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3년 동안의 매일을 기록한 일기와 에세이를 엮어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펴낸 윤혜은 작가의 두 번째 책은 『아무튼, 아이돌』이다. 무려 스무 해 넘는 동안 아이돌 덕후로서 느끼고 경험한 ‘덕질’과 ‘덕력’을 담은 ‘덕생’의 기록인 이 책에는, 우리 마음의 안전거리를 해제시킨 아이돌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열 살 혜은’의 첫 아이돌 god부터 현재 덕생의 대상인 온앤오프까지를 경유하면서 윤혜은 작가가 말하려는 건, 아이돌 덕질의 어렴풋한 연대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뼛속부터 아이돌 덕후인 작가가 아이돌을 사랑하면서 알게 된, 자신과 세계의 확장에 대한 굳건한 고백이다.
책의 시작 부분, ‘덕후의 말’에 ‘덕후 용어 사전’을 만들어놓으셨더군요.
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지만 혹시나 독자분들이 의미를 모를까 싶어 책 속에 등장하는 용어를 정리했어요. 덕후의 서사나 덕력을 맛보는 프롤로그 페이지로도 기능하지 않을까 싶었고요.
책의 초반부터 중반에 이르는 꼭지의 제목이 모두 입덕한 아이돌의 노래 제목이에요. 더불어 각각의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어요. 어렵겠지만, 만약 ‘덕후렌즈’를 하나의 대상에게만 포커싱한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god? 아무튼 모든 덕생의 시작이니까요. 첫 콘서트, 첫 팬덤, 첫 팬픽, 첫 굿즈 등 모든 게 god로 시작했잖아요. 저도 어렸지만, 그들 역시 순순하고 순진한 시절의 아이돌이어서 의미가 커요. 동방신기, 슈퍼주니어도 좋지만, god는 굳건함이 있어요.
그중에서도 “보아는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끌어당겨준 ‘첫 언니’인 셈”이라는 문장이 있어요. 각별함이 느껴지는데요.
문장이 조금 비장한데, 보아는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간 모습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고 중계된 첫 번째 연예인이에요. 당시만 해도 연예인은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였거든요. 서너 살 차이지만, 진로를 일찍 결정하고 목표를 향해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롤 모델 같았어요. 보아처럼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보아 같은 성실함이 내게도 있었으면 하는…. 그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성실하게 분투하는 서사를 가진 진정성 있는 아이돌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십대 시절 덕질이 대상을 향한 ‘몰입’에 방점이 찍힌다면, 삼십대의 덕질은 현생과 덕생 사이의 ‘스밈’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맞아요. 사실 어릴 때는 덕질한다고 하면 떳떳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뭘 해도 스스로 책임지는 하루를 보낼 수 있거든요. 덕질에 과몰입해서 현생을 줄이고 덕생을 높이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덕후로 스위치를 켜면 거기에선 다칠 일이 없거든요. 스타일 차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핑계 삼지 않고 현생에서 하는 일을 온전히 책임지는 덕후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덕질은 누군가에게 검사받고 평가받는 행위가 아니니까요.
현재형 덕생의 대상인 아이돌 그룹 ‘온앤오프’는 늦덕하신 거잖아요? 입덕과 늦덕의 미묘한 차이란 어떤 걸까요?
온앤오프는 완벽한 늦덕인데, 입덕과 분명한 차이가 있어요. 늦덕의 경우 만약 3년의 시간이 흘렀다면 그 시간을 온전히 모르는 상태라서 아쉬움이 크고, 처음부터 좋아한 덕후들에게 질투를 느낄 때도 있어요. 하지만 3년치 영상을 찾아서 보고, 음악을 듣는 행위가 매일 쓰는 일기장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또한 아이돌이 지금까지 써놓은 일기를 뒤늦게 보면서 느끼는 안도감과 재미와 기쁨이 있죠.
온앤오프를 향한 ‘어느 하루’의 덕질 라이프를 디테일하게 소개하신다면요?
특별할 게 없는데.(웃음) 책 날개에 ‘덕질은 숨 쉬듯이’라는 프로필 문장을 넣었는데, 딱 그래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돌들의 메시지를 구독하는 플랫폼 앱 ‘버블’을 확인하고, 출근하면서는 부캐 트위터에 ‘효진아, 오늘도 잘 지내’라는 트윗과 함께 최애의 행복을 빌어요. 책상 위에는 세팅한 사진을 올려놓고, 작업하다 지치면 최애 영상을 보기도 해요. 코로나 탓에 공개방송 콘서트를 못 가니, 퇴근하면 상암동 (아이돌) ‘퇴근길’에 자주 가기도 하고요. 생일카페를 찾는 건, 코로나 시대의 특별한 오프라인 덕질인데, 온앤오프 멤버 여섯 명의 생일을 챙기면서 반드시 행복해져요. 가끔 ‘뭐 하는 짓이지’ 싶다가도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만으로도 기쁜 하루가 되거든요.
같은 여성으로서 걸그룹에 대한 애틋함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어요.
삼십대가 되면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걸 여실히 느끼는 중이라서, 좋아하는 여성 아이돌의 생태에 대해서도 염려되는 부분이 있어요. ‘점점 데뷔가 빨라지는 와중에 가이드라인도 안전 바도 없는 살벌한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온전히 꿈을 펼칠 수 있을까’, ‘그들의 무대를 소비만 해도 되는 걸까’라는 가치판단이 생겼어요. 여성 아이돌이 꿈을 향하는 과정에서 차별, 상처, 성적 대상화를 겪지 않으면 좋겠고, 자기한테 맞는 옷을 찾아갈 때 스스로 포지션 체인지를 할 수 있는 스텝이 가능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이 진행되기 전에 꺾인 설리와 하라를 보면 큰 별을 잃고 빚진 느낌이 들고요.
“아이돌은 나라는 인간으로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확장시켜준다고 할 수 있다”(10쪽)고 썼어요. 여느 덕후와 아이돌 덕후의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아이돌 덕후는 아이돌의 성장을 함께하면서 과몰입할 수 있다는 게 차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트위터에, “내 인생에서 나로 사는 게 쉽지 않은데, 효진의 세계에서 성실한 관객으로 사는 게 나을 때가 있다”고 쓴 일이 있어요. 내가 잠깐 지워지고, 아이돌의 세계에 편입해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존재인 거죠. 제 경우엔 덕후로서의 삶이 나를 잘 돌볼 수 있는 힘을 길러줬어요. 나에 대한 믿음, 나의 다음을 기대하는 힘. 아이돌 친구에게 준 힘이 다시 저에게 돌아오는, 소진하는 힘이 아니라 내 삶을 돌볼 수 있는 힘이 된 거죠.
‘나의 최애’에게 한 마디 전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으신가요?
모든 최애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너는 내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일상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야.”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문일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