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이 세계화되면서 송캠프를 주최하는 기획사가 늘어나고 해외 작곡가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변화된 시스템에 의해 앨범을 이끄는 프로듀서의 존재감이 희미해진 가운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내 작곡진들이 있다. 모노트리(MonoTree)는 그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프로듀싱 팀이다. 황현, 지하이, 이주형을 주축으로 시작한 작가(작곡/작사가) 회사는 많은 엔터테인먼트와 아이돌 팬들이 찾는 프로덕션으로 성장했다.
회사를 이끄는 황현은 샤이니의 '방백', 온앤오프의' 사랑하게 될 거야' 등 숨은 K팝 명곡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믿고 듣는 황현', '황토벤' 등으로 불리며 리스너들의 굳건한 지지를 받는 프로듀서를 지난 1월 모노트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상쾌함 속에서 감성을 자극하는 그의 음악처럼 황현은 진지한 태도로 음악 세계를 풀어놓으면서도 위트가 넘쳤다.
본인과 회사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작곡가 겸 프로듀서이자, 모노트리의 대표다. 모노트리는 작가들이 모인 프로덕션이자 저작권을 관리하는 퍼블리싱 회사다. 최근에는 옐로라는 아티스트를 필두로 뮤지션 제작도 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작가들이 모여 활동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회사의 설립 계기가 궁금하다.
도제식으로 작곡을 배웠고 혼자 일할 때는 비즈니스까지 스스로 했다. 음악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일본의 작가 사무소 경험과 영미권 소규모 프로덕션과의 교류에서 얻은 힌트로 회사를 세웠다. 목적은 후배 양성이다. 히트곡을 만든 선배들이 여러 문제로 몇 년 안에 역사의 뒤안길로 가는 모습을 보며 작가 보호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야 오랫동안 음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황현, 지하이, 이주형 작곡가 세 분이 함께 모노트리를 창립했다. 각자의 역할이 어떻게 되나.
막연하게 운영하다가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었다. 나는 전반적인 운영을 하고 이주형은 신인 작가를 발굴한다. 지하이는 해외 송캠프에 가거나 외국 작곡가가 국내 송캠프에 참여하는 등 영어가 필요한 일을 맡고, 해외 교류가 줄어든 지금은 저작권 협회와의 소통과 퍼블리싱을 담당하고 있다.
2014년 말 모노트리 설립 이후 어떤 점이 힘들었고, 어떤 점이 좋았을까.
우선 셋 다 회사 경험이 부족해서 법인 회사를 만드는 초반 과정이 힘들었다. 나만 MBTI(성격유형검사)가 J(판단형)라서 경리 업무를 담당했다. 세금계산서 같은 오피스 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느라 첫 6개월은 작업을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친한 동료들이 모여 시작할 때는 크루의 느낌이 컸기에 회사가 점차 모양새를 갖추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었다. 다들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고, 나도 작가들과 대화할 때 대표로서 말하는 건지 지인으로서 말하는 건지 헷갈리더라.
지금은 안정기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지.
아직 안정기는 아니다. 옐로를 제작하면서 기존에 없던 지출이 많이 생겼고 보험료가 오르는 문제도 있었다. 그렇지만 뮤지션의 제도권 편입화를 위해 우리 프로듀서들은 모두 4대 보험을 적용 중이다.
곡을 팔아서 돈을 벌자는 목표보다 시스템이 먼저였기 때문에 친한 동료가 모노트리를 레퍼런스 삼아 시스템을 구축할 때 가장 뿌듯하다. 내게 조언을 구하러 오면 가감 없이 답변하며 최대한 도와준다. 표준까진 아니더라도 괜찮은 본보기가 된 것 같다. 나는 데모 CD를 들고 발로 뛰며 회사들을 찾아다녔지만 요즘 신인 작가들은 제작사보다 우리 같은 프로덕션에 먼저 메일을 보내주니까. 보내오는 연락만큼 모노트리에 들어오길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니 감사할 따름이다.
