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인류 문명과 가장 닮은 술이다. 인류가 아직 두 발로 걷기 전부터 지구 어딘가에서는 와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인류에 의해 ‘발견’된 와인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오래 ‘숙성’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포도에서 와인으로』는 최고의 와인 스쿨 WSET 디플로마를 수료한 한국인 저자가, 인류 문명사에 기록된 와인의 흔적을 따라간 기록이다. 태곳적부터 노아의 시대를 거쳐 철학과 종교의 시대를 지나, 인간의 시대, 과학의 시대, 그리고 취향과 인공지능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포도가 영글어 와인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한 권에 빚어냈다.
지금까지 와인의 세계사와 관련해 출간된 책들은 대부분 서양의 이야기만을 한정적으로 풀어내는 데에 그쳤다. 언뜻 당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와인이 ‘서양만의 술’일까? 이 책은 ‘와인의 발상지’인 ‘중동’을 포함해 ‘중국, 일본, 한국’에 이르는 ‘진정한 와인의 세계사’를 담고 있다.
먼저 작가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포도에서 와인으로』를 썼으니, 와인 전문가이자 역사광이라고 말씀드릴게요. WSET라는 와인 스쿨에서 디플로마를 수료했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불어를, 대학 때는 경영학을 공부했어요. 대학 때부터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연극과 미술도 취미로 오래 공부했어요. 외국계 컨설팅 회사, 미술 경매 회사, 패션 잡지사 등에서도 짧게 일을 했습니다. 와인은 ‘학문적’으로 10년째 공부하고 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고 흥미로워하는 분야는 ‘역사’입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또 어떤 주제든 간에 역사 이야기에 가장 매료됩니다. 현재는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9년째 살고 있어요.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면 한국에 자주 왕래하며 활동하려고 해요.
프로필을 보면 여러 일을 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와인’에 꽂히게 된 계기가 있나요?
처음엔 와인의 ‘맛’과 ‘향’에 끌렸어요. 어렸을 때부터 미각과 후각에 굉장히 민감했어요. 어렸을 때 맡았던 누군가의 향수 냄새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와인은 제게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각·후각적 유희였어요. 포도로 빚은 술에 온갖 과일과 이름도 모르는 수십 가지 꽃과 풀 내음이, 흙과 돌멩이, 바다와 숲속의 맛과 향이 어떻게 담겨 있는지…. 이런 맛과 향을 보다 섬세하게 구별하고 싶어서 처음에는 취미로 와인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할수록 더 완벽하게 와인을 맛보겠다는 욕심이 생겨 자연스럽게 디플로마 과정까지 마쳤어요.
디플로마 과정을 공부하면서는 와인의 ‘공간성’에 매료되었습니다. 와인은 포도라는 농작물로 만들죠. ‘테루아르(terroir)’라는 개념인데요, 포도가 자란 기후와 토양에 따라 와인의 맛과 향이 완전히 달라져요. 그때부터 지리학, 지질학, 농업학 등에 완전히 푹 빠져 살았어요. 세계지도를 책상 전체에 넓게 펴놓고, 자다가도 와인을 생각하다 세계지도를 찾아볼 정도였죠. 와인은 저를 계속해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선으로 이끌었어요.
‘WSET 디플로마’, 아마 처음 듣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디플로마가 무엇인지, 그리고 디플로마가 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WSET는 세계적인 와인 스쿨입니다. 총 4단계의 과정이 있고, 제일 마지막 과정이 디플로마라는 자격 과정이에요. 저처럼 디플로마에 합격한 사람은 MW(마스터 오브 와인)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집니다. 현재 한국인 디플로마는 제가 합격했을 때에 비해 조금은 더 많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몇 명 없었어요. 과정이 굉장히 고된 데다 방대한 내용을 상당히 빡빡한 시간 내에 소화해야 해요. 그러다 보니 중간에 포기하는 학생 비율이 높기로 유명한 과정이죠.
또 공부하기 위해 영국, 홍콩, 미국 등으로 나가야 해요. 모든 과정이 영어로만 진행된다는 점에서 한국인에게 불리하기도 해요. 디플로마가 되었다고 해서 커리어가 보장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싱가포르와 홍콩의 경우 WSET 디플로마라면 F&B(식음료) 업계에선 취직이 안 될 일은 없어요. 보통 와인 수출입 업체, 와인 교육, 와인 심사, 저널리즘 분야 등에서 커리어를 쌓을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와이너리를 방문하든 WSET 디플로마라고 하면 굉장히 우대해주죠. 친밀감과 유대감을 쌓을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장점이 있어요.
