동을 가면 장애인 활동 보조를 해야 했어요. 활동 보조 제도가 없었으니까요. 당연히 힘들고, 그걸 그 사람들에게 다 맡기는 것이 결코 좋은 방식은 아닌데요. 그런 식으로 활동 지원을 하면 화장실도 같이 가고 그러면서 그 몸을 배우게 돼요. 휠체어 밀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등의 지식이 몸에 쌓이겠죠. 온라인상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얘기하는 건 상대적으로 쉽지만 직접 계단 앞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과 함께 이동하는 몸의 관계성으로 가는 건 어려운 경험이잖아요. 당연히 활동 지원사가 있어야 해요. 강조하지만 그 제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요. 다만 진짜 신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적은 사회가 아닌가 생각하는 거예요. 


추상적인 연결보다 물리적인 연결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왜냐하면 장애는 특히 매우 신체적인 문제이니까요. 물리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 배우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은 그런 게 많이 없는 것 같거든요. 어떻게 보면 그런 관계 맺음이 약간 외주화 된 거예요. 제가 워크숍을 하면 되게 뿌듯한 한편으로 이런 판을 벌리지 않으면 지금 같은 만남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이 경험이 당연히 너무 소중하지만 아쉽기도 해요. 이미지나 담론적으로는 과거보다 훨씬 풍성한 환경이지만 접촉의 측면은 더 미비하니까요. 그러나 이 접촉의 힘은 아주 강해요. 



2020년대 관객에 대한 신뢰


‘병신춤’ ‘프릭쇼’를 이야기할 때도 역시 연결감이 중요할 것 같아요. 책에 병신춤에 관한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하셨잖아요. 현재의 생각은 어디까지 왔나요? 

일단 공연을 직접 보지 않아서 그래요. 보지 않고 비판하는 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소재가 뭐든 일단 공연이라는 건 실제로 어떻게 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공연도 실제 공연에서 어떻게 구현하는지가 핵심 같아요. 때문에 ‘병신춤’ 전수자들의 춤을 직접 보지 않은 이상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괜찮은 건 아니고요. 마음이 복잡해요. 


특히 관련 논쟁을 보면 민중의 해방 같은 민중주의적 해석을 하면서 긍정하는 목소리가 있는데요. 그 민중에 장애인이 있는지, 거기에 함께 춤을 춘 병든 몸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깊이 있게 1차 문헌까지 연구한 건 아니지만 제가 본 문헌에는 그런 기록은 없었거든요. 다만 그런 춤은 절대로 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같은 춤이라도 어떻게 추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니까요. 단정해서 얘기할 수 없어요. 


크로아티아의 리예카에서 <무용수-되기> 공연을 한 뒤 휠체어를 탄 관객들과 감상을 나누며 느낀 ‘접속’의 순간은 완전히 달랐죠. 

그때는 너무 신났어요. 관객으로 오신 분들이 무용 워크숍도 하는 분들이니까 더 관심이 많았을 텐데요. 제게 정말 많은 걸 물어봤어요. 안무를 어떻게 했는지, 연습은 어떻게 했는지, 한국의 상황은 어떤지 엄청 궁금해하시더라고요. 또 그 공연에 바닥 장면이 있는데요. 제가 막 너스레를 떨었죠. “바닥은 우리가 전문가다” 하고요. 그 말을 듣고 너무 좋아하셨어요.(웃음) 그런 대화를 통해 저는 또 상상할 수 있거든요. 이 사람들이 어떤 시점에는 바닥 생활을 했겠다, 몸을 끌고 다녔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다가 누군가는 뭐라고 하기도 했겠다, 하고요. 동시에 이 사람들이 바닥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구체적으로 상상이 되기도 하면서 그 순간 대단한 친밀감, 깊은 무엇인가가 공명하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아요. 


크로아티아, 리예카에서


사진: 옥상훈 작가 / KIADA 2023


장애가 있는 몸의 춤을 말할 때 ‘자기 신뢰’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할 것 같아요. 여기서 작가님은 그 신체’를 가지고’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거두고 그 신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에 시선을 두고자 하는 무용가 ‘김만리’의 목소리를 가져오셨죠. 작가님도 춤을 출 때 이 부분을 고민하세요? 

그러려고는 하죠. 하지만 저는 자기를 관찰하는 시선이 심해요. 그 시선에는 내면화된 타인의 시선도 많을 텐데요. 그게 좀 없어져야 하니까 자기 신뢰가 완전하진 않을 거예요. 내 신체가 무엇을 한 건 맞고, 나는 그 순간 온전히 신체로 존재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 혼자만 좋았던 건 아닐까, 사람들은 장애인이 열심히 하니까 그저 박수 치는 데 불과한 게 아닐까, 이런 의심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죠. 물론 예전에 비해서는 그 의심이 많이 줄었고요. 2020년대 관객에 대한 신뢰가 있어요. 


관객에 대한 신뢰라는 말이 좋네요. 

이 신뢰는 관객이 그것을 춤이나 공연이라는 평가의 차원 안에서 볼 것이라는 믿음인데요. 과거에는 관객들이 도덕적, 시혜적 차원이나 혐오의 차원으로 분명히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면 최근에 이런저런 작업을 하고 동료와 관객을 만나면서 달라졌어요. 2020년대에 관객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됐죠. 각자의 취향에 따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이것을 춤이라는 예술의 맥락, 비평적 맥락 안에 머물면서 얘기할 것이라 생각해요. 


* 필자|김원영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탄다.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일했으며,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에서 연극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한편에는 장애, 질병, 가난을 이유로 소외받는 동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좋은 직업, 학벌, 매력적인 외모로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동료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 진동하듯 살면서, 또 사회학과 법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장애인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고민을 여러 매체에 글로 썼다. 지은 책으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인문의학』(공저) 『희망 대신 욕망』 『사이보그가 되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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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