기업의 대표이자 프로듀서, 작사, 방송 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모습을 비추는 황현이지만 결국 그 근간에는 음악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도 '황현 스타일'이 무엇인지 콕 집어 얘기하지 못한다. 만화 주제가 같은 감성적인 노래부터 전공을 살려 다양한 클래식 악기를 사용한 곡, 재즈, 라틴, 전자음악까지, 그 넓은 스펙트럼이 어디서 왔는지 가늠해 보았다.
어떤 계기로 음악을 좋아하고 업으로 삼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냥 한 느낌이다. (웃음) 외가 친척들이 모두 미술을 해서 음악보다는 미술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랐다. 나와는 맞지 않아서 다섯 살 즈음 피아노 학원으로 보내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본인 시간을 가지고 싶으셔서 그랬던 것 같다. 그 후로 계속 피아노를 치면서 칭찬을 받으니 '관종'의 끼가 생겼다. 또 그림은 반응이 미지근하지만 피아노는 잘 못 쳐도 환호를 많이 해주지 않나.
초등학교 6학년 때 메탈에 빠지면서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고 루나 씨, 엑스 재팬 등 일본 비주얼 록을 통해 아이돌 문화를 받아들였다.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시기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4년제 음대에 가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클래식 작곡을 지망했다. 그때도 대중음악을 하겠다는 마음은 없었고 군대를 다녀온 후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으로 진입했다.
그렇다면 대중음악으로 접어든 특별한 계기나 동기는 무엇인가.
특별한 계기라면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던 것이다. 19살에 상경하면서 만난 캐스커 이준오를 통해 일렉트로니카를 접했고 제대 후 컴퓨터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학교 3학년 무렵 영화 음악 작가 정재형의 어시스턴트를 하며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다. 거기서 전공을 살리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요 스트링 편곡이라든가 악보 작업이라든가. SG 워너비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스트링이 꼭 들어갔다. 이렇게 점차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때 클래식, 일렉트로니카 경험이 지금 프로듀싱의 자양분이 된 건지.
그런 것 같다. 모든 작곡가가 그렇듯이 나만의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코넬리우스나 사카모토 류이치같이 완전히 예술도, 대중음악도 아닌 것을 꿈꿨다. 돈도 벌어야 하고 빨리 이름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곡을 파는 쪽으로 궤도를 수정했지만. 지금은 아이돌 음악이 제일 재밌다.
작업물을 보면 라틴 음악도 좋아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개인적 선호, 둘째는 사람들이 잘 안 해서다. 중학교 1학년 때 음반 가게 형의 추천으로 스탄 게츠와 주앙 지우베르투의
다른 장르에도 관심이 있나.
주로 록을 듣다 보니 록 기반이지만 록이 아닌 음악을 만들려고 고민을 많이 한다. 그 결과 탄생한 곡이 레드벨벳의 'Day 1'이다. 시퀀싱을 첨예하게 찍어 페퍼톤스와 일본의 심벌즈라는 팀의 스타일을 입혔다. 최근 온앤오프가 부른 <연애혁명>의 OST '이별 노래가 아니야'에도 같은 방식을 접목했다.
최근 들은 곡 중에서 재미있던 곡이 있을까.
지금 생각나는 것은 위켄드의 'Out of time'이다. 1980년대 일본 시티팝을 통째로 샘플링해 구성한 탑라인이 마음에 들었다. 3년 전부터는 일본 밴드 오피셜히게 단디즘을 미친 듯이 좋아하고 있다. 내가 썼다고 착각할 정도로 맞춤양복 같은 음악을 하는 팀이다. 국내에서는 새소년의 'Joke!'나 적재의 <서로의 서로>, 아이돌 음악은 에스파의 'Next level'을 꼽고 싶다.