『포도에서 와인으로』는 한마디로 ‘와인 세계사’라 할 수 있을 듯해요. 어떤 책인지, 그리고 독자들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포도에서 와인으로』는 와인 세계사, 내지는 와인으로 보는 문명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 와인의 ‘공간성’을 언급했는데, 디플로마 공부가 끝난 뒤 저는 와인의 ‘시간성’에 매료되었어요. 와인은 여타 술이나 음료와 다르게 ‘빈티지(생산년도)’가 표기돼요. 빈티지는 와인의 시간성이란 특징을 보여주는 독특한 요소랍니다. 얼마 전 1967년산 와인을 마셨는데요, 시간여행을 할 수 있지 않는 한 우리가 1967년에 만들어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와인은 그게 가능해요. 와인은 요컨대 한국에 최근에 갑자기 나타나 인기를 끄는 기호식품이 아니에요. ‘포도에서 와인으로’ 옮겨가는 역사가 있어요.
와인은 고대 동굴에서 우연히 포도가 발효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원시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세 시대 시토회와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의 동굴 속 와인과 연결되어 있고, 신성로마제국 샤를마뉴의 포도밭 와인을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마시며 연결되어 있어요. 아비뇽 유수 기간 교황이 만들기 시작한 와인을 현재 우리가 마시고 있지요. 그뿐인가요, 중국 당 태종은 손수 포도주를 빚었고, 위나라 초대 황제이자 조조의 아들 조비는 포도주의 정수를 꿰뚫어 기록에 남길 만큼 포도주를 즐겼습니다. 책을 통해 와인의 역사성과 시간성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또한 와인을 마실 때 훌륭한 ‘마리아주(조합)’가 될 재미있고 풍부한 ‘스토리’를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와인의 역사, 와인의 문명사를 다룬 책이 간혹 있었습니다. 대부분 번역서인데 이 책은 한국인 저자가 쓴 책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책들과의 차별점이 있을까요?
와인의 역사는 말하자면 ‘서양사’죠. 역사를 좋아하는 유럽인이 쓴 서양사를 읽다 보면 어떤 사건이나 과정을 설명할 때 한국인 혹은 동양인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이나 의문이 많았어요. 『포도에서 와인으로』를 쓰면서 저는 동양인 또 한국인으로서 평소 품고 있던 질문을 많이 드러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와인의 역사를 중국 고대부터 살펴본 점도 새로운 시도일 거예요. 중국의 와인 역사를 조사하면서는 너무 재미있어 밤잠을 설칠 정도로 중국 사료에 푹 빠져 있었어요. 또 일본과 중동 지역의 와인 역사도 살펴보았다는 점, 무엇보다 한국 와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해 진정성 있게 살펴보려 한 점 등이 이 책의 차별점이 될 수 있겠습니다.
말씀하셨듯 ‘한국 와인’에 대해서도 책에 언급하셨습니다. 한국에서도 ‘와인’이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라 ‘일상의 음료’가 된 듯해요. 한국 와인은 세계적으로 어떤 수준인가요? 그리고 한국 와인의 미래를 전망하신다면?
와인은 더 이상 서양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지금껏 와인은 ‘서양의 역사와 미식 문화’ 속에서 이야기되어왔고 평가받아왔죠. 하지만 세계 와인 시장의 생산과 소비 모두에서 동아시아의 ‘파워’는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와인의 맛 또한 이젠 ‘동양의 미식 문화’라는 맥락 안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죠. 그런 의미에서 한국 와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과 격려도 필요하고, 한국 음식과 와인 페어링을 한국인의 입맛으로 평가해보는 다양한 시도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의 청수 포도로 만든 와인의 경우 세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특히 한류(K-wave) 문화가 놀랄 만큼 인기를 끌면서 국제 와인 허브라 할 수 있는 홍콩에서도 한국의 미식 문화와 술, 와인에 대한 관심까지 높아지는 추세이지요.
『포도에서 와인으로』는 작가님의 첫 책입니다. 혹시 앞으로 두 번째 책을 쓰실 계획이나, 와인과 관련한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기본적으로 전 책을 쓰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물론 힘든 과정도 많지만, 고통스러우면서도 몰입되고 즐거운 경험이랄까요? 현재 <모니카의 와인셀러>라는 유튜브를 운영하며 영상도 만들고 있고,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면 대면 강의나 강연 등의 자리에서 계속해서 ‘와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책을 쓰는 일’은 멈추지 않을 예정이에요. 지금은 기행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한 국가와 지역의 역사와 와인과 미식 문화를 중심으로 한 기행문이에요. 언제 세상에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게 저의 두 번째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먼저 『포도에서 와인으로』를 많은 독자들이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석인 와인을 ‘학문적으로’ 공부한 지 어느덧 10년이 됐다. 그러는 동안 한국에 몇 안 되는 WSET 디플로마가 되었다. 대학에선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전공과 무관하게 희곡, 연극, 미술, 역사, 천체학, 종교 등에 푹 빠졌다. 홍콩과 싱가포르에 살면서 접한 와인&다이닝 문화도 좋아한다. 글 쓰고, 말하고, SNS 하는 것도 좋아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호기심은 나를 셀 수 없이 많은 다양한 분야로 이끌었다. 관심사가 너무 많아 와인이란 한 우물만 10년을 팔 위인이 아닌데, 한결같이 너그럽게 날 받아준 와인은 내 삶의 단단한 일부가 되었다. 와인과 관련한 주제라면, 영원히 멈추지 않을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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