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추락, 따듯한 불안… 이토록 안온한 모순이 있을까
그녀가 만든 세계라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어쩐지 믿어봄 직하다고 여겨지는 수수께끼 같은 마법이 이 한 권에 펼쳐져 있다.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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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통해 소설가로서 첫발을 뗀 김나현이 그간 부지런히 그려낸 일곱 개의 작은 세계를 그러모아 한 권의 세상을 완성했다. 멀리서 보면 안온하기 그지없는 삶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낯설고 서늘한 구석을 기어코 떼어내 각양의 이야기로 발전시키는 작가의 능력은, 사실 그 자체보다 단정하고 차분한 방식과 과정에서 더 빛을 발한다. 그녀가 만든 세계라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어쩐지 믿어봄 직하다고 여겨지는 수수께끼 같은 마법이 이 한 권에 펼쳐져 있다. 우리는 그저 작가가 가리키는 그 세계로, 무한히 확장할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첫 소설집 『래빗 인 더 홀』을 출간하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무척 기쁩니다. 저는 좋은 기회로 장편을 먼저 냈는데요. 그때도 물론 기뻤지만, 오랫동안 저의 첫 책이 소설집의 형태로 나올 거라 생각해와서 『래빗 인 더 홀』의 실물 책을 받아보았을 때 비로소 제 꿈이 이루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무엇보다 소설의 내용을 잘 담아낸 표지의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어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래빗 인 더 홀』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와 완전히 환상적인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소설집을 통해 어떤 세계를 보여주고 싶으셨는지요. 

소설집을 준비하면서 신기했던 게 있는데요. 흩어져 있던 소설들을 모아놓으니 공통된 분위기나 특성이 보이더라고요. 각각 써나갈 때는 그때의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별생각 없이 썼을 뿐인데 결국 비슷한 범주에서 쓰인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제 소설들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 보이다가도 환상성을 드러내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 보이다가도 지난한 일상을 드러냅니다. 가령 월세 계약이 끝나가는 한 여자가 문자 그대로 눈이 없는 부동산 중개업자를 만난다거나(「안의 세계」), 원인을 알 수 없는 구멍이 몸에 퍼져가는 한 남자가 구멍을 숨긴 채 주말 근무를 나가야 하는 상황(「로쿰」) 같은 것이죠.


제가 이런 식으로 일상에 환상을 심어놓는 것은 우리의 소박한 일상조차 이해할 수 없는 요소로 가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순간이 있지 않나요?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순간을 품고 계속 살아가야 할 때도 있잖아요. 그런 의도치 않은 순간의 맞닥뜨림, 답을 찾을 수 없는 불가해한 상황이 제 소설에서는 일상 속의 환상, 현실 속의 비현실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소멸 #추락 #상실 #균열 #부재…… 소설들이 담고 있는 키워드는 다소 어둡고 위험해 보이는데, 책을 둘러싼 이미지는 따듯하고 안온하고 안락합니다. 왜일까요?

최근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서 소설 속에서 참 별일이 다 일어나는데 소설을 읽고 있는 나는 왜 이렇게 편안할까, 이 기묘한 세계의 일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아늑하게 느껴질까, 그런 궁금증이 일었어요.


저는 그 까닭이,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이 기본적으로 기묘하면서도 편안한 무엇이기 때문에 그가 쓰는 소설 또한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소설이 주는 분위기란 곧 작가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언급하신 대로 제 소설에서는 소멸, 추락, 상실, 균열, 부재 등 소위 어두운 키워드로 읽힐 만한 단어들을 발견할 수 있죠. 하지만 한층 들여다보면 소멸하는 인간을 끝까지 지키는 사랑이 있고, 기꺼이 자신의 추락을 허락하는 용기가 있고, 상실해도 영원히 잃은 것은 아니란 믿음이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제가 끌어오는 이미지가 선택되는 것일 테고, 소설이 주는 분위기도 결정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네요.


