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작은 소원이 하나 있었다. 수영장이나 바다가 있는 여행지에서 물 냄새를 실컷 느껴보는 것. 하지만 수영을 배워본 적 없는 나는 휴양지에 가면 고작 한두 시간 튜브를 타고 둥둥 떠 있다가 다음 일정을 소화했다. 워낙 운동을 좋아하는 이미지라(내가요?!) 수영을 배운 적이 없다고 하면 주변 지인들은 다들 놀랐다. 항상 배워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시간이 절로 날 리가 없었다. 퇴근 후에 발레와 골프만으로도 빼곡한 스케줄이었는데 수영할 짬이 있을 리가.
그러다 우연치 않게 두 개의 사건이 생겼다. 먼저 회사에서의 업무가 바뀌게 되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업무 앞에서 새삼 작아져 갔다. 거기에 갑작스레 발도 아파오는 것이 아닌가. 발레를 배운 지도 거의 6년, 덕분에 발 여기저기가 성한 곳이 없었다. 정형외과에서는 되도록 발레를 쉬길 권고했다. 예전이었다면 충격파를 지져가면서도 토슈즈를 신었겠지만, 갑작스레 쉬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발레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자기반성도 해가면서.
느닷없이 비어버린 주 4회의 발레 일정. 시간으로 계산하면 총 10시간이었다. 무엇을 채울지 고민하다가 동네 체육 센터의 전단지를 보게 되었다. 내 눈에 쏙 들어온 건 '수영 프로그램'이라는 단어. 여름이 다 지나가고 바람이 제법 차가워진 9월에 만난 수영. 체육 센터 안내 데스크에서 나는 '3+1'이라는 숫자에 눈이 멀어 수영 기초반 4개월을 대책 없이 결제해 버렸다.
2022년 9월 초, 처음 간 수영장은 낯설었다. 더군다나 입구 앞에서부터 어딘가 싸하고 눅눅한 냄새가 났다. 회원 카드와 탈의실 캐비닛 열쇠를 맞바꾸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 수영장이 펼쳐져 있었다. 선생님들의 호루라기 소리, 그리고 고함, 물속에서 나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순식간에 내 귀를 잠식했다.
탈의와 샤워를 마치고 직접 마주한 수영장의 모습은 더 푸르렀다. 특히, 상급반에서 진행하는 접영 릴레이는 튀는 물방울들과 함께 나의 마음을 쿵쾅거리게 하기 충분했다. 호루라기 소리를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을 따라 준비 운동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입수. 쭈뼛쭈뼛 주위를 괜스레 번갈아 보면서 초급반 레인에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자 선생님이 물어 왔다.
"어디까지 배웠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수영 처음 배워요."
그 길로 나는 코너로 끌려가 호흡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수영의 기본 호흡 방법은 흔히들 '음파'라고 부른다. 선생님이 몇 번 시범을 보여주시고는 나에게 해보라고 했다. 워낙 쉽게 하셔서, 당연히 나도 잘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영을 처음 배우는 거라 긴장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나는 그날에서야 34년 만에 처음 알았다. 머리를 수영장 물에 반도 집어넣지 못하는 물 공포증이 내게 있다는걸. 수경 너머로 넘실거리는 물이 암흑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몇 번 음파를 하는 걸 보더니 선생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 쫄았어요? 다 천천히 하면 돼. 유리 씨만 포기 안 하면, 수영은 어차피 다 하게 되어 있어요."
선생님은 으레 하는 말이었겠지만, 그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나만 포기 안 하면, 다 할 수 있다.'
일단 나는 선생님 말대로 하나씩 천천히 해나가기로 결정했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호흡과 발차기만 열심히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선생님이 다가오더니 허리에 헬퍼를 채웠다. 그리고 킥판을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팔을 쭉 펴고, 힘은 손끝에만 살짝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선생님이 물에 떠 있는 나를 쭉 미셨다.
그렇게 나는 인생 처음 물을 가로지른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문자 그대로 '가로지른다'는 읽거나 쓰는 것이 아니라 몸에 각인되는 단어였다. 그 찰나의 감각을 정말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그리 물을 무서워했으면서, 그 단 한순간 만에. 감동을 부여잡고 겨우 반환점을 돌아온 나에게 선생님이 물었다.
"아직도 물이 무서워요? 어차피 (수영은) 자기와의 싸움이니까 남들 속도 신경 쓰지 말고, 포기하지만 마요."
매주 월수금 기계적으로 수영장을 나갔다. 1달쯤 지나서일까. 선생님이 왜 그 말을 했는지 몸소 터득할 수 있었다. 정말 수영은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물을 무서워하는, 미처 34년간 몰랐던 나와의 싸움. 그걸 이긴 건 결국, 실패였다. 평소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는 나였기에 일부러 더 실패했다. 물속에서 억지로 호흡을 참아 보기도 하고, 뒤로 풍덩 빠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물이 어차피 내 몸을 밀어낸다는 걸 인지하자 자연스레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물이 무서워 돌아가고 싶다가도, 잘 뜨기 위해 좀 더 머리를 숙여본다. 그제야 물이 숨겨놓았던 풍경들이 보인다. 나의 어설픈 발차기로 생긴 물장구, 그리고 타일 바닥과 내 손바닥으로 만들어 낸 물방울들의 터치를 하나씩 느껴간다. 내가 어떻게 발등으로 물을 누르고 있는지, 물은 또 내 발등을 어떻게 밀어내는지 알아간다. 아주 조금씩 내 몸들이 물에 닿고 있다는 걸 배워나간다. 육지에 있을 땐,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감각을 수영장에 와서야 하나 둘 깨우칠 수 있었다.
오늘도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물과 만난다. 킥판을 잡고 발차기를 하면서 몸을 풀고, 맨몸으로 어설프게나마 양팔을 이용해 앞으로 나아가본다. 새로운 취미 수영이 내게 가져다 풍경은 오늘도 기초반 맨 뒷줄에서 시작된다. '기초반 맨 뒷줄', 그곳이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의 이름이다. 부디 내년 봄까지 내가 나와의 싸움에서 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 내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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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리(도서마케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