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계적인 구조공학자 로마 아그라왈의 저서 『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과 『볼트와 너트, 세상을 만든 작지만 위대한 것들의 과학』을 모두 번역한 과학책 번역가 우아영.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뒤, 과학 전문지 〈과학동아〉 기자를 거쳐 현재 과학 칼럼니스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사회가 과학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독자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번역가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다고 배웠는데, 이렇게 독자님들께 편지를 드려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고민 끝에 이렇게 대놓고 독자님들께 말을 걸고 있는 것은, 그럼에도 『볼트와 너트, 세상을 만든 작지만 위대한 것들의 과학』 원문을 꼼꼼히 읽어본 제가 몇 마디 보태드리는 쪽이 독자님들의 즐거운 독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그러길 바랍니다.
로마 아그라왈의 책을 두 권 모두 번역하셨어요. 선생님 SNS에서 번역 작업을 줄여가시려던 차에 저자가 '로마 아그라왈'인 걸 알고 번역을 맡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걸 봤어요. 번역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너무 개인적인 TMI일 수도 있지만, 저는 로마 아그라왈의 책 두 권을 모두 번역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정확히는 전작의 경우 윤신영 작가님의 권유로 함께 번역했고요. 그런데 실은 회사를 다니며 잠을 줄여 틈틈이 번역하는 게 너무 힘에 부쳐서, 『빌트』와 『일상 감각 연구소』를 작업하고는 더 이상 일을 맡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얼마 안 돼 이렇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을 줄 몰랐던 거죠. 그녀의 매력이 뭔지 궁금하시죠?
로마 아그라왈은 영국의 구조공학자입니다. 그녀는 책에서 늘 본인이 '물리학 너드'라고 말하는데, 물리학에 속해 있는 분야 중에서도 특히 힘과 에너지의 관계를 탐구하는 역학 파트의 전문가입니다. 한국 대학의 학과 중에는 건축공학과나 토목공학과가 가장 비슷하죠. 바로 이 점, 즉 그녀가 유능한 역학 전문가이면서 여성이고 아시아인이라는 배경 때문에 저는 그녀가 쓰는 글이 늘 반갑습니다.
기계공학(역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늘 아쉬움과 궁금함, 기대감이 있기 때문인데요. 먼저 아쉬움. '여성 엔지니어가 쓴 책은 왜 이렇게 찾기 어려울까.' 그건 아마도 이 분야를 공부하는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궁금함. '여성 엔지니어가 쓴 책은 어떻게 다를 것인가.' 기계나 건물이 얼핏 성차와는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몸에 맞지 않는 기계를 평생 써온 사람들은 잘 압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요. 자, 그럼 이제 기대감. '여성 엔지니어가 쓴 책은 얼마나 놀랍고 흥미로울까.' 로마 아그라왈은 이런 저의 기대감을 120% 충족시켜준 작가였답니다.
이번 책 『볼트와 너트, 세상을 만든 작지만 위대한 것들의 과학』을 간단히 소개해 주신다면요?
이번에 출간된 로마 아그라왈의 신작 『볼트와 너트』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구성요소를 파헤치는 책입니다. 물질은 원자로 이뤄져 있고, 원자는 중성자와 양성자와 전자로 이뤄져 있고, 그리고 이 중성자와 양성자는 쿼크로 구성돼 있습니다(그녀는 실제로 학창 시절에 원자물리학과 입자물리학에 매료됐다고 하네요). 물질의 구성이 그런 것처럼, 로마 아그라왈은 현대 인공물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못, 바퀴, 스프링, 자석, 렌즈, 끈, 펌프와 같은 7가지라고 말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과학자들이 이미 지렛대, 바퀴와 축, 도르래, 빗면, 쐐기, 나사 등을 복잡한 기계의 기초가 되는 ‘단순 기계’라고 정의한 바 있지만, 로마 아그라왈은 “너무 구식인 데다 내가 보기엔 충분한 설명도 아니기 때문에 이 중 몇 개를 빼고 다른 걸 추가”(9쪽)했다고 선언하죠. 평생 구조공학자로 일해온 전문가의 통찰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작 『빌트』와 비교해보면 더 재미있어요. 이 책을 공동번역했을 때 “도시를 수평으로 쪼개보는 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구조공학을 이야기할 때 흔히들 높게 솟아오른 유명한 마천루를 하나씩 소개하곤 하는데요. 『빌트』는 접근법이 조금 달라서, 마천루의 공통 면모를 하나의 주제로 잡아 풀어내거든요. 예를 들어 강철과 콘크리트 같은 재료라든가, 하늘과 땅과 지하에 있는 구조물들, 물과 하수도 같은 요소로 각 장이 구성돼 있죠.
