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림 시인이 두번째 시집을 펴냈다. 9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써내려간 시 가운데 44편을 선별해 묶은 『여름 키코』는 기존에 시인이 축조한 욕망과 감각, 이국(異國)과 이종(異種)의 시 세계를 인상적으로 펼쳐 보이는 동시에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변해'(「스웨터 침엽수림」)가는 것임을 알리듯 시인이 지나온 시간을, 변해온 궤적을 가늠해보게끔 한다. 주하림의 여성 화자들은 이번 시집에 이르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촉을 관망하는 대신 '엉터리 천국은 나도 만들겠'(「몽유병자들의 무르가murga」)노라 외치며 새로운 계절을 그려 보인다.
첫번째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이후 구 년 만에 신작 시집을 출간하셨는데요, 소감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시를 쓴다고 말해도 제 시를 자세히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제 시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으리란 절망 속에 십 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럼에도 어떤 날은 제 시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들에게서 메시지를 받거나 인터넷에서 다음 시집을 기다리고 있다는 글을 보기도 했어요. 시집을 묶으면서 제 시를 기다려주신 분들을 떠올렸고 용기를 내어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두번째 시집 『여름 키코』는 제목에서부터 첫번째 시집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해요. 이번 시집에서 첫번째 시집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사실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조금 더 제 색깔이 분명해지고 뚜렷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첫번째 시집에서는 무국적, 연극적 소재를 활용해 어둡고 이질적인 세계를 그렸어요. 존재의 충동이나 욕망을 인터뷰, 편지, 대화 형식 등으로 끌어와 표현하고자 했고요. 이번 시집에서는 조금 더 미니멀한 방식으로 그 안의 정서들을 확장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나이가 든 탓인지 화자들의 광기 어린, 폭주하는 목소리가 첫번째 시집에서보다는 조금 조용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첫번째 시집이 분열적인 화자의 목소리로 가득했다면 이번에는 그 목소리들을 통일하는 데 집중했어요. 그러면서 시적 에너지가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는 장면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산뜻한 빛깔의 표지 뒷면에는 아이스크림이 새겨져 있어요. 제목뿐만 아니라 시어들도 많이 부드럽고 밝아진 듯하고요. 지난 시간 동안 시 외적으로도 변화가 있었을까요?
시를 쓰기 시작하고 십 년 동안은, 특히 등단 이후 몇 년간은 정말 악몽과 같았어요. 나를 온전히 지키고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죠. 시가 어렵다는 이유로 독자에게 외면받은 적도 있었고, 문단에서는 시 외적인 측면에서 평가받는 일이 잦았어요. 지치고 괴로웠죠. 그럴수록 제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지금까지 써온 것들을 뛰어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득했죠. 그 파토스가 제 이십대를 갉아먹었습니다. 지금은 쓰는 것보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더 신경쓰고 있어요. 이제는 데카르트보다 데드리프트에 더 가까워졌어요.(웃음)
이번 시집에는 여름에 관한 이야기가 무척 많아요. 작가님에게 있어 여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제게는 이 질문이 제일 어렵네요.(웃음)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여름의 의미가 시집에 거의 다 담겨 있어서요. 사실 저는 여름 외의 계절은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제 시에는 여름에 대한 예찬보다는 기괴한 여름 풍광이 더 많이 등장해요.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고 의미하는지,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어렴풋이 따라가다보면 제 시에 더 빠지실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모쪼록 제 시를 읽은 분들이 어떤 여름을 마주하게 됐을 때 '아, 주하림의 시에서 봤던 여름이 이런 거였나?' 하고 생각해주신다면 좋을 것 같아요.
주하림 시 세계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국적 정취를 꼽아볼 수 있을 듯해요. 이번 시집에서도 다양한 지명이 등장하는데요. 시적 배경으로 이국(異國)을 택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첫 시집을 묶을 때까지만 해도 해외에 간 적이 없었어요. 20대 내내 프랑스 문학과 영화, 미술 작품, 일본 만화에 파묻혀 있을 정도로 이국의 문화를 좋아했지만 용기가 없었죠. 오히려 그 갈망이 상상력으로 발현된 것 같아요. 어떻게 낯설고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을까, 내가 외국 영화나 책에서 받은 충격을 내 작품을 통해서도 줄 수 있을까 고민했죠.
첫 시집을 내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국을 떠나볼 용기가 생겼어요. 한국에서는 늘 같은 패턴이 반복되잖아요. 외국으로 떠나면 바로 그 고리가 끊어질 것 같았죠. 다시 태어난다는 느낌을 좋아하는데, 이국적인 배경들이 저에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여름 키코』 이후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작가로서의 삶이랄까요? 그런 것은 진즉 잊고 한동안 다른 일을 하며 살았는데, 어쩐지 요새는 작가로서 가장 바쁘고 성실하게 살고 있어요. 북토크도 두 번이나 예정되어 있어요.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고 관심도 가져주셔서 이번에는 전처럼 포기하지 않고 활동할 생각이에요. 개인적으로 SNS를 하진 않지만 이번 시집을 내고선 어쩐지 반응을 샅샅이 찾아서 훔쳐보고 있습니다.(웃음)
예전에 어디에선가 첫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 될 거라고 했었는데, 전 거짓말쟁이입니다. 세번째 시집과 더불어 산문집도 준비하고 있어요. 시에는 아무래도 장치가 많아 숨을 수 있는 장소가 많은데, 산문집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부담도 있지만 그래도 즐겁게 해보려고요.
마지막으로, 『여름 키코』를 읽을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주세요.
너무 오랜만에 시집을 내게 되어 저를 잊으신 분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를 잊으셨대도 상관없어요. 저는 새로운 모습으로 여러분을 만나러 왔으니까요. 저는 절망이라고도 부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곳에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는 행복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절망이 두려운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희망을 말하는 시인은 아니에요. 세상이 살 만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아요. 독자들에게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고 싶지도 않아요. 다만, 살 만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문학은 누구에게나 하는 따스한 위로가 아니라 상처받은 인간이 문득 마주친 섬광이라고 생각해요.
*주하림 전북 군산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제9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 지은 책으로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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