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는 한 명의 독자를 위해 쓰는 글이다. 편지를 받으면 마음이 달뜨고, 다시 보지 않을 걸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건 그래서다. 나만 생각하고 글을 쓴 시간이 편지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연희동의 한 오래된 건물 4층에는 오직 편지를 쓰기 위해 존재하는 가게 '글월'이 있다. 이곳에 온 손님들은 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글월을 운영하며 매일 그 모습을 지켜본 문주희 작가는 책에 이렇게 썼다. '사람의 몸은 진실한 마음을 꺼낼 때 등이 굽어지도록 설계된 게 아닐까 상상하게 되지요.'(18쪽) 등을 굽혀 마음을 꺼내는 사람들에게서 배운 이야기가 『편지 쓰는 법』에 담겼다.
편지 쓰기를 준비하는 사람
편집자님이 편지 가게를 찾아와서 출간 제의를 하셨다고요.
맞아요. 처음에는 손님인 줄 알았는데 다른 손님들이 다 결제를 하고 나간 뒤에도 계속 가게에 남아 계시더라고요(웃음). 그러다가 조심스레 오셔서 명함과 함께 책 두 권을 보여주셨어요. 루이스 캐럴의 『편지 쓰기에 관한 여덟아홉 가지 조언』과 사이먼 가필드의 『투 더 레터 TO THE LETTER』였죠. 평소 유유출판사를 너무 좋아해서 깜짝 놀랐는데요. 책을 써보자는 제안이 기쁘면서도 무서웠어요.
잘 쓰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요?
저는 사람들이 편지 쓰는 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사람이잖아요. 편지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니고요. '편지 쓰는 법'이라는 책이라고 하니, 편지의 정수를 써내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이 들더라고요.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글월의 매력이 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이 책을 출간한 모습을 상상하니 그건 또 못참겠더라고요(웃음). 결국 고민 끝에 하겠다고 했어요.
프롤로그에서 '거창하게 쓰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라는 문장이 눈에 띄었어요.
편지 가게에 오시는 손님 앞에서는 저절로 겸손해져요. 손님들은 정말 편지를 쓰는 사람이니까요 글월에 재방문하시는 분들은 "편지지를 다 써서 왔어요"라는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많거든요. 제 기억으로는 굉장히 많은 양의 편지지를 사가셨는데 벌써 편지를 그만큼 보냈다는 말을 들으면, 나와 시간을 다르게 쓰는 사람이라는 게 확연히 느껴지죠. 손님들이 읽는 책이라고 생각하니까 책의 방향이 잡히더라고요. 내가 만난 수많은 손님들, 글월을 운영하며 알게 된 것들을 써보자 싶었어요.
스마트폰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게 당연한 시대에 편지 가게라니, 신선했어요. 어떻게 시작한 일인가요?
잡지 에디터로 일하면서 누군가를 만나 인터뷰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퇴사 후 진로를 고민하다가 인터뷰를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이 공간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얻은 곳이었어요. 저는 인터뷰가 편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거든요. 그날의 분위기, 날씨, 인터뷰이의 표정 같은 것들을 상상하며 글을 쓰게 되니까요. 그 경험에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사람들을 인터뷰한 뒤, 그날의 이야기를 편지글로 정리해 보내주는 서비스였죠. 편지는 사실 인터뷰를 위한 콘셉트였어요.
그 공간에 알음알음 사람들이 찾아오며 편지 가게가 되었군요.
공간을 채우고, 인터뷰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만든 편지지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였거든요. 사실 글월은 손님들이 만들어 준 셈이에요. 처음 공간을 꾸밀 때만 해도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어요(웃음).
현재 글월은 연희동과 성수동에 1,2호점이 자리하고 있어요. 두 곳을 찾는 손님들이 한 달 평균 1800여 명이라고요. 손편지가 드문 시대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글월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편지를 잘 안 쓰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제품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구상할 때 기준선이 높은 편이에요. 내가 편지 쓰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매력적인 제품과 공간을 만들자고 생각하거든요. 글월을 만든 초창기에는 혼자 일을 했기 때문에 이 콘셉트를 더 뾰족하게 만들 수 있었어요. 편지를 안 쓰는 사람도 편지를 쓰고 싶도록 예민하게 다듬은 결과물을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손편지를 잘 쓰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에 편지 가게를 흥미롭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오래된 편지 상자를 열어보세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내용이 많았어요. 수취인의 주소를 쓰는 기준선에 따라 우편 요금이 달라지고, 우체국이 아닌 곳에서도 우표를 판매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요.
우체국에 자주 가니까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돼요. 우체국 창구에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고요. 수취인 주소에 기준점이 있다는 건 몇 년 전, 손님들에게 연하장을 보내러 우체국에 갔다 알게 된 사실이에요. 받는 사람의 주소를 오른쪽 아래에 적어야 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기준선보다 5미리미터 앞에 주소를 써서 장당 120원을 더 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기재란을 벗어나면 기계 처리가 어렵기 때문이죠. 사실 1-2통의 편지를 보냈다면, 같은 일을 겪고도 기억하지 못했을 텐데요. 저는 보내는 편지의 양이 많으니 우편 비용이 껑충 뛰더라고요(웃음). 글월을 운영하며 겪은 황당한 일화 중 하나죠.
온라인 편지에 관한 내용도 인상적이었어요. 요즘은 이메일을 쓸 때도 '무미건조한 메일을 쓰지 않도록 경계(146쪽)'한다고요.
