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나 지금이나 아레사 프랭클린을 수식하는 단어는 경이로움이다. 동시대를 빛낸 수많은 디바 가운데서 여왕의 칭호를 누린 것은 물론, 오늘날까지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하나로 꾸준히 호명되는 것은 그의 존재가 어느덧 시대의 '가치'를 초월한 불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독보적인 성량과 음역으로 장르의 부흥기를 견인하고 흑인과 여성의 존중을 주장하는 등 인권 운동의 선봉장으로도 활약한 그의 행보는 음악사를 통틀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9월 8일, 개봉을 앞둔 아레사 프랭클린의 전기 영화 <리스펙트>는 아레사 프랭클린이 반세기를 뛰어넘어 후세에 끼친, 그리고 앞으로 먼 미래까지도 끼칠 영향력에 대한 증거다. 스크린으로 접하기에 앞서 16곡으로 그의 거대한 역사를 되돌아보자. 1960년대 후반 가스펠과 소울에서 두각을 보이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아틀란틱(Atalntic) 레코드를 기점으로, 디스코나 뉴웨이브와 같은 주류와의 융합을 도모하여 젊음과 호흡했던 1980년대 아리스타(Arista) 소속 시절까지. 그 부드럽고도 장대한 융단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Respect (1967)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 터지기 일보 직전. 그간 흑인 여성으로서 받은 온갖 부조리한 대우로 분노 게이지는 임계점을 가리켰고
순서는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를 부른 천재적 소울 뮤지션 오티스 레딩이 1965년에 발표한 원곡이 먼저다. 허나 곡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레딩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프랭클린의 음성을 통해 곡의 진폭은 백배 천배 더욱 커졌다. 흑과 백에 남과 여의 이야기를 더해 주제를 확장했다.
흑인 여성이 부통령에 당선되고 흑인 스포츠 스타가 동경의 대상이 되는 시대지만 이면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한 희생자가 있다.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멀고
Satisfaction (1967)
롤링 스톤스가 1965년 발표한 <(I can't get no) satisfaction>은 그들을 커버 밴드에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주역으로 인양한 역작이다. 밴드에게 처음으로 빌보드 차트 1위라는 성과를 안겨준 이 곡이 현재까지도 록 음악 계보에서 최고 반열에 위치한 까닭은 명확하다. 로큰롤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기타 리프를 지녔기 때문. 좀처럼 잊히지 않을 것 같은 믹 재거와 키스 리처드 콤비의 강렬한 잔상에도 아레사 프랭클린의 목소리가 입혀진 'Satisfaction'은 전혀 다른 감상을 남긴다.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 (1967)
이렇다 할 성적표를 안겨주지 못한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아틀란틱 레코드사로 이적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새 레이블과 손을 잡은 후 발매한 에서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싱글 'Respect'가 등장하는데, 그 도화선이 바로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다. 선공개 트랙은 데뷔 이래로 처음 빌보드 싱글 차트 톱 10 안에 들었으며 레이디 소울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동아줄이다.
는 흑인의 임파워링과 당대 여성이 가져야 할 미덕이라는 양극단을 지녔고, 'Respect'와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가 각각을 대표한다. 거짓말쟁이에다 바람피우는 남자여도 사랑하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여인의 비애를 울부짖으나 마냥 슬프지 않다. 방아쇠와 같은 거대한 샤우팅으로 상대를 일갈하기도, 흐르는 물처럼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놀라운 점은 변검술 같은 보컬의 변화가 단 한 문장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1967)
아틀란틱 레코드로 이적한 후 아레사 프랭클린은
제리 고핀이 쓴 가사는 단순히 남자에게 인정받는 여성을 표현한 것이 아닌 여성성을 축하하는 찬가로서 '흑인 여성 지우기'가 만연했던 1960년대에 여성의 존엄성과 평등을 상기시켰다. 덕분에 대중문화에서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은 여성이 변모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1995년 미국의 헤어 제품 브랜드 클레롤의 염색약 광고가 대표적이며, 2014년 미국 하이틴 드라마 <글리>에서 메르세데스가 재회한 연인 샘과의 관계에 확신을 갖기 위해 부른 장면도 인기를 끌었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2015년 케네디 센터에서 캐롤 킹을 축하하기 위해 이 곡을 불러 큰 감동을 선사했다. 변치 않은 빛을 가진 자기 확신의 메시지는 발매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대중을 감화하고 있다.
Chain of fools (1967)
'바보들의 사슬'이란 담백한 제목의 노래는 이름만큼이나 간결한 구조를 지닌다. 'Chain'이 반복되는 오프닝을 지나 다층의 굵은 코러스가 쌓인 메인 멜로디에 안착한 뒤 다시 힘을 풀어 전자의 것으로 돌아간다. 3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곡. 그럼에도 2010년 영국의 <롤링스톤>지는 이 곡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곡 500중 252위(그의 노래 중 단 4개만이 차트에 올랐다)로 선정했다. 또한 곡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뺄 수 없는 대표곡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핵심은 단순함을 꽉 채운 아레사의 보컬 역량이다. 도입부, 곡의 트레이드 마크인 떨리는 기타 소리 이후 이렇다 할 사운드 소스가 없음에도 노래는 때론 강하고 때론 약하게 곡을 가지고 노는 그의 호흡과 만나 강렬한 에너지를 낸다. 이 완벽한 소화력은 어쩌면 사랑했던 사람의 변절을 담은 가사가 너무나도 그의 삶과 밀접히 닿아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 오르고 그에게 그래미 베스트 여성 알앤비 보컬 퍼포먼스 수상의 영예를 안긴 곡. 지금도 국내외의 많은 뮤지션이 커버하며 무한히 생명력을 연장 중이다.
