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장윤주의 남편이자 딸 리사의 아빠, 그리고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 TRVR의 대표인 디자이너 정승민. 그의 ‘사적인’ 여행기가 공개됐다. 지난 여름, 리사와 단 둘이 남부 이탈리아를 여행한 이야기가 책으로 묶인 것.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에는 풀리아 지역의 눈부신 자연 안에서 부녀가 함께 보낸 찬란한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사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각자의 여행을 꿈꾸고 그리워하게 만든다.
풀리아로 떠난 이유
“이 책을 리사에게 가장 먼저 선물하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책을 받은 리사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무래도 아직 어려서 그런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받아서 책꽂이에 꽂아놨어요. 그런데 집에 손님이 오거나 친구들이 놀러 오면 자랑하고 그러더라고요.
아빠가 책을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매번 리사가 잠들고 난 다음에 써서, 거의 마지막에 알았어요.
여행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 있으셨어요?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자주 해요. 사진은 매번 남기고, 그때의 감상들을 한 문단 정도로 써두기도 해요. 그런데 책으로 남기겠다는 계획은 안 했어요. 사진을 모아서 앨범 정도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편집자 님이 책으로 나오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을 해주셨어요. 그런데 사실 두려움이 있었죠. 책을 남긴다는 건 흔적을 남기는 거잖아요. 저는 디자인 전공이다 보니까, 뭔가 흔적을 남기면 시간이 지나고 다시 봤을 때 되게 낯 뜨거운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라는 사람이 조금 더 숙성되고 난 다음에 글을 쓰자는 마음이 있었는데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때’는 오지 않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가서 부끄러워하더라도 지금 나의 생각을 온전히 남기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곱 살의 어린 자녀와 아빠가 단 둘이, 그것도 해외를 일주일씩 여행하는 일이 흔치 않은데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뭐랄까요,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아빠하고 가깝게 지내는 시기도 있는 반면에 사춘기가 오고 서로의 영역이 나눠지는 시기도 있는데, 그때가 오면 못하는 걸 지금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지금은 너무 어리지도 않아서 같이 식사를 나눌 수도 있고, 같은 곳을 보고 좋아할 수도 있고, 그렇게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게 많아진 상태라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리사도 본인의 취향이 있지만, 새로운 것들을 잘 받아들이는 시기잖아요. 그래서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릴 때 생기는 습관들을 나중에도 쌓아나가는 거잖아요. 관계도 마찬가지 같아요. 가깝게 지내지 않다가 열다섯 살, 스무 살 돼서 아빠랑 같이 여행 가자고 하면 누가 가겠어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같이 공유하다 보면, 그게 시작이 돼서 그 다음이 있는 거고, 그러면서 둘 사이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생각해요.
처음부터 ‘둘만의 여행’을 생각하신 건 아니었죠?
네. 리사의 방학은 정해져 있는데 마침 그때 아내가 일정이 있어서 같이 못 가게 됐어요. 그래도 둘이서 재밌게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리사도 취향이 있지만 아직까지 확고한 건 아니니까, 한번 아빠의 성향대로 여행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가족 여행을 갈 때는 아내도 저와 비슷한 시간을 살아왔고 본인의 취향이 있으니까 둘 사이의 교집합으로 가게 되는데, 이번 여행은 리사를 배려하고 또 안전하면서도 아빠가 생각할 때 리사에게 좋은 것들을 보여주고 같이 즐길 수 있는 걸 찾아보자고 생각했어요.
여행을 앞두고 장윤주 님이 걱정하신 바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걱정을 했죠. 멀리 가기도 하고, 흔치 않은 여행지니까요. 이탈리아 여행이라고 하면 대개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 같은 곳들을 가잖아요. 남부 이탈리아라고 해도 아말피, 포지타노 이런 곳에 가는데 ‘풀리아’는 아내도 저도 처음 들어봤어요. 그래서 아내는 걱정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반대로 저는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더 설렜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갔던 곳에 또 가는 여행도 좋아하지만 새로운 곳에 가서 탐험하는 것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래도 더 알아봤죠. 우리가 안전하게 여행을 잘 할 수 있는 곳인지. 사전 정보를 찾아보고 나서 확신을 가진 상태에서 갔어요.
풀리아를 목적지로 삼으신 건, 친구 분의 추천 때문이었나요?
