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들을 향한 온기 어린 애도가 담긴 작품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부드러운 진동을 일으켜온 소설가 안윤. 그녀가 수상 2년 만에 데뷔작이자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남겨진 이름들』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심사위원들로부터 "한치도 손을 놓지 못하게 하는 문장의 밀도, 그리고 마치 직접 현지인의 대화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묘사, 사물에 대한 섬세한 자각과 심리의 교직이 우아하게 펼쳐지는 수작"이라는 찬탄을 받은 『남겨진 이름들』. 잊혀가는 이들을 활자의 영원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해내면서도, 깊이 있는 사유와 우아한 분위기로 안윤 소설만의 미학을 확인하게 한다. 이야기를 통해 삶과 사람을 향한 깊은 사랑과 신뢰를 보여준 소설가 안윤을 만나보았다.
박상륭상 수상 소식을 처음 들으셨을 때가 궁금합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2021년 1월 20일이 수상자 발표 날이었는데, 전날 늦은 오후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기에 마음을 비우고 있었어요. 비웠다고는 해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좀 어수선해서 오후 내내 집안 대청소를 했어요. 저녁을 차려 먹고 긴 산책을 다녀왔어요. 찬바람을 맞으면서 이제 내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생각했고요. 산책을 다녀와서 밤 9시쯤 되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강정 시인님이셨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수상을 축하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기쁘면서도 당장은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요. 정말 감사하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여러 번 말씀드렸던 기억이 나요. 전화를 끊고는 한동안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지난 시간이 떠오르더라고요. 기쁨과 안도감, 이유 모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어요.
『남겨진 이름들』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것은 직장 생활을 쉬고 있던 2016년 여름이었는데요. 당시에는 이 이야기를 써서 뭘 해야겠다, 어디에 내봐야겠다, 그런 구체적인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제 안에 고여 있는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다, 딱 그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해 겨울에 다시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서 2년 넘게 글을 전혀 쓰지 못했어요. 2020년 여름에야 소설을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긴 시간을 돌아온 셈이에요. 시상식은 본래 4월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당시 코로나19 상황이 좋지 않아 미뤄지다가 11월에 시상식을 했어요. 돌이켜 보면 곧바로 시상식을 하지 않았던 것이 제 마음의 속도에는 더 잘 맞았던 것 같아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제 일상을 살면서 앞으로의 시간을 천천히 생각해 볼 수도 있었고요. 시상식 날 박상륭상 운영회의 선생님들께서 힘이 되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꾸준히 계속 쓰라고 하셨던 김진석 선생님 말씀도 기억에 남아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고 싶다는, 용기를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간 단편 「모린」(『팔꿈치를 주세요』, 큐큐, 2021)과 소설집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로 독자들을 먼저 만나셨죠. 데뷔작을 2년여 만에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셈인데요. 작품을 다시 살펴보면서 어떤 마음이셨을지 궁금합니다. 처음과는 많이 다르셨을까요?
『남겨진 이름들』 출간이 결정되고 나서도 한동안 원고를 다시 들여다볼 용기가 선뜻 나질 않았어요. 제 안에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랫동안 이 원고를 품고 있으면서 쓰다가 멈추는 과정이 여러 차례 있었고, 그때마다 내가 끝내 이 이야기를 책임지지 못할까 봐, 버려두게 될까 봐 남몰래 두려워했었는데, 그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든 것 같았어요. 이 이야기가 책이 되어 세상에 나가게 될 텐데 내가 이 이야기에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새로운 눈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고칠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만큼 노력을 다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앞섰던 것 같아요.