비슷한 비유로, 저는 이번 책 『볼트와 너트』를 “도시를 점묘법으로 보는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고층 빌딩이 솟아 있는 도시에서 다른 건 싹 다 제거하고 못(과 그 파생물)만 남기면 어떤 그림이 될까요? 까만 점들이 건물의 형태와 심지어 내부 인테리어의 모습까지 드러내고 있지 않을까요? 자동차 한 대에만 자석이 100개 이상 들어간다는데, 자석만 남겨본다면요? 이런 식으로 바퀴, 스프링, 렌즈, 끈, 펌프만 남기고 다 지운다면 점묘법으로 그린 듯한 도시가 될 것 같아요.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동안 무엇에 의지해 잠자고 먹고 이동하고 있었는지 알게 될 겁니다. 이런 것들이 현대사회를 말 그대로 ‘떠받치고’ 있는 셈이죠.
전작인 『빌트』에서는 저자가 여성 엔지니어로서의 자신의 일과 삶을 많이 보여주었는데요. 이번 책에서도 그런 부분들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있나요? 개인적으로 책 속에 나온 에피소드 중 선생님을 사로잡은 이야기는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경험의 차이는 자연스레 관점의 차이를 만들잖아요. 그리고 관점의 차이는 자연스레 이야기의 차이를 만들고요. 스토리텔링이란 얽히고설킨 수많은 사실 중에서 관점에 따라 취사선택한 사실을 엮어내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이니까요.
역학에 관해 이야기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아그라왈이 ‘펌프’를 논하며 유축기를 등장시켰을 때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어요. 그녀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유축기의 설계 사양과 흡입력에 대해서 떠들겠어요? 공개적으로 잘 말해지지 않는 임신과 출산, 모유수유의 고통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설명할 때는 너무 공감돼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출산 여성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과학책이라니, 몹시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유축기 개발 역사에 대해서도 새로 알게 됐어요. 전기로 구동하는 개인용 유축기가 1990년대 후반에야 시장에 나왔다니요. 산업혁명은 그보다 100년 전에 시작됐고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인 역사는 헤아리기도 어려운데 말이에요. 그녀는 또한 “반드시 시스젠더 여성이거나 임신 경험이 있어야만 모유 수유를 하거나 유축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모든 유형의 모유 수유 부모의 요구사항을 설계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267쪽)는 점도 놓치지 않고 지적합니다.
‘렌즈' 이야기는 또 어떤가요. 이 챕터는 그녀의 딸 자르야에게 쓰는 감동적인 편지로 시작됩니다. 처음엔 갑자기 편지글이 나오길래 내용이 잘못 들어간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자궁이 막혀 험난한 시험관 시술 끝에 딸을 얻었다는군요. 그러니까 그 편지는 “렌즈라는 단순해 보이는 작은 곡면 유리 조각이 없었다면 너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야. 이건 너를 위한 이야기란다”(172쪽)라는 고백이었어요. 그리고는 난임 클리닉에서 경험한 일들과 렌즈 개발 역사로 이야기가 넘나듭니다.
전작 『빌트』처럼 여성 엔지니어로서 일과 삶을 솔직하게 내보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특히 이번 책에는 어린 시절 인도에서 겪은 일들을 많이 들려주고 있어요. 수십 년 전 본인과 가족들이 인도에서 겪은 기술에 대한 경험은 어땠는지, 그간 어떻게 변모했고 지금과는 어떻게 다른지 가족의 삶을 통해 말해주죠. 그 옛날 인도에 살던 로마 아그라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과 이모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서구 과학사에 가린 아시아 과학자들도 함께 등장하고요.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꼽으며 유축기과 임신 사례를 들었는데, 여기서 꼭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점이 있습니다. 여성이 쓰거나 여성을 독자로 하는 과학책이 요리, 청소, 임신/출산/육아 등의 분야에 한정되길 기대하는 것 또한 성차별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본인 삶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내밀한 이야기를 역학으로 풀어내는 여성으로서 로마 아그라왈의 존재는 너무나 소중합니다만, 『볼트와 너트』를 ‘여성’ 공학자의 책으로만 읽는 것은 너무 비좁은 접근법이겠지요.
