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
『순수의 시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가능한 한 길게, 어지간하면 혼자서. 내가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이다. 프리랜서 생활을 오래 해서 인지 요런 방식이 몸에 착 붙어버렸나 보다. 혼자라 편하긴 한데, 아쉬운 점도 여럿이다. 뭐니 뭐니 해도 시간이 남아돈다는 게 문제다. 도에 지나치게, 때론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남아돈다. 이럴 때 책이 없었다면 어휴, 대체 뭘 하면서 이 둥둥 뜬 시간을 순순히 보낼 수 있을까?
새삼 전자책과 이북 리더(북쪽에 계신 그분 아닙니다)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기계 자체로는 뭐 그저 그렇다.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부실하다. 액정은 약하고, 느려 터졌고, 화면 잔 상도 꽤 심하다. 하지만 화면 크기에 비해 무게가 가볍고, 실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을 쏙 집어넣을 수 있다. 와이파이만 연결하면 어디에서든 책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그전까진 매번 이 무거운 책을 대체 몇 권이나 챙겨 가야 여행하는 동안 충분히 읽을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었다. 소중한 내 머리숱... 지켜줘서 고마워요, 리더 님.
그럼 여행 중엔 어떤 책을 읽는 게 좋을까? 그야 목적지에 따라, 여행 기간에 따라, 내 마음과 몸의 컨디션에 따라 수없이 많은 선택지가 존재하겠다. 이에 대해선 몇 달 전 출간한 따끈하고 바삭한 책 『이렇게 오랫동안 못 갈 줄 몰랐습니다』에서 이미 신나게 떠든 관계로, 저자(접니다)의 동의를 얻어 이 지면에 일부 옮겨본다.
뭐니 뭐니 해도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없는 책은 집이든 여행지에서든 읽기 싫다. 아마 수감 중이어도 그럴 것 같다(겪어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심각하게 재미있는 책은 또 그 나름대로 곤란한데, 왜냐고요? 도에 지나치게 재미있는 나머지, 읽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지기 때문이다. 후루룩 뚝딱 한 권이 끝나버린다. 여행 초반에 가져간 책을 다 읽어버리면 큰일이다. 남은 시간은 뭘 하라고! 게다가 책 내용에 몰두하느라 여행이고 나발이고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 라는 것은, 그러니까 재미는 재미대로 있으면서 읽는 속도는 너무 빠르지 않을 만한 책이 좋겠네요. 그런데 그런 책이 과연 있을까요! 우담바라가 필 때나 한 권씩 깨작깨작 출간되겠지!
종이책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지만, 전자책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너무 흥미진진하고, 스릴 넘치며,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책은 독서 가속도가 심하게 붙어버린다. 내용에 과하게 빠지는 것도 문제다. 실제로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요 네스뵈의 무시무시한 스릴러 소설로 인해 여행을 홀랑 말아먹은 적이 있다. 책은 죄가 없다.(정말입니다, 재미있었어요) 그렇지만 숙소의 큼직한 옷장이 갑자기 의심스러워지고, 침대 아래에 뭐가 있을 것만 같아서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흑흑... 요즘은 이미 읽은 책 중에서 고르곤 한다. 결말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더 느긋하고 나른하게 문장을 오물거리며 즐거워할 수 있어서다.
지난 5월 말 태국 방콕 여행에선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를 한 줄 한 줄 오물거렸다. 1870 년대의 뉴욕. 마음속에 있는 얘길 요리조리 빙빙 돌려 말해야 우아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 받아들여지던 시대의 이야기다. 사교계란 골 아프고 복잡스럽다. 알아도 모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잠깐의 눈짓과 어깻짓으로 백 마디 말을 대신하며 화합하거나 대립한다. 이미 20여 년 전에 읽은 책이지만 종종 다시 펼쳐보는데, 희한하게도 매번 다른 책처럼 새롭다. 의뭉스럽고 얄밉던 인물이 갑자기 짠해 보이거나, 낭만적이고 멋지던 인물이 세상 대책 없고 무책임한 작자로 거듭나기도 한다. 책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해 가는 것이다. 방콕의 숙소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나갔다.
마지막 (전자책) 페이지를 덮은 후엔 안드레 애치먼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읽기 시작했다. 『순수의 시대』 못잖게 느릿하게 머뭇대는 리듬의 문장들. 속을 내보이길 주저하면서 속을 알아달라는 조용한 절규로 가득한 책. 역시 이미 여러 차례 읽은 책이라 오히려 더 집중해서 문장을 핥아나갔다. 같은 영화도 수차례 거듭해서 보면 매번 새로운 게 보인다. 음악도 음식도 그림도 책도 그렇다. 만약 시간이 더 있었다면 어떤 책을 이어서 펼쳤을까? 아마도 헨리 제임스나 가즈오 이시구로, 이언 매큐언... 이라고 쓰다 보니 뭔가 소나무 같은 취향이네요.
3년 만에 찾은 방콕에선 열흘간 아주 느긋하게 호사를 부렸다. 시간을 함부로 넉넉히 써버리는 것만큼 얄밉게 사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하루에도 서너 곳의 카페를 순례하고, 매일같이 마사지를 받았다. 꽃시장에서 계절의 생화를 골라 한가득 품에 안고 숙소로 돌아와 화병에 소담하게 담고 감상했다. 여행의 호흡과 책의 호흡이 잘 맞았다. 어쩌면 이 두 권의 책 때문에 더 느릿해 졌는지도 모르겠다. 날씨도 한몫 거들었고. 5월과 6월은 방콕의 혹서기라 평소 같았으면 굳이 이 시기를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잖아요, 3년이나 참았다고요. 덥든 말든, 비가 오든 말든 다 받아들이겠어!
그렇게 오랜만에 찾아온 방콕은 역시나 숨막히게 덥고, 습하고, 조용했다. 짜뚜짝 주말 시장도 커다란 쇼핑몰도 야시장도 마사지 숍도 도에 지나치게 한가했다. 하지만 안타깝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이 아름답고 거대한 도시는 잠시 움츠렸던 것이고, 곧 다시 바쁘게 북적일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텔레비전에선 오랜만에 돌아오는 여행자들을 친절히 맞이하자는 관광청의 캠페인이 연신 플레이되었다. 남의 나라 캠페인에 내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우습지만, 그래도 좋네. 그래, 이제 시작이구나. 반가웠어요, 3년 만의 방콕. 곧 또 찾아올게.
*신예희 세계를 여행하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여행지 카페에서 커피와 단것을 먹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 『이렇게 오랫동안 못 갈 줄 몰랐습니다』를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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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