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자료를 읽었다. 정확히는 SF에 나타나는 오리엔탈리즘을 알고 싶었다. 미국 등지에서는 ‘동양’을 어떻게 보았나. SF 작가들은 ‘이국적인’ 인물에게 어떤 역할을 주었나. 현재는 아시아가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나. 아시아계 작가는 어떤 글을 쓰나. 또 한국에서는 이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특히 지금은 아시아계 미국인, 혹은 미국에 거주하는 아시아인의 작품이 요란하게 출간되는 중이다. 한국에 책이 출간된 경우로 예를 들면 에세이는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나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 소설로는 이민진의 『파친코』가 주목받았다. 물론 이창래 등 전부터 꾸준히 국내에 소개된 작가가 있다. 테레사 학경 차의 『딕테』도 이미 2000년대에 출간된 적이 있다. 다만 예전에는 이런 작품을 ‘예외적 사례’라고 여겼다면 이제는 ‘새로운 경향’으로 분석하는 듯하다. 아시아계 인물의 미묘하고 복잡한 경험을 다루는 책은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고 있다. 다수의 작품이 특정한 유사성과 관습적 요소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는 장르라고 부를 만하다. 그렇다면 아시아계/아시아인 작가가 미국 독자를 대상으로 쓰는 책에는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나타날까? 특히 비현실을 필요로 하는 SF에서는 어떨까?
이런 질문에서 출발해서 현재는 주서영(Seo-Young Chu)의 글을 즐겁게 읽고 있다. 주서영은 한국계 미국 문학을 분석하며, 이들 작품이 ‘한’을 서술하기 위해 어떻게 SF적인 요소를 사용하는지 살핀다(참고:
위의 글을 참고하면, 제인 정 트렌카(Jane Jeong Trenka)의 경우 『피의 언어(The Language of Blood: A Memoir)』(2003)라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한’을 ‘어머니의 태내에서 전이받았다’고 서술한다. 트렌카는 어릴 적 미국 백인 가정에 입양되어 자랐다. 그들은 트렌카를 ‘탈민족화된’ 세상의 사람으로 기르려고 노력했다. ‘탈민족화’는 ‘탈한국화’를 포함하고, 트렌카는 한국인이나 한국 문화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자랐다. 그런데도 트렌카는 유년기부터 한국을 향해 그리움을 느꼈다고 서술한다. 자신이 자란 미네소타보다 한국의 풍경을 생각했고, 거대한 슬픔을 느끼곤 했다. 이는 후천적인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할수록 트렌카의 반응은 거짓된, 근거 없는, 공상에 불과한,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 영역으로 쫓겨난다. 저자는 자신의 고통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SF가 현실이 아닌 세계를 묘사하듯, 트렌카의 회고록은 설명되지 않는 사건을 서술한다. 생물학적 모친과 강력하게 연결되었던 동안 트렌카는 기억과 함께 그에 수반하는 감정을 체내에 수용했다. 기억이나 트라우마가 생물학적으로 유전되지 않는다는 법칙은 잠시 무시된다. 태아 시절에 엄마에게서 한국의 기억을 텔레파시처럼 전이받았다는 서술은 적어도 회고록 내에서는(다시 말해 저자의 내면에서는) 진실하다.
이 지점에서 주서영은 SF가 작동하는 양상을 발견한다. 주서영이 새로이 정의하는 바에 따르면(알기 쉽도록 다소 왜곡해서 말하자면) SF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순전히 상상은 아닌 대상을 작품 내에 모방하는 장르다. 리얼리즘과 SF는 존재 가능한(혹은 인지 가능한) 대상을 서술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둘은 반대말이 아니다. 리얼리즘과 SF는 모두 상상을 이용해 대상을 서술한다. 하나의 스펙트럼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차지한다. 다만 리얼리즘은 표현하기 쉬운 대상을 서술하므로 에너지를 적게 사용한다. 보통의 한국 소설은 인물이 식사하는 장면에서 쌀밥과 김치의 모습을 하나하나 묘사하지 않는다. 한국 독자는 이미 그 모습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작가나 독자나 힘을 쏟을 필요가 없다. 반면 SF는 리얼리즘과 달리 대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를 거부한다. SF가 행하는 모방은 매우 많은 에너지를 요한다. 작가는 인지적으로 낯선 대상을 서술하기 위해 노력한다. 독자가 따라갈 수 있도록 여러 지침과 단서를 섞는다. 트렌카의 회고록에서 ‘기억의 유전’이 SF적인 이유는, 고도의 에너지를 사용해 우리가 낯설게 여기는 대상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트렌카는 자신의 경험(해보지 않은 기억)의 출처를 매우 감각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덕분에 문자 그대로의 내용(기억이 유전되었다)과 비유적인 내용(자신의 기억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강한 연결을 느낀다)은 모순 없이 공존한다.
이렇듯 SF에서는 “순전히 문자적인 것도 아니고 순전히 비유적인 것도 아닌” 대상이 (비교적) 온전히 서술된다. 그 낯선 양상은 SF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다층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가상 공간처럼 실체 없는 것이나, 트라우마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것, 4차원 세계처럼 인식하기 힘든 것은 SF의 영역에서는 우리의 인지와 충돌하지 않는다. SF는 인지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대상을 상상할 수 있는, 서술할 수 있는 것으로 구현한다. 그렇다면 ‘서구’에서 아시아계/아시아인이 경험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사건/감정/경험은 SF를 통해 한층 효과적으로 서술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주장에 솔깃해하는 중이다.
