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과학자들』은 인류 최초로 블랙홀 촬영에 성공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도입부에서는 블랙홀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어떤 과학자들의 연구를 거쳤는지, 지금까지 밝혀낸 것은 무엇인지 등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블랙홀 촬영 과정 외에도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 풍성하다. 먼저 각 장 끝에 실린 ‘블랙홀 추적 일기’는 블랙홀의 구조부터 EHT 프로젝트 연구진 소개, 세계 각지의 전파망원경 소개까지 흥미를 북돋아 주는 내용이 가득하다. 원서에는 없는, 한국판에 더해진 특별한 내용도 있다. 본문 앞에 실린 부록 ‘블랙홀 연구의 역사’에서는 과거에 과학자들이 블랙홀의 존재를 추측하고, 발견하고, 연구하기까지의 전체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돕는다.
EHT 프로젝트에는 300명이 넘는 글로벌 연구진이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전 지구적인 과학 프로젝트가 과거에도 있었나요?
게놈 프로젝트, CERN 입자 가속기, 라이고/버고 중력파 관측, 페르미 감마선 우주망원경 등 최고의 과학 프로젝트는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 선택이 아닌 필수로 글로벌 협력을 합니다. 이들 연구의 대표 논문은 저자 목록이 논문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하죠. 글로벌 인력과 자원을 함께 활용해야만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고, 우주와 자연 그리고 생명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 지평선 망원경과 같은 초장거리 전파간섭계 천문학에서는 다른 과학 분야보다 글로벌 협력이 일찍 시작되었고 이제는 일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망원경을 연결할수록 천체를 더 세밀하게 관측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나라, 여러 대륙에 걸친 협력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성공적인 협력을 위해 숨김없는 정보 공유와 자유로운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협력의 전통 덕분에 EHT의 성공적 관측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EHT 프로젝트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셰퍼드 돌먼 박사와는 프로젝트 이전에도 인연이 있으셨나요? 박사님께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첫 대면은 2003년 4월 애리조나 투싼에서의 시험 관측 때입니다. 그때 저는 독일 막스플랑크 전파천문학 연구소의 박사후연구원으로 사건 지평선 망원경의 가능성을 테스트하는 실험에 참여했고, 돌먼 박사님은 미국 측 과제책임자였어요. 2019년 EHT가 관측에 성공한 1.3밀리미터 파장으로 미국과 유럽의 망원경을 동원해서 최초로 하드디스크에 내용을 기록한 실험이었죠. 그전까지는 릴테이프에 기록했었거든요.
제가 속한 팀은 투싼 남서부의 킷픽산 망원경을 맡았고, 돌먼 박사님은 투싼 북동부에 있는 그레이엄산 망원경에서 전체 실험을 지휘하고 있었어요. 테스트 초기에 천체가 보이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킷픽 망원경의 엔지니어가 편광필터를 거꾸로 달아놓고 퇴근한 것을 확인하고 돌먼 박사에게 급하게 연락을 했습니다.
돌먼 박사님은 단숨에 차를 몰고 그레이엄산을 내려와 킷픽산 정상까지 달려오셨어요. 구글 지도에서 찾아보니 32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였고, 반쯤은 구불구불한 산길입니다. 문제는 이미 해결했지만,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거죠. 당시 돌먼 박사의 그 열정적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팀의 EHT에 참여는 한국천문연구원이 운영 중인 한국우주전파관측망이 2010년대부터 보인 성과와 능력을 인정받았고, 무엇보다 2010년경부터 동아시아 초장거리 전파간섭계 협력에 한국이 앞장서서 성과를 거둔 결과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EHT 협력을 주도하던 대만과 일본 연구자들의 추천과 권유가 직접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특별히 어렵거나 힘들었던 점이 있으셨나요?
인류 최초의 블랙홀 영상 촬영과 같이 역사에 남을 연구 참여는 과학자에게 큰 행운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렵고 힘든 순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물론 어떤 도전적인 연구나 프로젝트에는 반드시 어렵고 힘든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관측의 성공을 위해 지구 여러 곳에 있는 전파망원경이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대로 정확히 동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고 그 과정이 쉬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준비를 다 해놓아도 날씨가 나빠서 배정받은 시간에 관측을 못 하거나 험한 곳에 있는 망원경에 간 관측자들이 관측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거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모든 관측을 취소해야 하는 등 사람이 노력한다고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만나면 모두 힘이 빠지고 실망하게 되죠.
2017년 첫 관측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후 매년 봄마다 하기로 계획했던 사건 지평선 망원경 관측 역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제와서 보면 2017년 첫 관측이 성공한 데에는 특별한 행운이 함께 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관측과 분석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후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천문학자, 특히 여러 나라의 전파망원경을 함께 사용해야 하는 ‘초장거리 전파간섭계 천문학자’는 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교류가 몸에 베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 300여 명이 사상 처음 블랙홀 영상을 얻었다는 사실을 한동안 철저히 함구해야 했는데, 통제에 익숙하지 않은 자유분방한 사람들이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놀랍게도 보안이 잘 지켜졌습니다. 발표를 기다리며 다른 천문학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관측 실패를 발표한다더라”, “다른 천체의 결과를 발표한다더라” 등 미소를 짓게 하는 내용이었고, 비밀이 잘 지켜졌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EHT 프로젝트의 목적과 의의는 무엇인가요?
