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로 시작하는 글을 읽었다.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되는 배수아의 에세이였고, 그것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야기는 글쓴이가 묵는 베를린 서재를 제외하고도 다른 서재 두 곳을 지닌 사람으로 흘러간다. 운명과 우연에 따라 여행가방에 책을 넣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서재를 재배치하는 사람. 그가 움직일 때마다 서재들 또한 미세한 달라짐을 겪는 것이다.
이 글은 나의 오랜 꿈인 서재라는 공간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질서정연하게 정리된 서재보다는, 겉보기에는 무질서하지만 주인의 취향에 따라 미묘한 질서를 갖고 있는 공간. 물론 서재의 책들이 모두 주인을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책을 읽히지 않아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어야 하며, 누군가 서재에서 책을 뒤적이다 몇 권을 가져가도 괜찮을 정도로 무심함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몇 권의 책과 오래된 장식품들은 바닥에 함부로 쌓여 있어야 하고. 나는 맨발로 마룻바닥을 밟으며, 책들을 꺼내보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살면서 몇 번 인상적인 서재들과 마주쳤다. 하나는 강릉의 호수 근처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그 낯선 공간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곧바로 많은 양의 책들과 마주했다.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고, 오래전 살던 익숙한 집에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밀려왔다. 그때는 마음이 여러 번 내려앉아 치유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최종 면접에 몇 차례나 떨어졌고, 만나던 사람과 헤어졌다. 그 허무함을 그 곳의 책들이 채워 주었다. 낮이면 해변에 나가 산책을 했고, 밤이면 술을 마시며 방의 주인이 남긴 메모와 밑줄을 뒤늦게 발견하며 하루를 보냈다.
또 다른 서재는 부다페스트에 있다. 20대 내내 카우치서핑을 하며 여행을 다녔는데, 여러 도시를 거쳐 마지막 행선지 부다페스트에서 나는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볕이 뜨거운 부다페스트의 여름. 버스는 덜컹거리며 마을 깊숙이 들어갔고 여행객들이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정거장에서 내렸다. 뜨거운 열기에 신발 바닥이 달구어지고, 더 이상 걸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순간 호스트의 집에 나왔다. 고고학을 공부하고 동화를 쓰는 올가와 엔리히의 집.
작은 정원으로 들어가자 열린 문 사이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햇빛이 가득한 방에서 엔리히가 눈을 감고 꿈꾸듯이 말을 하고 있었고, 타이피스트가 그 말을 받아 컴퓨터로 옮기고 있었다. 올가가 나타나 그는 소설을 쓰고 있다고, 언제부터인가 직접 쓰지 않고 말로 소설을 완성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집의 서재로 들어갔다. 카펫이 깔린 방, 한편이 모두 책으로 채워져 있고, 높은 층고에 닿을 수 있도록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나는 말했다. ‘와, 정말 제가 꿈꾸던 서재예요.’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에야 그 사실을 떠올린 듯이.
그 방들에 대한 세부적인 기억은 많이 잊어버렸다. 그저 흐릿한 인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현실의 나는 서울에서 책으로만 가득한 방을 가져본 적이 없고, 심지어 방을 옮길 때마다 수많은 책들을 버렸다. 언젠가 읽겠노라고 약속한 책들과,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건네받은 책들. 당시에는 마음이 많이 쓰렸지만.
지금은 어딘가에서 그 책들이 다가오고 있을 것이라고, 다른 형태로 변해 내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걸 알아볼 것이라고. 옛 서재들을 떠올리듯이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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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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