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연 작가님 안녕하십니까. 정보라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작가님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작가님, 신간 언제 나와여!"
9월 29일 플랫폼 P에서 열렸던 북 토크에 함께 참석했을 때 작가님은 대표작으로 「우주류」를 말씀하셨지요. 저도 학교에서 수업하던 시절에 SF 강의에서 언제나 작가님의 「우주류」를 소개했기 때문에 무척 기뻤습니다.
「우주류」를 읽고 '정상성'에 대한 거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 사람 신체의 생김새부터 시작해서 사고방식이나 행동 방식까지, 존재의 모든 것이 환경이 변하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함께 변할 수밖에 없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가치들인데 우리 인간이 하나의 환경밖에 모르기 때문에 '정상'이라 이름 붙이고 굳게 믿고 단단히 붙잡은 채 다른 존재를 차별하는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주류」를 읽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시야가 좁기 때문에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어리석음은 다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부수고 바꾸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 이야기로 그런 차별을 일깨우고 하나씩 뒤집으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도 함께 배웠습니다.
2020년에 참여하신 앤솔러지 『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의 「미정의 상자」에서 작가님은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셨지요. 코로나19 팬데믹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다루어질 때마다, 실내에서 마스크를 내려 쓰거나 아예 벗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백신이 거대한 음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는 '시계를 되돌리고 싶을 순간이 바로 오늘일 것입니다.'라고 소설에 인용하신 그 문구를 생각합니다. 제가 코로나19에 걸리고 남편이 저에게 옮아서 기침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 문구를 생각했어요. 가족 중에 면역 저하자나 기저 질환자가 있으면 언제나 상실의 두려움, 나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고 죽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병을 옮기고 나만 살아남으면 어떡하나 하는 죄책감과 근심을 짊어진 채 매일매일 생활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우리의 상실과 두려움과 충격과 슬픔과 일상의 공포가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다고 '시계를 되돌리고 싶을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새삼 떠올립니다.
"그래서 작가님, 신간 언제 나와여! 초광속 이동 기술 얘기 쓰신다고 그러셨자나여!"
여기서부터는 일 얘기입니다.
2017년에 작가님이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를 처음 만드셨을 때 저도 (작가님이 시켜서) 난데없이 창립 멤버가 되었잖아요. 2018년에는 또 난데없이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이름을 걸고 제가 미국 새너제이(San Jose)에서 열린 월드콘에도 다녀왔었잖아요! 그때부터 외국에 작가님을 소개할 때마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영어로 번역되었나요?"입니다. 새너제이에서 월드콘 나갔을 때는 가야프레스에서 『레디메이드 보살(Readymade Bodhisattva)』이 출간되기 전이었고, 클락스월드에 「개화」가 번역 게재되기도 전이었어요! 『레디메이드 보살』이 내년에 나온다고 얘기하면 독자님들이 실망한 표정이 되어 쓸쓸히 가버리시더라고요!
다행히 책은 무사히 나왔고 올해는 제가 여기저기 인터뷰할 기회도 많고 한국 SF를 영업할 기회도 많아져서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 SF 대표 작가로 작가님을 얘기하면서 『레디메이드 보살』과 클락스월드에 실린 작가님의 작품들을 열심히 홍보하고 있어요. 며칠 전에 서울외국인학교에 가서 한국 SF를 소개하는 특강을 했는데, 그때도 클락스월드 링크까지 친절하게 찾아서 학생들과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께 보여드렸고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홍보도 열심히 했습니다. 폴란드 가서도 한국 SF 영업을 열심히 했고 제일 좋아하는 한국 SF 작가로 정소연 작가님 이름도 열심히 외치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또 나왔던 질문이 번역 출간됐냐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로는 번역됐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니까 작가님, 신간 언제 나와여! 빨리 폴란드 진출하세여! 제가 미리 영업 열심히 해놨단 말이에여!! 유럽 정복하세여!!! 작가님은 위대하시니까 유럽을 굳이 왜 정복해야 하는지 그런 자질구레한 건 정복한 다음에 생각하세여!"