2년이라는 시간이 어찌 보면 짧은데, 그사이 저의 어떤 부분은 저도 모르게 변해 있어서 원고를 다시 보며 고민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부족함도 눈에 많이 띄었고요. 처음 이 이야기를 썼을 때의 마음과 중간중간 원고를 다듬었을 때의 마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고를 살피는 마음이 제 안에서 서로 다투었어요. 그 모든 제 마음이 원고에 담긴 시차를 납득하고 서로를 보듬기를 바라며 원고를 다시 살폈어요. 그리고 그런 과정을 독자분들도 알아봐 주실 거라고 막연하게나마 믿었고요. 현재의 제가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으로 마무리를 했어요.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삶과 마음에 찾아온 변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 자신만 놓고 본다면, 외적인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아요. 작품 활동이란 것이 글쓰기와 발표, 출간 등을 아우르는 것일 텐데요. 글쓰기는 오랫동안 제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 삶과 마음의 변화들이 글쓰기에도 자연스럽게 반영이 되어왔다고 할 수 있어요. 발표나 출간을 통한 변화들은 저 자신보다 오히려 저를 아껴주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통해서 더 많이 느껴요. 곁에서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응원해주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독자분들을 통해 변화를 느껴요. 잘 읽었다고 글을 남겨주시거나 메시지를 보내주실 때, 제가 쓴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의 존재를 체감하게 돼요. 물론, 이 외에도 매일 제게 찾아오는 삶과 마음의 작은 변화들이 있어요. 그것들을 잘 알아차리고 들여다보고 싶어요. 제가 바라보는 저는 느린 사람이거든요. 새로운 것,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리고 마음을 써야 해요. 가끔 생각해요. 글쓰기가 이런 늦된 저를 사람의 꼴로 살게 해주고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하게 해주었다고요. 지금도,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라요.
『남겨진 이름들』은 키르기스스탄에서 어학연수를 했던 윤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수년이 지난 어느 날, 하숙집 주인 라리사의 부고를 전해 들으면서 시작됩니다. 라리사는 윤에게 수양딸 나지라의 공책을 유품으로 남기고, 윤은 이 공책에 쓰인 이야기를 번역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데요. 키르기스스탄은 많은 분에게 낯선 나라일 것 같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우리와 무척이나 다른 나라를 소설의 배경으로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키르기스스탄을 소설에 녹여내면서 어려웠던 부분이나 더욱 신경 썼던 부분이 있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제게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키르기스스탄이어야만 했다"고 답하는 것이 모호하지만 가장 솔직한 대답이 될 것 같아요. 2016년 여름, 이 이야기를 써보자고 마음먹었을 때가 제가 실제로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로 떠났던 시간으로부터 10년이 흐른 시점이었어요. 더 늦기 전에 그 장소, 시간에 머물렀던 저 자신을 소설의 형태를 빌려 남겨두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서문에서의 화자 '윤'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저와 어느 정도 닮아 있는 화자이기도 해요.
나아가 낯선 공간, 언어, 문화를 배경으로 인간 삶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삶과 죽음, 고통, 상실, 신, 믿음 이런 주제들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에 있지만 그것들이 우리 실생활과 너무 가깝게 혹은 고스란히 그려지면 되레 외면해버리고 싶기도 하지요. 독자인 저도 가끔은 그렇거든요. 우리 삶의 고통과 어둠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소설이라는 허구 속에서만큼은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요. 읽는 이의 그런 마음에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문화라는 거리감을 놓아주고 싶었어요. 그러한 거리 두기를 통해서 우리 삶의 고통을 낯설게 바라보고 유심히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또한, 이 이야기에서 '번역'이라는 것은 타국어를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던 '한 사람의 세계'로 쓰인 언어를 '나의 세계'와 포개어 보고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키르기스스탄은 필연적인 배경이었던 것 같아요. 어려웠던 부분이라면, 아무래도 낯선 언어와 문화가 배경이기 때문에 낯섦의 적절한 거리감을 지키는 것이었어요. 생소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기가 힘드니까요. 또,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배경이 그저 이국적 정취를 느끼게 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랐고요. 그것이 소설을 쓰는 내내 어려운 과제였어요.
