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손에서 손으로
나를 향한 타인의 어떤 선의와, 최선을 다한 염려를 받을 때의 기분. 그럴 때 나는 허물어진 상태 속에서도 선량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ㆍ사진 고명재(시인)
202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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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재 시인이 매달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를 전합니다.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언스플래쉬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 진은영, 「연애의 법칙」 중에서(『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 지성사)


처음 진은영 시인의 이 시구를 읽었던 날은 너무 아름다워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그러니까,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문장은 왜 이토록 아름다운가. 왜 이 행위는 가만히 앉아서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눈, 귀, 코로 강렬한 향기가 나는 것 같은가.

이 시 덕분에 사랑을 주는 방법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내린 조그마한 결론은, ‘사랑의 건넴’은 증여(贈與)라는 방법보다는 부여(附與)를 통해 달성되는 ‘의미의 생성’이라는 것.

물론 좋은 물건을 당신의 손에 쥐여 주거나 향기로운 꽃을 건네는 것도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러한 ‘증여 행위’ 속에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즉 무언가를 ‘주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임을, 그리하여 당신이 그 빛나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귀재들은 값비싼 물건을 주기보다는, 우리에게 살아갈 희망과 용기(유의미)를 준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당신에게 연결하는데 능통하다. 이를테면 방금 목련을 만진 손끝으로 우리 집 강아지의 코끝을 톡 건드리는 일. 할머니가 쓰던 유품을 문지르다가 지쳐 잠든 엄마의 발목을 쓰다듬는 일. 이런 일들은 정말이지 무용하지만, 끊어진(서로 다른) 개체를 연결시키는 힘이 있다.

물론, 백리향의 어린 잎을 만지던 손끝으로 사랑하는 이의 목덜미를 만진다고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의 행위와 시적 행위는 바로 이렇게 우리 존재의 위상과 품위를 바꾸어 낸다. 내 친구 중에는 좋은 비누로 손을 씻은 뒤, 사랑하는 이들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다. 그는 편지를 받을 사람이 어떤 기분으로 그 편지를 읽을지 상상할 줄 아는 사람이다. 코끝에 닿을 향기까지를 배려하는 사람. 아름다움이 충실하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사람. 여기에는 어떤 빛나는 ‘연결감’이 있다. 손에서 손으로, 편지에서 향으로, 마음으로, 삶으로. 그렇게 의미를 사탕처럼 쥐여 주고픈 마음. 그것이 어쩌면 시와 손의 오랜 꿈은 아닐까. 각각의 개체를 연결-짓는 게 사랑의 힘은 아닐까.

백리향에서 목덜미로, 마음에서 시로, 아기의 말랑한 볼에서 바싹 말린 빨래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접촉하면서 무언가가 연결되리라는 느슨한 희망. 어쩌면 별자리도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닐까. 각각의 다른 대상(별)을 사람의 마음이 기어코 연결하여 이야기(별자리)를 만들어 낸 건 아닐까.

덧붙여 나는, 이 시에서 하필 연인이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진다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든다. 그건 목덜미가 내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부위이며 무방비로 노출된 연약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바로 그런 자리를 “어루만”지는 일. 그것도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그렇게 하다니. 여기서 장미잎도 난초도 아카시아도 아닌, “백리향의 작은 잎”이라는 점은 눈부시다. 그러니까 “백리향”을 만졌던 손가락으로만 부여할 수 있는 어떤 의미가 있다. 마치 무구하고도 순진한 아기들처럼, 이 연인은 끝 모르고 사랑을 믿겠지. 그렇게 그들은 백 리너머, 영원에까지 이 사랑이 지속될 거라고 믿고 있겠지.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 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허은실, 「이마」 중에서(『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펄펄 열이 끓던 어느 겨울이었다, 도무지 내 몸으로 견디기 힘든 몸살이었는데, 어린 나는 동생을 돌보느라 끙끙 앓다가 밤이 오자 소파에 누워서 기억을 잃었다. 분식집 일을 마친 엄마가 집으로 달려와 내 이마에 손을 짚으며 나를 불렀다. 싸늘하리만큼 차가운 손으로 내 이마를 짚으며 엄마는 힘겹게 나를 깨웠다. 그때 그 차가운 손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단숨에 열이 물러나는 기분.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엄마가 웃고 있었다. 울면서 웃고 있는 젊은 내 엄마. 안온감이 온몸으로 번져왔고, 죄책감이 밀려왔고, 어려서 슬펐다. 이 사람을 향한 나의 맑은 사랑을 그때 나는 곧장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은 기분.

나를 향한 타인의 어떤 선의와, 최선을 다한 염려를 받을 때의 기분. 그럴 때 나는 허물어진 상태 속에서도 선량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엔 서로 다른 체온이 있기도 하지만, 각자가 지닌 저마다의 귀한 기억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차이를 느끼고 서로의 동일한 기억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염려하면서, 마치 열을 재기 위해 그런 크기가 된 양, 이마에 꼭 맞는 손바닥을 지니게 되었다.

가만히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무궁히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해 본다. 깍지 끼기. 손목을 쥐기. 단추를 잠그기. 귤을 까주기. 스웨터 짜기. 시집을 펼치기. 손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연결이며 인접한 것들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수백 년 된 나무의 표면을 만질 수 있고 그 손으로 아이의 이마를 닦을 수 있고 고양이의 말랑한 발바닥을 누르다 그 손으로 연필을 쥘 수도 있다. 하물며 인간이 인간의 손을 잡는 일은, 다음의 시처럼 얼마나 눈부신 일인지.


이제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당신 머리맡에

과일나무를 두었는데


당신이 슬픔의 꽈리고추를 씹은 사람처럼

세상에 없는 무시무시한 말을 했습니다

꽃말이 생각났지 뭐예요


성실한 사랑


당신이 나에게 가장 성실했던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가장 성실했던 사람일까요?


당신이 성실한 사랑의 냄새를 맡고 싶다고 해서

제가 당신 손을 꼭 잡아주었는데

이 짧은 걸 하려고 사람은 오래도 사는구나

- 김현, 「두려움 없는 사랑」 중에서(『호시절』, 창비)


사랑의 가장 근본적인 이미지는 서로 다른 두 개체가 손을 내밀어 아주 작은 (둘만의)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시 속에서 화자는 “매운 걸 잘 못 먹는 당신에게 / 매운 걸 주었다가 울어버린 기억이” 있다고 한다. 잘못된 걸 주기도 하고, 사랑을 주려다 실패하는 경험을 우리는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해낸다. 성실했든 성실하지 못했든 사랑을 해낸다.

“이제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당신”은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처한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 나에게 끝없는 질문을 만들어 낸다. “당신은 나에게 가장 성실했던 사람”인데, 과연 나는 진실로 그러했는지. 당신이 지금 “성실한 사랑의 냄새를 맡고 싶다고”하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아픈 당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당신 손을 꼭 잡아주”는 일. 그것이 어쩌면 전부인 동시에 최선이 되는 것. 그것이 작은 동시에 최대가 되는 것.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짧은 걸 하려고 사람은 오래도 사는구나”.

이 짧은 것, 이 흔한 것, 이 작은 것, 내가 아닌 존재의 손을 꼭 잡아보는 일. 그걸 해내려고 우리는 살아간다고. 그러니 시의 제목은 「두려움 없는 사랑」일 수밖에, 용감하게 손 내밀어 꼭 쥘 수밖에.



우리는 매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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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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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재(시인)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