소설집을 관통하는 문장이나 장면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뒤표지에 실린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눈이 없을 뿐이니까요”를 소설집을 대표하는 문구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 소설을 담당한 편집자님이 탁월하게 잘 뽑아주신 것 같아요. 이 대사는 「안의 세계」에서 눈이 없는 방아짐의 얼굴을 보고 걱정하는 이레에게 방아짐이 건네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일 또한 우리의 짧은 생각과 판단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연민은 필요하지만 함부로 연민하지 않는 태도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래빗 인 더 홀』에 실린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함부로 연민당하지 않으려는 분투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태도가, 위의 문구에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더불어 「안의 세계」의 마지막을 눈여겨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의 등단작이 된 이 소설의 마지막을 썼을 때 ‘이게 내가 쓰고 싶었던 문장이구나’ 새삼 깨달았습니다. 눈앞에 드러난 표면의 세계만이 아닌 그 안에 숨어 드러나지 못한 세계 또한 찬찬히 살펴보겠다는 결심이었어요. 그걸 발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십 년이 넘게 혼자 소설 습작을 했는데, 그 시간은 결국 제가 쓰려는 게 무엇이고 어떤 결심에 닿아 있는지 깨닫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그 결심을 함께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동화 같은 이야기 「래빗 인 더 홀」에는 그 끝이 위험일지 안락일지 모를 홀(hole)이 등장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홀이 존재한다면, 작가님이 몽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나요?

「래빗 인 더 홀」을 쓸 때 정말로 고민한 부분이에요. 내가 몽이라면 홀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무엇이 있을지 전혀 모르는 세계로 뛰어들 수 있을까? 저는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몽이처럼 홀 속으로 들어가려면 한 일 년은 넘게 고민할 것 같아요. 그렇더라도 내가 찾는 존재가 홀 속에 있다면 결국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소설을 쓰는 것도 홀 속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엇이 펼쳐질지도 모르고 일단 써야 하는 상황이랄까. 들어가지 않으면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소설도 써보지 않으면 뭘 쓰려고 했는지 알 수 없는 것 같거든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그 이유는요?

「안의 세계」에 등장하는 ‘백 과장’과 ‘목’이라는 인물이 자주 떠오릅니다.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은 한순간 날카로운 대립을 이루는데요. 백 과장은 자신이 불쌍하다고 상정한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베푸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자기 존중감을 되찾으려는 사람입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자기기만에 가까운 행위이지요. 목은 백 과장의 자기기만을 꿰뚫어보는 인물입니다. 그 둘은 마치 저 자신의 사회적 자아가 양분된 것처럼 느껴져요. 어떤 조직이나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존중감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것이 때때로 자기 기만적 행위로 이어질 때가 있고, 그런 자신을 깨닫고 스스로를 꾸짖을 때가 있거든요.


다음으로 애착이 가는 인물은 「로쿰」에 등장하는 ‘안’입니다. 안은 어느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에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이 점차 커지면서 소멸해가는 인물이에요. 게다가 소멸 이후에는 누구에게도 기억될 수 없는 존재가 되죠. 그의 납득할 수 없는 운명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워요. 안을 기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 그 소멸을 지켜보며 하루하루 문자로 기록해두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기록을 보면서 세상에 안이 존재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뿐이죠. 저는 이런 일이 소설 쓰는 사람의 사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인물을 가장 내밀한 방식으로 남기는 일이요. 역사가 기록하지 못하는 개인의 내밀함을 담아낼 수 있는 장르는 역시 소설이 아닌가 싶고요. 저에게 이런 사명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이 인물이 자꾸 떠오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집의 해설을 쓴 민선혜 평론가가 김나현의 이야기는 수수께끼의 미학이라고 규정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해설을 읽고서야 제 소설이 ‘수수께끼의 미학’이란 수사로 묶일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어요. 저 스스로 관심을 갖고 소설을 통해 탐구하는 방향이 세상의 불가해한 구석(“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마음과, 가만히 바라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세계와 사람들”)이란 걸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을 저는 ‘안의 세계’라고 이름 붙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민선혜 평론가의 말처럼 내가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세계랄까요.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다는 면에서 ‘수수께끼’라고도 할 수 있을 테고, 민선혜 평론가의 표현을 통해 그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이름을 부여받은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삶이 늘 수수께끼 같다고 생각하거나 얼마나 많은 우연으로 우리의 세계가 결정되는지 공감하는 분이라면, 제 소설을 읽고 이 어쩔 수 없음에 먹먹한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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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