파리에 사는 친구가 있어요. 남부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추천을 해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풀리아를 이야기하더라고요. 찾아봤더니 굉장히 생경한 곳이었어요. 스트리트 뷰를 보면서 위에서 아래로 쭉 내려오는데 되게 매력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포지타노 같은 경우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풀리아는 그런 이미지 자체가 없으니까 모든 것들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더라고요. 바다들이 너무나 훌륭했고요. 지형적인 특성으로 해변들이 절벽과 절벽 사이에 아지트처럼 숨어 있었어요. 영화 <문라이즈 킹덤>을 보면 두 아이가 아지트처럼 갔던 해변이 있잖아요. 그런 해변들이 곳곳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끌렸어요. 액티비티를 알아봤을 때도, 포지타노 같은 곳은 주로 요트를 타고 선상 여행을 하는 것이라면, 풀리아는 소박하게 여행하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관광지라기보다는 로컬 사람들이 많은 곳이고. 그런 면에서 희소한 곳이기도 했고요. 치안도 좋았어요. 처음에 검색을 하는데, 제 또래의 아들과 딸을 둔 부모가 운영하는 블로그가 있더라고요. 거기서 보고 정말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행하면서도 잘 왔다는 생각을 했어요.
씨앗을 심어두지 않았을까
여행의 컨셉이라고 할까요. 떠나기 전에 그리셨던 여행의 모습은 어땠나요?
몇 가지 요소들이 있었죠. 아이가 좋아할 만한 물놀이 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물놀이만 할 거면 동네 수영장에 가는 게 나으니까, 아름다운 자연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더불어서 물놀이를 하지 않을 때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고요. 문화 안에는 보고 느끼는 것도 있지만 먹는 식문화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다 생각했을 때 충족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했었어요.
여행이란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잖아요? 두 분의 여행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웃음)
제가 큰 계획을 잡고 여행을 가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엑셀 시트에 시간 별로 계획을 다 적어놨어요. 처음에는 잘 지켜지는 듯 했죠. 그런데 우리가 가보지 못한 장소를 계획한다는 게 되게 어렵더라고요. 변수도 늘 있고. 그런데 여행할 때 ‘나는 이것만 해야 돼’라고 하면 볼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나는 에펠탑만 봐야 돼’라고 하면 에펠탑만 보고 오겠죠. 하지만 에펠탑에 가는 길에도 다양한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것 외에도 아주 많은 것들을 얻어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여행의 특성은, 적어도 제가 경험한 바로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교훈이 다가온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새로운 이벤트들이 생겨나고, 기억에 깊게 남는 거죠.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를 발견한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어요. 계획이 틀어져서 목적지 없이 길을 나섰는데, 훌륭한 장소에 도착했죠.
그렇죠. 아틀란티스라는 게 어떤 장소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표현이었던 것 같아요.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힘든 순간에 찾아낸 존재였어요. 우리 둘에게는. 누구와 함께였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었던 것 같아요.
이 여행은 리사에게 무엇을 남길까요?
리사가 이런 교훈을 얻었을 거야, 라는 생각은 특별히 없어요. 다만, 이 친구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씨앗을 심어두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나중에 필 수 있는 씨앗들. 이 친구가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지만, 수많은 씨앗들 중에 한두 개가 생기지 않았을까. 이 여행을 통해서 이 친구가 잘 변했다는 생각보다, 나중에 크게 바뀌게 될 것들에 아주 작은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는 나비 효과를 굉장히 믿는 편이에요.
리사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든, 어떤 걸 느끼든, 크게 연연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일방적으로 계획을 관철시키지도 않으시고요.
전 세계 인구가 70억 명 정도 되잖아요. 그 중에서 저는 한 가지 길을 살아본 건데, 그것으로 또 다른 사람한테 ‘너는 이 길로 살아야 돼’라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는 것 같아요. 제 경험도 굉장히 한정적이고, 그 경험을 강요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에 열려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어느 정도 울타리는 있어야겠죠. 그 울타리의 역할은 외부로부터 무언가가 들어왔을 때 보호하는 것이지, 이 친구를 옭아매기 위해서 감싸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스물다섯 살 때 홀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셨죠. 20년이 지나 다시 그곳을 찾으셨어요. 딸과 함께. 기분이 어떠셨어요?
분명히 봤던 곳이고 왔던 곳인데, 정말 오랜만에 온 곳이기도 하니까 완전 새롭게 보였고요. 리사가 그곳에서 뭔가를 느끼기를 바라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그곳에 다시 왔다는 게 저한테 의미가 더 컸던 것 같아요. 나는 그대로 있지만 나를 둘러싼 주변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잖아요. 결혼도 했고, 아이도 가졌고. 또 다른 시각으로 보이더라고요. 확실히 이십대에 떠났던 여행보다 지금이 더 넓은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어느 한 곳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면 지금은 더 넓은 화각으로 보게 된다고 할까요. 디자이너로서 가장 좋은 점은 아름다운 걸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십대 때는 그게 시각적인 것에 국한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먹는 음식, 그곳의 공기, 피부에 닿는 촉감, 들리는 음악까지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있어요. 지금은 무언가를 바라볼 때 더 넓게 열고 바라보는 거죠. 그래서 이십대에 갔던 여행지와는 다르게 보이기도 했어요.