작가님이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창립자이자 첫 대표직을 맡으셨기 때문에, 우리 연대가 고작 회원 열 명짜리 쪼끄만 단체에서 지금 저를 포함해 64명에다 한국과학문학상 수상 작가님들과 문윤성문학상 대상과 SF어워드 대상 좌청룡 우백호를 한 손에 거머쥔 수상 작가님에다 포스텍 SF어워드 수상 작가님들이 줄줄이 가입하시는 단체가 되었고, 그래서 전자책 전문 출판사나 순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먼저 손 내밀어서 전체 회원 64명 중에서 스무 명씩, 서른 명씩 참여하는 대규모 기획을 진행하는 단체가 되었기 때문에, 저는 어디 가서 우리 연대 자랑을 할 때마다 일단 "정소연 작가님!"부터 외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는 자랑할 만한 단체니까요.
"그러니까 작가님, 신간 언제 나와여!!! 자랑할 거란 말이에여!!!!"
한국 SF 장르에서 여성 작가님들, 더 정확히는 남성이 아닌 작가님들의 활약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특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영미권이나 유럽에서 SF 장르는 거의 남성들이 쓰고 남성들이 읽는 장르라고 아직까지도 인식되고 있습니다. 한국 SF는 가장 오래,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님들 과반수가 여성이지요. 제가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라서 우리 연대로 한정해서 얘기하자면 2022년 11월 기준으로 회원 64명 중에서 남성은 30명, 남성이 아닌 분이 34명입니다.
2기 대표인 듀나 작가님은 30년간 한국 SF를 이끌어 오시면서 성별을 밝힌 적 없으니 비남성(!)이고, 개인 신상을 밝히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가장 SF다운 작가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떨결에 1기 운영 이사를 맡아 고생해 주신 한국 SF의 스타 김초엽 작가님, 2기 부대표였던 전삼혜 작가님, 현재 운영 이사인 이하진 작가님, 그리고 홈페이지를 지탱해 주시는 전혜진 작가님 등, 지면 관계상 다 꼽을 수 없고, 앞으로 더 많은 여성/비남성 작가님들이 등장해서 한국 SF를 더 넓고 풍성하게 이끌어 주시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한국 SF 작가들이 모인 최초이자 대표적인 단체의 창립자 정소연 작가님이 여성이고, 여성과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들을 계속 발표하고 계시고요. (신간 언제 나와여!!)
'최초'는 중요합니다. SF 작가들의 단체를 최초로 만든 분이 여성 SF 작가라는 사실, SF 작가 단체의 첫 얼굴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이후 SF를 쓰시는 여성 작가들에게 굉장한 힘이 됩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 러시아에서 추리 소설이라는 분야를 최초로 대중화시킨 분이 여성 작가인 '알렉산드라 마리니나' 작가님이에요. 마리니나 작가님이 여성 수사관을 주인공으로 삼은 추리 소설을 대중화시킨 후로 러시아에서 추리 소설은 여성의 분야가 되었습니다. 첫 발걸음을 누가 떼느냐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한국 SF는 남성이 아닌 듀나 작가님이 첫 장을 열고 정소연 작가님이 단체를 만드신 덕분에 여성 작가들의 진출이 더욱 활발한 장르가 되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 SF는 비장애인 남성들이 우주선 타고 나가서 남의 행성 때려잡고 정복하지 않는 방향으로 다양하게 나아가고 있지요. 한국 SF는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을 넘어선 아름다움을 탐색하고, 장애가 '극뽀옥'해야 할 짐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자 정체성으로 존중받고,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세계는 어떤 의미인지 안과 밖에서 바라보는 장르입니다. 우리 연대 회원 작가님들이 활동하는 한은 앞으로도 그런 장르로 성장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종교, 연령, 출신 지역, 출신 행성, 기타 이유에 근거한 차별을 하지 아니한다.'를 정관의 인권 규정에 명시하고 있으니까요.
작가님 신간 나오면 제가 미국에도 영업하고 유럽에도 영업하고 막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작가님 책을 휘두르겠습니다. 전 세계 SF를 비남성과 소수자들의 장르로 만들어 보아요! 정상성 뒤집어엎고 차별을 철폐하고 작가님 신간 나오는 그날까지 투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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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SF와 환상 문학을 쓰고 번역도 한다.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선정됐다. 지은 책으로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등의 장편 소설과 『저주토끼』 『왕의 창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