EHT 협력단의 공식적인 설명을 빌려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사건 지평선 망원경 정도의 성능으로 블랙홀을 관측하는 것은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의 오랜 목표입니다. 이 관측은 블랙홀 근처에서 발생하는 강한 중력 효과를 보여주는 영상을 제공하고, 물질이 빛의 속도로 빠르게 블랙홀 주변을 공전하며 발생하는 물리적 현상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건 지평선 망원경의 성능은 아주 강한 중력장인 블랙홀 가까이에서의 물질 부착과 방출 과정, 사건 지평선의 실존 등 블랙홀 물리학의 근본적 문제와 일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EHT의 블랙홀 관측 성공으로 블랙홀 연구는 이론과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제 블랙홀과 그 주변을 직접 관찰하여 연구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2022년 2월 22일, 한국천문연구원이 참여한 국제공동연구팀이 우리은하의 중심에 위치하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초거대질량 블랙홀 궁수자리 A*을 촬영하고 그 구조가 원형임을 밝혔습니다. 박사님께서는 한국 과제책임자로 참여하셨는데요,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한국우주전파관측망 완공 후 한국과 일본의 천문학자들은 한국과 일본의 망원경 7기를 연결해 우수한 성능의 전파간섭계를 구성할 가능성을 보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핵심 연구 주제를 개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연구 주제의 하나로 초거대질량 블랙홀이 선정되었고 우리은하 중심 블랙홀과 M87 블랙홀을 주 대상으로 선정했습니다. 이 한일 공동 프로젝트는 이후 중국이 참여하면서 동아시아 공동 프로젝트로 확대되었습니다.
궁수자리 A* 블랙홀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초거대질량 블랙홀이기 때문에 블랙홀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데 최적의 대상입니다. 동아시아 VLBI 관측망은 동아시아의 망원경을 사용하고 EHT보다 긴 파장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은하 중심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 주변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블랙홀이 만들어 낸 구조와 현상은 더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EHT가 몸속을 투시해서 보는 CT라면, 이번 동아시아 VLBI 관측망의 관측은 얼굴, 신체 등 겉모습을 본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궁수자리 A* 블랙홀 관측의 또 다른 난관은 우리은하 중심 방향의 가스 구름에 의한 빛의 산란입니다. 이것은 관측을 어렵게 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신의 산란 모델 연구 결과를 동아시아 VLBI 관측망 결과에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궁수자리 A* 블랙홀의 구조가 원형에 가까움을 확인했습니다. 우리은하 중심 블랙홀이 내는 빛의 대부분은 블랙홀에 달라붙어 있는 원반 모양의 부착흐름에서 발생합니다. 이번 결과는 이 원반의 면이 지구를 향해 있음을 뜻합니다. 이 정보는 앞으로 EHT의 우리은하 중심 블랙홀 관측 영상 분석에 중요하게 활용될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 천문학의 주요 과제와 한국 천문학이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세계 천문학과 한국 천문학으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은 세계 천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죠. 이 역할을 더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선 존재는 알려졌으나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이해하는 일이 가장 큰 과제입니다. 이들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우주의 운명 역시 이들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이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는 우주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생겨나는지를 이해하고, 지구 바깥에서 생명의 징후를 찾는 것, 그리고 나아가서 인간 외의 지적 생명체가 우주에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블랙홀 연구에서는 우선 호킹 복사를 내며 증발하는 블랙홀을 찾는 일이 있습니다. 우주 탄생 초기에 생긴 작은 블랙홀들이 있다면 마지막 순간에 강렬히 호킹 복사를 내며 사라질 텐데 아직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발견한다면 우주 탄생 초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입니다. 초거대질량 블랙홀의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초거대질량 블랙홀은 그 주변은 물론 은하단과 같이 거대한 영역에 강력한 물질과 빛을 방출하며 성장하기 때문에 은하와 우주 거대 구조, 생명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짐작되는데 아직 확인된 바가 많지 않습니다.
또한, 초거대질량 블랙홀은 별질량 블랙홀이 중간질량 블랙홀 단계를 거쳐 성장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중간질량 블랙홀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들이 질량을 급격히 불려가는 과정을 찾아 이해하는 것도 큰 과제입니다.
천문학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요? 천문학자를 꿈꾸는 청소년에게는 어떤 준비과정이 필요한지 말씀해 주세요.
축구선수에게 기초체력과 주력이 필요하듯이, 천문학자는 기본 도구인 수학과 물리학 실력을 잘 갖추어야 합니다. 연구와 개발의 많은 부분이 국제협력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외국어 능력도 잘 갖출수록 좋은데, 언어 그 자체보다는 공감 능력과 함께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포용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도 갖추면 좋은데, 프로그램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잘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해요. 질보다는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한 것 같네요.
천문학은 다른 과학 분야와 달리 실험보다는 관찰이 연구의 핵심이 됩니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객관적이고 정확히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일이죠. 데이터만 아니라 동료에게도 정직하게 대하는 것은 연구자뿐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자질이겠죠. 천문학이 좋아서 시작하더라도 수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때로는 하기 싫은, 맡기 싫은 업무와 역할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마음가짐 그리고 끈기 있게 목표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재능’은 천문학과 같이 연구 기회 자체가 보상인 기초과학 연구자에게는 특히 필요한 자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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