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데에는 고도의 인내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책을 읽지만 모두가 책을 읽는 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모든 방해 요소를 이겨내고 책에 몰입하고 있다면 그가 병들었기 때문, 다시 말해 그가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책 쓴 사람의 시간을,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알려 하고, 타인을 통해 알게 되는 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병든 사람만이 자신을 알기 위해 방황한다. 그리고 알아버렸을 때, 우리는 자신의 상황을 절망적이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아는 것은 희망이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박혜진 작가님의 '엔딩노트' 『이제 그것을 보았어』에서 한 대목을 읽어드렸습니다.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책을 읽고 쓰는 평론가로, 그리고 언제나 책에서 길을 찾는 지독한 독서가로. 박혜진이라는 사람의 궤적에는 차곡차곡 책이 쌓여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보았어』에는 그런 그가 읽은 52편의 엔딩이, 그 엔딩에서 시작하는 무한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요.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이제 그것을 보았어』를 출간하신 박혜진 작가님을 모시고 자신의 일을 천직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열렬한 책 사랑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 – 박혜진 편>
오은 : 벌써 『이제 그것을 보았어』가 증쇄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최근 두 권의 책이 거의 동시에 나왔죠. 엔딩노트 『이제 그것을 보았어』와 비평집 『언더스토리』인데요.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는 이런 작업을 하는 게 쉽지만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기분이셨어요?
박혜진 : 『이제 그것을 보았어』는 원래 계약이 되어 있던 책이에요. 실은 원고를 더 빨리 드렸어야 했는데 늦어진 거죠. 『언더스토리』는 낼 생각이 크지는 않은 책이었어요. 비평가가 비평가로 활동하는 거지 꼭 책이 필요한가, 이런 생각이 있었는데요. 우연히 어떤 책을 읽다가 '언더스토리'라는 개념을 알게 됐어요. 그걸 보고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긴 거죠. 그동안 썼던 글을 언더스토리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준비를 했는데요. 일단 두 권이라 물리적으로 힘들었어요. 책이 원고를 넘긴다고 해서 끝나지 않잖아요. 만드는 과정에서 더 써야 되는 글도 생기고, 정리도 해야 하고, 이런 게 다 두 배니까요. 물리적으로 좀 버겁기는 했어요.
오은 :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언더스토리가 무슨 뜻이죠?
박혜진 : '언더스토리'는 산림학 용어인데요. 숲에는 상층부도 있고, 중간층도 있죠. 상층부가 숲의 지붕 부분이고, 여기를 '오버스토리'라고 해요. 키가 크니까 이 부분이 빛을 훨씬 더 많이 빨아들일 수밖에 없죠. 한편 상대적으로 빛을 적게 받는 식생들로 구성돼 있는 층을 언더스토리라고 하는데요. 그 안에서도 빛이 부족한 식물들이 영양을 얻기 위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해요. 그 관계들에 대한 내용을 읽었는데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그것이 최근 몇 년 동안 제가 비평가가 되고 나서 주목해 읽었던 많은 작품들의 형식과 비슷했고요. 지금 우리의 가치관과도 잘 연결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삶의 방식으로도 비유해서 읽게 되더라고요.
오은 : <오은의 옹기종기>에 출연하셨을 때, 박혜진 작가님 소개를 해드린 적이 있죠. 책을 중심으로 살아온 박혜진 작가님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그 소개를 들어봐주시고요. 오늘은 간략하게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출판사 민음사에서 문학 편집자로 일하며 『82년생 김지영』, 『딸에 대하여』, 『한국이 싫어서』 등의 책을 편집했다.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서 「없는 얼굴로 돌아보라」가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2018년 젊은평론가상, 2022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편집은 영원의 다리를 놓는 일, 평론은 내가 세계의 허기와 싸우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편집과 평론에 대한 명문을 남기셨어요.(웃음) 여기에 대해 더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박혜진 : 책 속에 묻혀 살다 보면 시간성이라는 게 단위가 좀 달라지잖아요. 사람은 오래 살아야 백 년 조금 더 살겠지만요. 책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훨씬 이전의 사람들이 많고, 그들의 생각을 지금도 주고받아요. 저는 그 시간들은 거의 불멸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불멸에 가까운 체험을 책으로 하는 것 같아요. 물론, 그 생각에 몰입해서 늘 책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요. 그런 생각을 하면 편집자로서 책을 만드는 일에 대해 좀 더 큰 꿈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또, 저는 평론을 예전부터 좋아했었는데요. 아마 책이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평론적 글쓰기에 매력을 느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어떤 작품에 대한 글이고, 멋있는 글들 되게 많잖아요.(웃음) 예를 들어 오은 시인의 시가 있을 때, 시만으로도 이 세계는 충분할 수 있지만, 그 시가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해 쓴 글에서 발생하는 의미도 중요한 것 같아요. 흔히 중요하다고 하는 것들을 다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들이 있는데요. 허기를 채우는 것은 그런 의미들에서 나오는 것 같고요. 그것을 저는 비평적 글들에서 많이 배웠어요.
