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정은 자주 튜닝이 필요하다. 조율이 덜 된 현악기 같다. 때때로 곤두박질친다. 아래로, 아래로, 더 아래로. 구덩이 속으로 추락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가 있다. 위로 솟구칠 때도 물론 있다. 그 솟구침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불안에 의한 각성으로, 지나치게 긴장돼 안절부절 못한다. 음정이 편안한 악기처럼, 언제나 일정한 감정의 파고(波高)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부럽다.
어릴 때부터 그런 징후가 있었기에, 나는 후천적이라기보다는 기질적으로 그런 사람일 거라 짐작한다. 그 때문에 평안한 사람들보다 모든 일에 몇 배의 에너지를 더 쓰고 자주 탈진하여 힘이 들지만, 그런 나를 싫어한 적은 없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자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신경은 약과 상담으로 다스린다. 우울증은 마음이 아니라 뇌의 문제이며, 의지로 해결할 수 없고 의사와 약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일찍 배웠다. ‘심리학 개론’ 수업을 통해서다.
S는 캠퍼스 저편에서 휘적휘적 걸어와 “C교수의 ‘심리학 개론’을 꼭 들으라.”고 했다. 중학교 동창인 그는 나와는 극과 극에 있는 것 같은 부류였다. 나는 인문대생이고, S는 공대생이었다. 나는 문학을 사랑했고 수학에는 젬병이었는데, S는 뛰어난 수학적 두뇌를 지녔고 고등학교 때까지 ‘소설은 거짓말인데 그걸 왜 읽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친했지만,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도 한 번도 같은 수업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S가 내게 교양 수업을 추천하다니! 들어야만 할까?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S가 말했다. “내가 족보 다 줄게! 그거 가지고 시험 보면 된다.” 아, 그럼 들어야지! 그리하여 나는 C교수의 ‘심리학 개론’ 수업을 듣게 되었다.
선생님은 첫 수업에서 “심리학 개론은 왜 어려운 과목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은 꼭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심리학 개론 수업이 인간의 행동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기회”라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살면서 인간에 대한 비과학적인 설명은 수없이 들어왔고, 앞으로도 들을 기회가 많을 거예요. 저는 이 강의가 여러분의 생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인간의 행동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은 왜 과학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왜 점술은 심리학이 될 수 없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과학은 진보하며, 인간에 대한 과학도 수없이 발전해 왔기 때문에 현대의 심리학은 과거의 심리학보다 당연히 우월한데, 점술이나 비과학적 심리학에서는 이런 발전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죠.”
이 말이 내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마음에 관한 일을 과학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과학이라고 하면 플라스크와 비커만 떠올리던 고등학생 수준의 사고에서 벗어나, 조금 더 확장된 시야로 과학의 속성을 다시 보게 된 계기였다.
근대적인 서양 학문은 ‘나’라는 개념을 중시하기 때문에 몇몇 인문대 수업에서 ‘미술과 나’, ‘종교와 나’처럼 ‘나’의 경험과 그 과목의 주제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긴 했지만, 오직 ‘나 자신’에만 주목해 탐구해 본 건 그 수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에 비해 뇌의 각성 수준이 더 강하다.”는 설명을 그 수업시간에 들었을 때, 나를 괴롭혀 왔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항상 깨어 있어 잠들기 힘든 나의 뇌. 일상적인 불안감, 예민하다는 평판……. ‘예민한’이라는 형용사가 ‘무던한’이라는 형용사와 대척점에 자리하며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수업을 들으면서 그것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 기질상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고, 더불어 용서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안심하기 위해 항상 최악을 상정하는 ‘방어적 비관주의’, 우울한 사람의 자기 지각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현실적이라는 ‘우울한 현실주의’, ‘자기인식’이 강하면 행복지수가 떨어진다는 이론 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심리학이라는 세계엔 그간 나를 힘들게 했던 여러 성격적 특질을 설명하는 보편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안도했다.
기말고사 문제 중 이런 질문이 있었다. ‘특정 성격 유형의 사람들은 관상동맥 심장병에 걸리기 쉽다. 이런 사람들은 경쟁적이고 적대적이며 조바심이 많다고 한다. 이런 성격 유형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나는 그 답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타입A 퍼슨’. 그건 바로 나였으니까.
나의 우울증은, 사회인이 되었던 20대 중반 이후로 명료하게 불거지기 시작했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고, 많은 의사를 만났으며 각종 상담을 받았고, 다양한 약을 처방받았다. 의사가 바뀔 때마다 나에 대해 처음부터 설명해야만 했는데, “저는 ‘타입A 퍼슨’이라서요.”라고 말을 꺼내면 대부분의 의사들은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단어, ‘타입A 퍼슨’은 간명했으나, ‘저는 예민한 사람이라서요.’ 혹은 ‘저는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요.’ 같은 서술보다 훨씬 구체적이었고 과학적이었으며, 설득력 있었다. 그 단어를 배우게 된 것만으로도 ‘심리학 개론’ 수업을 들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수업의 영향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심리학 책을 꽤 읽었다. 그 가운데, 아주 예민한 사람들의 특성을 다룬 일레인 아론의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과 주디스 올로프의 『나는 초민감자입니다』도 나 자신을 이해하며 인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우울증이라는 저자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시켜 고찰한 앤드루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이 책은 다시 그 ‘악마’가 찾아올 때마다 나를 다독이며, 지탱하게 해 준다.
나는 여름에 겨울을 대비할 뿐 아니라, 얼어붙을 듯한 추위 속에서도 봄을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최고의 순간에도 상황이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 기억하면서 다시 찾아올 우울증에 대비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우울증의 쇠퇴에도 민감해질 수 있었다. (...) 나는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졌을 때조차도 좋아진 때를 상상하는 법을 배웠고, 그 소중한 능력은 악마적인 어둠 속을 한낮의 햇살처럼 파고든다. _앤드루 솔로몬, 『한낮의 우울』에서
S의 익숙한 글씨가 적힌 ‘족보’를 나는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 족보가 들어 있던 파일함에서 첫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나눠준 프린트물을 발견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다음과 같은 일이 수강생들에게 일어나기를 :
1)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이해 증진
2)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3) 인간 행동에 대한 비교적 잘 확립된 사실 제공
젊은 교수가 20대 청춘들을 위한 수업을 준비하며 가졌던 소망이 아름답다 느끼면서,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있는 능력의 예감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떠올렸다. 내겐 그가 수강생들에게 기대한 세 가지 중 어떤 일이 일어났나 생각해 봤다. 적어도 나의 삶에 대한 이해는 무척 증진되었으니, 그의 능력은 나를 통해 어느 정도 실현된 셈이다.
어느 독자로부터 “나는 힘들 때 당신의 글을 읽고 위로받지만, 저렇게 사람들의 마음속 상처를 감지해 위무하려면 본인은 얼마나 힘든 일을 많이 겪었을까 싶어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카를 융의 개념을 나는 좋아한다. 상처 입어 본 사람만이 타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대단한 글쟁이는 아니지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건 글 쓰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감수해야만 하는 숙명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오래전 그 수업시간의 프린트물 한 귀퉁이에, 나는 선생님의 말을 메모해 놓았다.
일기를 쓰면 행복감이 증진됨 :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지지받는 경험을 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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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아람(작가, 기자)
sekdrim
2022.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