2008년 소녀시대의 '오빠 나빠'로 데뷔한 황현은 SM엔터테인먼트의 송캠프에 참여하던 때부터 마니아층을 형성했지만 그의 음악은 타이틀곡이 아닌 수록곡에 머물렀다. 그랬던 그가 모노트리의 이달의 소녀 프로듀싱에 이어, 홀로 WM엔터테인먼트의 보이그룹 온앤오프의 음악을 전담하며 전면에서 앨범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데뷔부터 함께한 온앤오프 프로듀싱을 중점으로 황현의 음악 세계를 속속들이 살폈다.
처음으로 전담 프로듀싱을 맡은 그룹 온앤오프에 황현의 특색이 많이 이식된 것 같다. 데뷔 때부터 전담한 계기가 궁금하다.
모노트리를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WM엔터테인먼트 이사에게 연락이 왔다. 오마이걸도 데뷔한 지 별로 안 됐을 때다. 당시 이달의 소녀 프로듀싱에 집중하고 있어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냥 한번 만나자고 해서 갔다. 그 자리에서 신인 그룹이었던 온앤오프의 전담 프로듀싱을 의뢰받았다. 앨범 전체를 도맡아서 프로듀싱해 본 경험이 없다고 해도 잘할 거라고 하더라. (웃음)
그때 덜컥 맡은 인연이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데뷔 초반에는 다른 남자 아이돌에게 데모를 주지 못할 정도로 집중했다. 솔직히 앨범 한두 장 정도 발매하면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장이나 엔터테인먼트 상황이 녹록지 않더라. 그러다 보니 오기가 생겨서 더 집중하게 됐다.
온앤오프를 프로듀싱하면서 구현하고자 한 음악 스타일이나 이미지가 있나.
팬들의 반응을 보면서 조금씩 바뀌지만 일단 나와 회사의 공통적인 의견은 '다른 그룹에게 어울리는 곡은 쓰지 말자'다. 다른 작가의 트랙을 가지고 수정을 해도 무조건 온앤오프의 색깔이라는 말이 나오게끔 팀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려고 했다. 대형 기획사보다 자본 규모가 작은 중소 기획사가 시장 상황을 이겨낼 방법은 그것뿐이라 생각했다.
그룹의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이나 멤버가 있을까.
곡마다 주인공이 다르고 매 앨범의 타이틀곡이 멤버들의 캐릭터를 가장 잘 드러내기에 답하기 어렵다. 타이틀곡 콘셉트가 연달아서 비슷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곡에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유추하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음악에 확실한 캐릭터성이 있어야 뮤직비디오부터 안무까지 박자가 맞는다. 조금이라도 이전과 비슷한 음악이 나오면 의상이나 화장 등도 비슷해지고 재미도 덜해진다.
온앤오프가 처음 반응이 왔던 곡이 '사랑하게 될 거야'였던 것 같다. 지금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 곡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가사가 온앤오프의 캐릭터를 크게 결정한다. 보통 남자 아이돌을 보면 멋있고 화려하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서사와 감성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화려하고 세면 해외 팬은 확실히 빨리 붙는다. 온앤오프는 서사와 감성에 포인트를 맞추다 보니 해외 팬을 빨리 모으지 못했지만 대신 탄탄한 국내 팬덤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특히 가사의 어떤 부분에 신경 썼나.
'사랑하게 될 거야'에서 주구장창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원래 그 말은 아껴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좋아한다' 쪽으로 간다. 혹여 쓰더라도 화자가 고민이 많은 편이라 3절에서야 등장한다. '사랑하게 될 거야'라는 가사 역시 상대방한테 하는 말이지만 독백일 수도 있지 않나.
두 번째 타이틀곡 'Complete'부터는 범용적인 관계를 위해 인칭대명사를 잘 쓰지 않는다. 꼭 필요할 때는 '그'라고 표현하거나 성별을 모호하게 쓰려고 한다. 연인 간의 사랑이 아니라 친구 간의 우정일 수도 있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등 넓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 온앤오프의 두 번째 앨범인가, 세 번째 앨범 최종 수정녹음 전에 가사지를 다 확인해서 바꾸기도 했다.
