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폴란드, 벨라루스, 라트비아, 카자흐스탄, 몰타, 튀르키예, 러시아, 영국, 미국...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세계 여성들의 일상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우크라이나 난민 '밀라'는 러시아군이 고향에서 고작 2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진격해왔을 때, 근무 중 휴식 시간에 커피를 마시는 일조차 매우 싫어졌다고 털어놓았다. 내일을 알 수 없다는 초조함과 커피의 평온함이 가져오는 극명한 대조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에서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삶을 꾸려가는 변호사 지망생 '밀라' 외에도, 난민이 된 전 리듬체조 국가대표, 러시아의 타깃 리스트에 오른 전장의 저격수,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급히 탈출한 직장인, 생판 모르는 난민에게 집을 제공한 싱어송라이터, 독재에 맞서다가 고향을 떠난 반전 시위자, 러시아 문학을 경계하는 유명 작가, 조국 러시아에 맞서 반전 시위를 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등, 전쟁의 비극 앞에 선 여성들의 고통, 슬픔, 의지, 용기, 연대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에 실린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인상에 매우 깊게 남은 경험이 있었나요?
정말 많습니다. 한번은 리스트 아트 페어에서 러시아 갤러리가 전시회 부스를 우크라이나 갤러리에 양보하고 물러났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러한 공감과 연대에 감명을 받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갤러리를 만나기 위해 스위스 바젤까지 날아갔습니다만, 이야기를 나눠본 뒤 연대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이때 전쟁 피해자에게는 공감이나 연대라는 말도 매우 조심스럽게 써야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는 전쟁에 반대하며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 피해자들을 응원한다"라는 말만으로 연대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특히, 그 말을 가해자 측에서 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을 연대로, 좋은 사례로 짐작해서 바젤로 날아간 스스로를 반성했어요. 전쟁은 깊은 상처를 남기며, 그 상처는 미사여구로 봉합되지 않습니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처음에 인터뷰 제안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권위주의 체제에 오래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를 꺼립니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나 벨라루스에 비해서는 덜했지만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더욱이 현재 그들은 전쟁을 겪고 난민이라는 처지에 빠져 있습니다. 인터뷰를 제안하는 것도 미안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인터뷰 성사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다들 침묵해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모든 인터뷰 대상자가 성심성의껏 답변해주었어요.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에 현재 전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저격수 '올레나'의 인터뷰가 포함되어 많은 놀라움을 주고 있습니다. 독자님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저격수를 인터뷰하실 수 있었는지 성사 과정을 궁금해하실 것 같아요.
먼저 영어나 러시아어로 쓰인 우크라이나 여성 군인에 대한 기사들을 읽어봤습니다. 그리고 군인 열 명 정도에게 SNS 메시지를 보내 연락을 해보았어요. SNS 친구가 아닌 경우에는 메시지 도달율이 높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답신이 올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네 명과 접촉이 되어 대화를 주고받지요. 우크라이나 군인은 러시아어를 절대로 쓰려고 하지 않았어요. 한 번의 통역과 번역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인터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중 가장 인내심을 갖고 자신의 주장을 차근차근 펼쳐준 사람이 저격수 '올레나'였어요. 올레나는 저격수여서 그런지 침착하고 끈기가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정확히 전달되도록 신경을 많이 썼어요.
넉넉하지 않은 형편인데도 난민 나타샤에게 기꺼이 자기 집을 내준 싱글맘 '아만다'의 이야기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난민에게 집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평범한 영국 가정이 20만 가구나 되었다는 점도 매우 놀라웠고요. 험난한 세상에 아만다처럼 타인을 도우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크라이나 전쟁에 분노하는 사람이 많고 전쟁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사람이 놀랍도록 많아요. 이것은 감정과 이성이 조화를 이룬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하지요. 영국의 경우에는, 그 사회의 문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해요. 영국에서 시작된 단체 '스카우트'에서는 지금도 많은 학생이 활동하고 있지요. 스카우트에서 가르치는 정신은 '친절하라', '남을 도와라', '항상 남을 도울 준비를 하고 있어라'입니다. 그런 정신적 기반 위에서 공감이라는 감정과 현실 인식이라는 이성이 함께 작동한 듯합니다.
마리우폴에 사는 가족을 걱정하는 다리야와 언니의 결혼식만 보고 다시 우크라이나로 돌아간 동생 알렉산드라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과 슬픔을 안겨줍니다. 다리야의 가족은 잘 지내고 있을까요?
다리야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다리야에게는 아버지와 동생만 있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은 현재 우크라이나 서부에 머물고 있어요. 비교적 안전한 곳이지만, 가끔씩 여전히 경보가 울린다고 해요. 다리야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폴란드에서 행해진 다리야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다리야 아버지와 동생은 결혼식만 보고 이틀만에 다시 우크라이나로 돌아갔어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왜 그렇게 빨리 돌아가야 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 부분도 우리가 전쟁의 처절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여행을 하면서 쉴 마음이 아니었겠지요. 한편, 동생은 대학을 가야 하는데 언니처럼 폴란드 대학에 갈까 생각하고 있지만 아버지를 두고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두 분이 매우 적절한 질문들을 던진 덕분에, 질문에 공감한 인터뷰 대상자분들이 매우 진솔하게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들려주었습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과 인터뷰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인식과 달랐던 답변도 있나요?
우리의 '우문(愚問)'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대상자분들이 '현답(賢答)'을 해주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인식의 차이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17세 학생에게 한 질문이 가장 부끄럽고, 그 대답은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습니다. 그 학생에게 "왜 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았느냐?"라고 물었어요. 학생은 "떠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답하더군요. 우리 마음속에는 그 파괴된 곳을 떠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는 인식이 있었던 거예요.
이 인터뷰집을 어떤 분들이 읽어주었으면 하시나요?
국제 정치를 현실주의적 시각으로만 보는 분들이 꼭 읽어주었으면 해요. 그분들이 생각하는 현실이란 옛날 현실입니다. 그분들은 '감정적이 되지 말고 이성적이 되라, 당위를 보지 말고 현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분들이 말하는 이성과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습니다. 그 모순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윤영호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오랫동안 증권과 자산운용업에 종사했다. 현재 영국 런던에서 지내며 글을 쓰고 있다. *윤지영 KOICA(한국국제협력단) 봉사단원으로 카메룬에서 활동했고,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사 인디컴, 다음커뮤니케이션, IBM 코리아에서 근무했다. 미국, 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과 소통하며 살았다. 현재 영국 런던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글을 쓰고 있다. |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