이메일에 대한 이야기는 편집자님께서 제안해 주셨어요. 사실 처음에는 동의를 하기가 어려웠죠. 저는 그동안 손으로 써야 진정한 편지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업무적으로 메일을 쓰긴 하지만, 용건만 간단하게 사무적으로 쓰는 편이어서 더 와닿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편집자님의 말씀을 듣고 메일함을 열어보니 편지처럼 주고받았던 기록들이 꽤 많더라고요. 외국에 사는 친구에게 안부를 물을 때도 그렇고, 업무상 주고받은 메일인데도 유난히 다정한 것들이 있었어요. 편집자님 덕분에 이메일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편지를 가장 많이 쓸 때는 아마 학창 시절일 텐데요. 작가님의 학창 시절은 어땠어요?
질보단 양이었던 것 같아요. 많이 쓰고, 많이 받았죠. 친구와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를 골랐던 기억도 나고요. 사실 이 책을 쓰면서 어릴 때 받은 편지들을 다시 꺼내봤는데요. 인용할 문장이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나는 네가 좋아. 우리 같이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자' 등의 이야기가 전부였거든요. 그래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득 쌓인 수많은 편지들을 보면서 '나는 친구들과 잘 지내는 사람이었구나. 내 학창 시절은 안온했구나'라는 걸 알았거든요.
'편지 안의 문장들은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해서 때때로 내가 누군인지,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치는지 보여 줍니다(135쪽)'라는 문장을 읽고 지나간 편지를 다시 꺼내봤어요. 그 편지를 받았을 당시에는 몰랐던 내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맞아요. 편지 안에는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러 문장들이 적혀 있죠. 독자 분들이 이 책을 읽고 과거에 받았던 편지를 다시 꺼내보게 된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글월에는 익명으로 편지를 써서 두고, 다른 손님이 놓고 간 편지를 가져가는 펜팔 서비스가 있죠. 한 손님은 인간관계에 지칠 때마다 여기서 받은 편지를 읽어본다고 했어요. 작가님도 자주 열어보게 되는 편지가 있나요?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친구가 생일 때 써준 편지예요. 사람은 누구나 좋은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 있잖아요. 그 편지에도 저의 약하면서도 강하고, 좋으면서도 짜증나는 면들이 두루두루 적혀있죠. 저에 대해 마냥 좋다고 쓴 것보다 '네가 이럴 땐 좀 별로인데, 이럴 땐 너무 좋아'라는 내용이 참 마음에 들더라고요.
다른 하나는 남편이 써 준 편지예요. 제가 남편에게 아쉬운 마음을 담은 편지를 먼저 썼고, 남편이 답장을 준 건데요. 거기에도 이런 점은 고쳤으면 좋겠다는 등의 말들이 담겨 있어요. 동의할 순 없지만(웃음) 남편을 이해하고, 같이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 자주 꺼내 봐요. 저는 MBTI로 말하면 'F'가 쓴 편지보다 'T'가 쓴 편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쓴 편지요.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거기에 쓰여 있는 나의 장점들을 정말 신뢰하게 되더라고요.
책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나요?
'내가 이 일에 정말 진심이구나' 싶었어요. 편지에 관해 논리적으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불가능했거든요. 편지 쓰기를 이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어렵다는 걸 알고, 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다시 생각했죠. 반면, 편지 가게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어요. 저는 그동안 편지가 대중적인 콘텐츠라고 세뇌하며 글월을 운영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고된 일이고, 소수를 겨냥하고 있더라고요. 그걸 인정하는 경험이기도 했어요.
편지를 동시대의 문화로
작가님은 주로 언제 편지를 쓰세요?
확실한 목적이 있을 때만 쓰는 것 같아요. 친구의 생일이거나,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 등이요. 사실 편지 가게를 운영한다고 하면 제가 편지를 많이 쓸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오히려 많이 받아요. 지인들이 편지를 쓸 때 자연스럽게 저를 떠올려주는 것 같아요.
글월은 단순히 편지지만 사는 가게가 아니라 편지를 쓰고 갈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어떤 손님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딱 한 번 오셨던 분인데요. 연희동 근처에 오셨다가 편지 가게가 있다는 말에 우연히 들른 손님이었어요. 결혼기념일이라서 아내에게 편지 한 통 쓰러 왔다고 하시고는 30~40분가량 앉아서 편지를 쓰고 가셨어요. 저는 그 모습이 참 좋았어요. 글월에 올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게 아닌데, 우연히 편지 가게가 있다는 걸 알고 '편지나 한 통 써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공간이 됐다는 뜻이니까요. 글월을 꾸리면서 내내 그런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 준비가 맞아떨어진 순간이었어요.
앞으로 글월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싶은가요?
편지 쓰기를 동시대의 문화로 만드는 게 목표예요. 아날로그 시대의 편지를 답습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편지를 쓰는 일을 재미있게 만드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편지가 쓰고 싶고, 읽고 싶게 만드는 것들을 좇으면서 글월을 만들어갈 생각이에요. 또, 앞서 말한 손님처럼 우연히 지나가다가 편지를 쓰러 올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길을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글월이 스며들고 싶어요.
만약 독자에게 편지를 쓴다면, 꼭 넣고 싶은 문장이 있을까요?
추신. 혹시 이 책을 읽고 보관했던 편지함을 열어봤다면 저는 성공입니다!(웃음)
*문주희 편지 가게 '글월' 디렉터.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어 얼마간은 에디터로 일했고, 지금은 글월에서 제품을 만들고 편지 쓰기를 위한 서비스를 기획하고 편지 가게라는 독특한 공간을 찾아온 손님들을 응대하며 일하고 있다. 요즘 시대에 맞는 편지 문화와 쓰는 이들을 위한 데스크웨어를 기획하는 사람으로 사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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