라리사는 편지에 이런 말을 남깁니다. '공책들 속의 이야기는 그 애의 이야기이면서 그 애의 이야기가 아니더구나. 일기도 소설도 아니었지. 글쎄, 그런 걸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만, 그 이야기는 그냥 그 애 자체였지.' 그 애의 이야기이면서 그애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치 선문답처럼 느껴지는데요. 이야기라는 허구가 오히려 한 사람을 진실되게 보여준다는 이 말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소설'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자주 생각하곤 해요. 소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계속 소설을 쓰는 것도 같고, 소설이 무엇인지 몰라서 겁 없이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흔히들 소설을 허구로 드러내는 진실이라고 하잖아요. 소설, 허구, 진실 그런 말들을 곱씹다 보면 뭔가 너무 거대해지고 비장해져서 영영 붙잡을 수 없을 것처럼 여겨져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라는 말을 더 즐겨 쓰고 좋아해요.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잖아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또 듣고 싶어해요. 이야기라고 말하면 소설이라고 말할 때보다 허구의 세계가 좀 더 구체화되고 가까워지는 느낌이에요. 내 인생을 책으로 쓴다면 열 권은 될 거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인생의 질곡이 만만치 않았다는 의미일 거예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사실만을 담고 있지는 않아요. 그 안에 자신만의 해석과 편집된 기억, 과장과 생략, 거짓말이 있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요. 저는 그런 하나하나의 이야기 또한 소설이고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눈동자만을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카탸와 우정을 쌓는 장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차를 마시거나 사진을 구경할 때도 나지라와 쿠르만은 매번 카탸와 함께하죠. 넘을 수 없는 물리적 한계가 존재하는 데도 소통하려 애쓰는 두 사람의 모습이 사무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동안 발화만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소통의 방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데요.
말과 글은 가장 효율적이고 간편한 소통 방식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도 생각해요.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는 비언어적인 부분이 더 많죠. 사람과 자연, 동물 사이도 그렇고요. 말이나 글처럼 그 의미를 재빠르게 알아차릴 수 없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지나쳐버릴 뿐이에요. 언어적 표현은 일종의 약속인데, 모두가 그 약속에 동참할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통용되는 간편한 방식을 취할 수 없다고 해서 소통을 포기하거나 소통의 대상에서 배제할 필요는 없어요. 개별적인 신체 조건에 맞는 소통 방법을 찾으면 돼요. 저는 사랑이 소통하는 방법을 찾게 만든다고 믿어요. 그리고 그런 사랑의 태도는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우리는 모두 개별적이고 유일한 존재들이잖아요. 각자에게 맞는 소통의 방식이 있어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정으로 소통한다는 의미는 아니니까요.
『남겨진 이름들』이 인간의 씀과 삶에 바치는 찬란하고 지극한 헌사로 읽히는 건, 나지라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그것이 진실이든 허구이든 슬프든 행복하든 모두 기록했기 때문일 텐데요. 나지라는 왜 모든 것을 기록했을지, 작가님께 여쭙고 싶어요. 그리고 작가님에게 '기록'이란 어떤 의미인지 또한 궁금합니다.
나지라는 왜 이 모든 것을 기록했을까. 이 물음은 『남겨진 이름들』이라는 이야기가 독자분들에게 던지는 하나의 질문이기도 해요.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분 각자마다 다를 텐데, 분명 그 모두가 옳은 답일 거예요. 저는 나지라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받아들이기를 욕망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기록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요. 기록한다는 것, 즉 글쓰기는 쓰는 이에게 자신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진정으로 마주할 용기를 요구하거든요. 그것이 글쓰기가 가진 힘이자 마법이에요. 기록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주어진 삶을 주어진 각자의 조건에서 긍정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이미 쓰인 이야기가 있고, 쓰고 있는 이야기가 있고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뒤로하고 불안과 미지를 향해서 또 어떻게든 나아가니까요.
살면서 절감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모든 일은 완전히 좋은 것도 완전히 나쁜 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저 어떤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지요. 이유도 분명하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요. 삶은 늘 새로운 모습으로 닥쳐오고 때로는 뒤통수를 갈겨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삶이 우리를 잠시 삶 속에 머물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요? 삶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내요. 알 수 없는 것들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애써요. 죽음으로 인한 상실이 닥쳐오면 상실을 겪으면서도 그 죽음을 끝내 잊지 않음으로써 망자를 우리 곁에 살아있게 해요. 저는 그것이 인간이 가진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아름다움에 관해, 삶의 미지에 관해 쓰고 싶었어요. 그리고 독자분들이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여러 감정과 물음을 하나의 체험으로 받아들여 주시길 바라며 썼어요.
*안윤 2021년 장편 소설 『남겨진 이름들』로 제3회 박상륭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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