과거에는 앨범 작업만 맡으면 됐지만 요즘은 경연 프로그램이나 연말 시상식에 사용할 색다른 편곡까지 필요하다. 온앤오프 역시 <로드 투 킹덤> 출연으로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무 관객, 360도 스테이지라는 시각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었는데 그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웃음) 일단 온앤오프가 편곡적으로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형 기획사에서는 매번 다른 프로듀서에게 의뢰하지만 나는 멤버들이 어떻게 무대에 서는지 다 알기 때문에 잘 나왔다. 이 프로그램으로 온앤오프가 성공하지 못하면 나도 이 시간을 보상받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때 안무가와 소통하면서 배운 것도 많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내가 먼저 편곡하면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다 같이 들으며 의견을 냈다. 나는 음악만 해온 사람이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무대장치, 동선, 구간별 속도, 체력 안배 등 신경 쓸 부분이 많더라.
작년 온앤오프가 첫 정규앨범의 타이틀곡 'Beautiful beautiful'로 결실을 거뒀다. 멤버들이 방송에서 1위를 하며 황현 프로듀서를 언급했다.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을 때 심정이 어떤가.
일단 온앤오프의 작업물로 피드백이 올 때 가장 고양된다. 결국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나는 대국민 히트송이 있는 작곡가도 아니고 가수도 아닌데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비슷한 상황의 작곡가가 거의 없어서 감사하고 신기하지만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관심을 많이 받는 만큼 허투루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온앤오프 멤버들이 동반 입대했다. 그동안의 추억도 많고 걱정도 될 텐데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내게 친구 같은 사람들이다. 다섯 명이 한 번에 입대한 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와이엇과 엠케이는 더 늦게 갈 수 있었는데 멤버들끼리 합의해서 시기를 맞췄다. 함께 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전역 후 바로 컴백한다면 공백기가 길진 않다. 여름 스페셜 앨범 발매 후 번아웃이 왔을 때도 멤버들의 상황을 알다 보니 책임감을 갖고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 궁금하다.
내 인생을 참치에 비유한다. 부레가 없는 참다랑어과 물고기는 멈추면 죽어서 잘 때도 헤엄을 친다. 내 생활패턴도 그렇다. 계속 바쁘게 보내다가 12월 중순 온앤오프 단독 콘서트 이후 여유가 생겼다. 10년 만에 한가로운 연말이었다.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작업실에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불안하더라. 1월 초에도 할 일이 없었지만 괜히 불편한 마음에 아무도 시키지 않은 작업을 했다.
11~12월에 걸쳐 끝낸 일로는 2020년부터 참여한 부산음악창작소의 인디 뮤지션 싱글 프로젝트가 있다. 수연이라는 싱어송라이터인데 지하이가 선발하고 내가 프로듀싱했다. 경제적인 논리로 보면 맞지 않는 일이지만 인디 아티스트와의 작업이 재밌다. 앞으로는 온앤오프에 열중하느라 놓쳤던 회사 시스템들을 보완하려고 한다.
SM 송캠프 참여, 모노트리 설립, 이달의 소녀와 온앤오프 프로듀싱 등 길고 다양한 커리어 속에서 작곡가가 지켜오고 있는 신념이 궁금하다.
음악의 시대가 다시 오길 꿈꾸고 있다. 물론 꿈을 위해선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직업의식만 가지고 하면 금방 지친다. 음악을 오래 하려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 발전해야 한다.
모노트리의 대표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일까.
기존에 없던 형식의 프로덕션이 되길 바란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다 자본이 들어가는 일이라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 K팝의 굵직한 작가 회사가 된 모노트리를 프로덕션 위주의 팀으로 더 발전시키고 싶다. 우리나라는 한 회사에서 비주얼과 매니지먼트, 음악 제작까지 모두 담당하지만 해외는 분리된 경우가 많다. K팝을 선도하는 프로덕션 회사가 되면 재밌겠다. 가수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든 우리는 프로듀싱만 잘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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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윈터
2022.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