오은 : 이제 작가님께서 직접 『이제 그것을 보았어』가 어떤 책인지 소개해 주시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책이죠?
박혜진 : 매력적인 엔딩을 갖고 있는 책, 그림 혹은 영화 52편의 이야기를 모은 에세이예요. 서평 에세이인데요. 어떤 한 권의 책을 다 읽으면, 그 작가가 만들어낸 엔딩이라는 것이 대체로 어찌되었든 희망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돼요. 한편으로 저는 한 작가가 뭔가를 쓸 때 거기에 대한 어떤 확신이 있어야 그렇게 쓸 수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다면 마지막에서 나오는 이 희망의 뉘앙스들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까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작가가 만들어낸 52편의 희망은 우리가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도 될 근거일 것 같아요. 『이제 그것을 보았어』는 그런 희망의 스펙트럼을 진짜 믿어도 된다고 말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은 : 이제 '불꽂문' 코너로 가져온 문장을 얘기해볼게요. 한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의 완결된 끝을 많이 갖고 있어야 예기치 않은 어떤 끝 같은 상황이 왔을 때 그걸 잘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겠더라고요. 끝에서 그냥 이게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건 추상적으로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삶의 한 국면 국면에서 그걸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마지막에 대한 예행 연습을 계속하는 거죠. 관계에서도 잘못 끝나면 어떨까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었는데, 겁이 없어졌어요. 끝이란 원하는 대로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것도 만들어낸 개념일 수 있어요. 다시 일어나 걸어가면, 끝은 끝이 아닌 거죠."
끝을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면 허망하다는 생각도 들잖아요. 그런데 문학, 영화 등의 서사물은 작가님의 말마따나 예행 연습을 시켜주는 것 같아요. 이런 결말도 있다, 이런 끝도 있다, 는 걸 보여주면서 말이죠. 저는 이걸 '맷집'이라고 표현하거든요. 맷집이 좀 생기는 것 같은 거죠. 작품을 읽을 때마다 앞을 알 수 없다는 데서, 완벽한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서 저 단어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 같은데요. 결국, 우리는 평생을 연습생 신분으로 살아야 될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작가님 생각은 어떤가요?
박혜진 : 살면서 여러 일들이 벌어지고 상처도 받죠. 그럴 때 기댈 수 있는 게 대단치 않은 것 같아요. 이미 그것들을 경험한, 한 구간을 넘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 같거든요. 누구의 말도 귀에 안 들어올 때 있잖아요. 그럴 때는 누군가의 글이 눈에 들어오죠. 또 제가 『두 번째 산』이라는 책을 되게 재밌게 읽었어요. 사람은 두 번 산을 오르는데요. 첫 번째 산은 얻으면서 올라가는 산이라는 거죠. 이름이나 명성 없이 해야 될 것들을 성취하면서 오르는 게 첫 번째 산인데요. 그러다 보면 반드시 무슨 일이 생긴대요. 그때부터 다시 올라야 되는 산은 잃어버리면서 오르는 산인 거고요. 이게 이렇게 보면 조금 평범한 얘기 같지만요. 그것을 어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또 다시 새롭게 전달해 주는 것이 저는 문학 같아요.
오은 : 이제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책읽아웃> 청취자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을 소개해 주세요.
박혜진 : 앨리스미스의 『가을』을 추천하고 싶어요. 가을, 겨울, 봄, 여름, 이렇게 네 권으로 구성된 시리즈예요. 곧 사계가 완간될 예정인데요. 이 시리즈는 브렉시트 이후 영국 사회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벽화처럼 그린 소설이에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나오고, 그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나오는데요. 가을부터 시작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부터 시작되는 거예요.(웃음) 그 감각도 재미있는데요. 가을이 되면서 사람이 죽거든요. 근데 누가 죽는지 아세요? 예술가예요. 아주 상징적이었던 것 같아요. 기존의 가치들이 다 무너지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재건해 나가는가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무겁지 않고, 힙한 측면들도 있거든요. 추천합니다.
*박혜진 198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1년부터 출판사 민음사에서 문학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없는 얼굴로 돌아보라」가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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