시간을 기록하는 마음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많이 지쳐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렇죠. 일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었고 쉼이 필요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일을 너무 몰입해서 하면 쉼도 어색해지잖아요. 어떻게 쉬어야 될지 모르겠는 거죠. 때로는 쉼을 가졌음에도 충전되기보다 방전될 때도 있고. 그러다가 이 여행을 가게 됐는데, 저한테도 진짜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는 ‘나는 아이를 위해서 이렇게 시간을 내서 혼자 아이를 데리고 먼 곳에 여행을 가는 괜찮은 부모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요. 이 여행을 통해서 오히려 제가 더 위로 받고 힐링된 것 같아요. 아이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고요.
여행을 다녀온 후에 부녀 관계에 생긴 변화가 있나요?
뭔가 둘만의 비밀 같은 게 생긴 거죠. 엄마는 함께하지 않은 둘만의 비밀, 둘이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생긴 게 큰 의미가 있는 거죠. ‘우리 작년에 이탈리아 여행 다녀온 거 기억나?’라고 물어 보면 리사 나름대로 되게 세밀하게 기억해요. 저는 저 나름대로 기억하고. 그리고 ‘그 다음’을 계획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시작이 없었으면 그 다음도 없잖아요. 시작에 대한 진입 장벽도 높고. 그런데 일단 시작을 했으니까 ‘우리 또 이렇게 여행할 수 있겠네’라는 다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리사가 “나는 여름마다 아빠랑 이렇게 여행할 거야”라고 말했다면서요. 지금도 그런가요?
또 여행 가자는 이야기를 리사도 하고, 저도 하고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운 건 아니고 ‘둘이서 또 같이 여행 해보자’ 하고 이야기하는 거죠. 매번 같이 여행을 다니면 너무 좋지만, 쉽지는 않아요. 아이들의 방학이 회사원의 연차보다 길더라고요. (웃음) 서로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데, 따로 시간을 내야죠.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에 직접 촬영하신 사진들이 실려 있습니다. 모든 사진이 책의 앞부분에 모여 있어요. 이유가 있나요?
책은 철저히 독자의 상상력에 의존해서 전개된다고 믿어요. 내가 경험한 범위 안에서 얼마든지 상상을 넓게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똑같은 ‘푸른 바다’라고 해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다의 색깔이 다 다르다고 생각해요. 내가 경험한 범위 안에서 ‘푸른 바다’를 상상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푸른 바다’라고 쓰고 그 위에 바다 사진을 두면 하나만 단정 지어서 보여주는 게 되잖아요. 글을 읽는 동안 독자들이 상상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온전히 읽는 사람의 상상으로 채워지면 좋겠어요. 그래서 사진을 책의 앞부분에 따로 실었어요.
평소에도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촬영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대학생 때부터 쭉 그랬던 것 같아요. 풍경을 눈에 담는 것도 좋지만, 사람은 망각을 하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죠. 사진이라는 게 비주얼적인 단 한 장면이지만, 그 사진을 둘러싼 여러 가지 감정들이 다 담겨 있어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보고도 그때 우리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어떤 음식을 먹으면서 어떤 기분으로 그곳에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많이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이 책을 통해서 리사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전하고 싶은 이야기라기보다는, 책의 목적이 좀 명확해진 것 같아요. 아빠의 관점에서 리사의 시간을 기록해 주고 싶은 마음이죠. 아마 리사가 자라면서 이 기억들이 희미해지고 잊힐 텐데, 리사의 일곱 살의 열흘 동안에는 이런 시간을 보냈다는 걸 아빠의 관점에서 보여주고 싶어요.
* 정승민
대구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디자이너를 꿈꾸며 서울로 상경해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디자인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디자인 회사에서 2년 동안 근무한 뒤, 2010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TRVR과 2018년 Cafe TRVR을 론칭하여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2015년 모델 장윤주를 만나 운명 같은 결혼을 했으며, 2017년 딸 리사가 태어났다. ‘여행자(Traveler)’를 뜻하는 TRVR에서 전하는 메시지와 같이, “일상을 밀도 있게,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가는 것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다. 여행을 진심으로 즐기며, 여행하며 만나는 다양한 장면들을 사진과 글로 기록한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