나는 주서영의 작업을 읽으며 켄 리우의 소설을 떠올렸다. 켄 리우의 소설은 SF와 작가의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소설에는 아시아(특히 중국)를 향한 문화적 뿌리와 역사적 책임감, 그리고 과거/기록/기억은 완결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시간대에 공존한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선형적 시간관은 힘을 잃고, 과거 현재 미래는 일렬로 늘어서지 않고 다면체를 형성한다. 한 예로 『종이 동물원』의 마지막에 수록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일본의 731부대가 자행한 행적을 현재로 끌어온다. 작중 중국계 미국인 ‘에반’과 일본계 미국인 ‘기리노’ 부부는 과거를 들추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 개개인의 기억을 탐사해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 생생하게 재생하는 기술이다. 그래서 ‘731부대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성립한다. 과거는 문자 그대로 현재형으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비유적으로, 731부대 문제는 피해자가 아직 살아 있고, 진상 규명이 완료되지 않았으며, 사과나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비유적으로는 물론이고 문자 그대로, 역사를 ‘이미 지나간 일’로 치부하는 행동은 그릇된 것으로 비친다.
한편 통상적인 의미에서 SF는 아니지만 「송사와 원숭이 왕」도 유사한 결을 지닌다. 시간적 배경은 청나라 건륭제 시대로, 어느 마을에 사는 주인공 ‘전호리’는 양민들의 송사에 끼어드는 일로 먹고 산다. 지금으로 말하면 변호사 같은 역할이지만 변호사와 달리 그에게는 자격증이 없다. 그저 재치 있는 입담과 배짱, 적절히 뇌물을 찔러넣는 눈치가 있을 뿐이다. 다만 특이하게도 그는 상시로 ‘원숭이 왕’의 목소리를 듣는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전호리가 원숭이 왕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목소리가 환청인지 아닌지, 왜 하필 원숭이 왕인지 등등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소설은 머릿속 목소리가 내는 효과에 주목한다. 원숭이 왕은 전호리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그는 (당연히!) 서유기의 손오공이고, 남에게 들려줄 만한 경험이 아주 많다. 손오공이 픽션 속 인물이며 모든 경험이 허구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전호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시점에 어떻게 행동할지 갈피를 잡는다.
동시에 전호리는 실제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받는다. 그는 황제의 특수부대가 뒤쫓는 사람을 도와주는 바람에 비밀을 알게 된다. 헛소문인 줄만 알았던 양주대학살이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비밀이다. 과거의 사건은 당시의 사람이 남긴 기록으로, 기록을 보관하고 도망다닌 사람을 통해서, 현재 시점에 있는 전호리에게로 전달된다. 알아버린 이상 그는 선택을 해야 한다. 전호리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사건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지만, 양주 사건이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현재형으로 등장하는 탓에 전호리는 삽시간에 사건에 연결된다. 그가 사건을 묵과하고 몸을 사린다면 그는 당시에 양주의 학살을 알고도 침묵했던 사람들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 된다.
전호리는 황제의 특수부대에 의해 고문실로 끌려간다. 그는 잔인하게 고문받는 동안 머릿속의 원숭이 왕에게 이야기를 청한다. 고문관들이 사지를 끓는 물에 넣을 때, 원숭이 왕은 자신이 타죽을 뻔했던 일화를 이야기한다. 서유기의 기록, 손오공이 겪은 경험은 전호리가 받는 고문과 교차한다. 손오공은 긴고아 때문에 죽을 듯이 고통스러웠을 때도 성질을 버리지 않고 길길이 날뛰었다. 전호리는 그의 행동을 모방한다. 양주의 기록과 원숭이 왕의 이야기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이는 SF에서 문자화와 비유화가 동등한 지위를 공유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양주의 기록은 실제이고(심지어 독자의 현실에서도 실제 사건이다) 서유기는 명백히 리얼리즘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그런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둘 다 시간적 간극을 초월해 현재형으로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중요하다. 두 경험담은 전호리에게 책임을, 선례를, 겪어보지 않은 기억을 선사한다.
나아가 이런 소설은 현재 현실에 존재하는 독자를 엄습한다. 소설에서 모방하는 대상이 과거 아시아의 역사에 기반한다는 사실이 숨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2024년에 책을 읽는 한국인 독자라는 정체성을 잠시 잊고 소설이 묘사하는 시간 속으로 끌려갔다. 과거와 현재, 혹은 재현과 상상이 입체적으로 공존하는 세상을 보아야 했다. 낯설게 느껴질지 몰라도 순전히 상상은 아닌, 현재 및 현실에 분명히 연결되어 있는 공간으로. 덕분에 나는 SF가 왜 좋은지 표현할 방법을 하나 더 찾았다.
심완선(SF 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키워드로 여행하는 SF 세계』 『우리는 SF를 좋아해: 오늘을 쓰는 한국의 SF 작가 인터뷰집』 『SF는 정말 끝내주는데』가 있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