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너희는 전부 『호밀밭의 파수꾼』에 푹 빠져들 거라고 장담했다. 내용을 가늠할 수 없는 적갈색 표지가 신비함을 더해주었다. 나는 샐린저의 답답하고 두서없는 글에 푹 빠져들기를 기다리다가 결국엔 짜증이 치밀었다. 홀든 콜필드는 노인처럼 욕을 해대고, 돈을 물 쓰듯 하고, 택시로 사방을 돌아다니는 사립고등학교 부잣집 도련님에 불과했다. 그는 특권 의식에 젖은 못된 놈이고 그가 “가식적”이라고 부르는 동급생들만큼이나 안하무인이었다. 그러나 그 특권 의식보다도, 나는 홀든이 어린 시절에 집착하는 것이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어린 시절이 가능하면 빨리 끝나기를 원했다.”
_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마이너 필링스』, 102쪽
진지한 표정으로 『마이너 필링스』를 읽다가, 위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니! 미국 도서관 최다 대출을 기록한 베스트셀러에다 전세계에 ‘콜필드 신드롬’을 일으킨 그 책이요? 캐시 박 홍은 ‘순수한 어린 시절’에 푹 절여진 고전 『호밀밭의 파수꾼』이 자신에게는 너무도 짜증나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한다. 특권을 지닌 백인 주인공은 자신을 순수함의 세계에 놓고 싶어하지만, 아시아인 여성이자 다른 계급 정체성을 지닌 자신에게는 퇴행적으로만 보일 뿐이었다고.
그러게, 어린시절을 순수했던 시기로 회고하는 건 어떻게 보면 기묘한 일이다. 사회의 억압과 차별은 어떤 시기에도 있었을 것이고, 아이에게 그 무게는 더 크게 느껴질 테니 말이다. 캐시 박 홍은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지 않고 항상 옆으로 곁눈질했다”고 말한다. 안락함을 갖춘 듯 보이는 백인 친구의 집을 부러워하면서, 왜 자신은 그것을 갖지 못하는지 속을 갉아먹으면서.
내 어린시절은 어땠을까?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나에게도 ‘나만 알고 싶은 홀든 콜필드’ 시절이 있었다. 끝없이 욕을 늘어놓는 백인 꼬맹이에 짜증을 내기는커녕, 뭘 좀 아는 애라고 생각했다. 그가 헤매는 센트럴 파크는 나에게 너무 먼 곳이었기에 아름다워 보였고, 겨우 내 나이 정도 된 듯한 아이가 혼자 택시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 멋져 보였다. 백인으로 둘러싸인 교실에서 그 고전을 과잉된 감정으로 읽어야 했던 캐시 박 홍에 비해, 그 소설은 나에게 교실 밖에 있는 먼 곳의 이야기쯤으로 비쳤던 것이다.
한 교실에 있는 아이들을 줄세우고, 성적에 따라 대우가 달라졌던 시절이 좋았을 리 없다. 모든 것이 억압이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은 맞지 않는 옷에 억지로 나를 구겨넣는 날들이었다. 좋았던 기억도 많지만, 그 시절만큼은 미화하고 싶지 않다. 아무도 싫어하는 것에는 욕을 해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경쟁에서 이탈해도 된다고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없는 ‘순수성’을 홀든 콜필드에 기꺼이 외주 주었다.
어쩌면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교육경쟁에 지친 전형적인 K-고등학생의 마음으로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홀든 콜필드의 세계’에 마음을 기댈 수 없음을 느끼면서, 나의 어린시절을 곁눈질한다. “다 너를 위해서야, 네가 잘 사는 길이야”라고 말했던 어른들에게 말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그래도 그때 너희는 순수했고, 열심히 살았다고 말하는 어른들에게, 우리에게는 결코 좋은 어린시절 따위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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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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