선생님께서도 공대를 졸업하셨는데요. 사람들이 '공학' '엔지니어링' 하면 벌써 벽부터 느끼잖아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공학' '엔지니어링'은 무엇인가요?
로마 아그라왈은 '엔지니어링'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엔지니어링은 우리 인류가 어떤 모습인지를 나타낸다”고 하며, “엔지니어링은 우리가 서로, 그리고 지구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인 셈”(272쪽)이라고 말하죠.
공대를 졸업한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엔지니어링에 높다란 벽을 느끼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엔지니어링이라는 학문은 어렵죠. 저도 겨우 졸업한다고 혼났는걸요. 하지만 학문으로 보자면 어렵지 않은 분야란 게 있나요? 그래서 책의 일러두기에도 적었듯 엔지니어링의 개념을 좁은 학문 분야가 아니라 ‘다양한 재료나 기계를 어떤 목적에 따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활동’으로 확장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러고 나면 일상의 정말 다양한 활동이 본질적으로는 엔지니어링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요. 딸아이와 찰흙을 주물러 실용적인 연필꽂이를 만드는 것, 다양한 재료를 불에 달구고 서로 화학 반응을 일으켜 맛있는 음식으로 만드는 것 또한 저는 엔지니어링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엔지니어죠. 그러고 보면 엔지니어링이 그 자체로 인류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로마 아그라왈의 표현이 어렴풋이 이해가 됩니다.
책을 번역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지점이 있으신가요? 번역가의 어려움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궁금합니다.
책이 출간되고 난 뒤에 독자분들께 꼭 알려드리고 싶은 사항이 있었어요. ‘바퀴’ 챕터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A ?ghter pilot putting her plane through a series of intricate twists and turns at speed can still be sure of how she is orientated, thanks to gyroscopes.” 전투기 조종사가 어떻게 자이로스코프의 도움을 받는지 설명하는 내용인데, 문장 속에서 ‘her’와 ‘she’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어요. 보통 전투기 조종사는 남자를 떠올리기 쉬운 데다, 꼭 전투기 조종사가 아니더라도 이런 문장 속에 등장하는 불특정 인칭대명사는 ‘he’, ‘his’를 쓰기 마련이니까요. 의도적으로 쓰인 문장이었죠. 그리고 추가로 짐작건대, 아마도 로마 아그라왈은 책을 앞부분부터 순서대로 읽어온 독자에게 찡긋 눈짓을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앞서 나온 ‘못’ 챕터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여성들만의 비행연대와, 소속 연대의 선임 중위로서 860개의 임무를 완수한 항공사인 폴리나 블라디미로브나 겔만의 이야기가 등장하거든요. 어쩌면 이 문장은 그녀들의 이야기였죠.
그런데 이걸 한국어로 효과적으로 옮길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주어를 곧잘 생략하는 한국어 문장의 특성상 '그녀'라는 단어를 인위적으로 넣자니 독자들의 가독성을 해칠 것 같았고, 이런 배경 설명을 길게 넣자니 번역가가 원문을 과하게 해치는 셈이 되어버렸죠. 마지막 순간까지 거듭 고민했고, 결국엔 주어의 성별을 드러내지 않는 문장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게 최선이었는지 여전히 의구심이 남지만, 이렇게라도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분들이 무엇을 얻어가면 좋을까요?
엔지니어링을 이해하면 로마 아그라왈이 말했듯 “우리가 사는 행성과 모든 생명체에 대한 공감을 지닌 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278쪽). 엔지니어링은 그 자체로 인류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고 인류가 서로, 그리고 지구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니까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사물을 보는 눈이 다소 달라질 수도 있을 거예요. 거기서 같이 시작해 보자고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나은 종이 될 수 있을지.
*우아영 과학 기자. 동아사이언스에서 5년간 과학 전문지 『과학동아』를 만들었고, 1년간 유튜브 채널 [과학 읽어주는 언니]를 운영하며 독자와 구독자를 만났다.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연료전지를 공부했다. 발화 원인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소방관들의 노고를 담은 기사로 2017년 1월 한국과학기자협회 ‘이달의 과학기자상’을 받았다. 옮긴 책으로 『빅 히스토리』(공역), 『빌트, 우리가 지어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공역)이 있다. |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