Think (1968)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 때 시위대의 찬가 'Respect'가 미국 전역에 울려 퍼졌지만 인종 간의 갈등은 여전했다. 1968년 4월 4일엔 민권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며 사태가 악화되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아레사 프랭클린은 장례식에 참석해 넋을 기리고 집으로 돌아와 곧장 피아노를 두들겼다. '마침내 자유로워졌다(Free at last)'라는 민족 영웅의 전언을 받들어 작곡한 'Think'는 자유를 향한 갈망을 담았다. 열성을 토하는 저항적인 가사는 유명 세션들의 연주와 어우러지며 소울 음악의 본질을 투영한다.
물론 시대적 상황과 별개로 본인의 경험이 녹아든 곡이기도 하다. 만 18세의 어린 나이에 맞이했던 첫 결혼 생활, 전 남편이었던 테드 화이트의 상습적인 가정 폭력은 또 다른 억압이었다. 이때 목사의 죽음이 도화선에 불을 댕겼고 피부색은 물론 성별에 의한 차별까지 겪고 있던 그는 흑인을 멸시하던 백인과 여성을 홀대하던 남성을 향해 날 선 비판을 던졌다. 강자에겐 죄책감을 부추기고 약자에겐 자긍심을 고취했던 'Think'는 지금까지도 'Respect'와 함께 '소울 여왕'의 업적을 아로새기는 인류애의 산물이다.
I say a little prayer (1968)
“이미 히트한 곡을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리메이크한다.” 만약 당신이 제작자라면 원전의 존재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러한 모험을 시도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나라면 과감히 승부수를 띄워볼 만도 할 것 같다. 대신 여기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야겠다. 아레사 프랭클린이 내 레이블의 소속 가수라는 전제 말이다.
그는 디온 워윅이 1967년에 선보여 이미 빌보드 Hot 100 4위를 기록했던 노래를 불과 1년 만에 자신의 디스코그라피로 소환했다. 비록 앞선 업적을 넘어서지 못하고 10위에 머물렀지만, 신기하게도 지금에 와 이 싱글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아레사 프랭클린이다. 아무래도 보컬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강조했던 오리지널이 여유와 박력을 동시에 갖춘 그의 가창력에 두 손 두 발 들고 만 셈이다.
코러스를 전담해 가스펠의 기운을 불어넣은 스위트 인스피레이션(The Sweet Inspirations)의 전 멤버가 디온 워윅이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더불어 작사가 할 데이비드(Hal David)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남자를 걱정하는 여자를 모티브로 해 써 내려간 노래로, 나름의 시대상을 담고 있기도 하다. 많은 이들에게는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조지가 줄리안에게 부르던 뮤지컬 같은 장면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1967년과 1968년 사이 그가 거머쥔 9개의 Top 10 히트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트랙.
Bridge over troubled water (1971)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엘비스 프레슬리, 린다 클리포드, 메리 클레이턴 등 50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이 곡을 커버했지만 그 누구도 아레사만큼 영혼을 담아 재창조하지는 못했다. 가창자인 아트 가펑클은 아레사의 재해석을 원곡보다 높이 평가했으며 작곡자 폴 사이먼 또한 수십여 버전의 리메이크 중 제일로 꼽았다. 경건하게 울리는 피아노 연주의 간결함뿐이지만 사운드를 뚫고 나오는 파워풀한 성량과 광활한 음역대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보컬은 전율을 일으키기 충분했고 1972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베스트 알앤비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하는 쾌거로 이어졌다.
Spanish harlem (1971)
대중에게 친숙한 곡을 커버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이 따르는 일이지만 미국 가장 위대한 보물 목소리에 그런 걱정은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아레사 프랭클린이 히트곡을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 아니 완벽히 갈취할 수 있음을 보여준 'Spanish harlem'은 기존 버전을 새까맣게 잊게 하는 철저한 자기화로 빌보드 소울 차트 정상과 싱글 차트 2위를 석권하며 원곡자 벤 이 킹의 기록을 앞질렀다.
벤 이 킹의 버전이 느긋한 룸바 리듬으로 서정적이었다면 무거운 베이스라인과 펑키한 기타, 닥터 존(Dr. John)의 피아노를 껴입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것은 거친 할렘 거리의 후끈한 열기에 가까웠다. 예쁜 가사 'There is a rose in spanish harlem'을 'There's a rose in black at spanish harlem'으로 각색한 노랫말은 흑인 공민권 시대 정서를 절묘하게 나타낸다. 20세기 소울 퀸은 리메이크에서도 이렇게나 치밀했다.
Rock steady (1971)
우리나라에서 지난 7월에 개봉한 레게 다큐멘터리영화 <자메이카의 소울: 이나 데 야드>에서 한 가수가 록스테디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스카는 연달아 춤추기 힘들었어요. 피곤하다고들 했죠. 그래서 더 느리게 춤추기 시작한 게 록스테디였어요." 스카의 후임이자 레게의 이전 모델인 록스테디는 느린 템포가 특징이다. 록스테디의 명칭을 취한 'Rock steady'도 템포가 그리 빠르지 않다. 록스테디의 평균 BPM이 80에서 100이고, 'Rock steady'의 BPM이 100을 조금 넘으니 록스테디의 속도까지 빌린 셈이다.
템포는 다소 느린 편이지만 분위기는 경쾌하다. 주제도 춤이다. 묵직한 베이스 연주와 가벼운 일렉트릭 기타 연주가 조화를 이루며 몸을 흔들기에 좋은 리듬감을 생성한다. 관악기 연주는 노래를 한층 밝게 꾸며 준다. 백업 싱어들과 말을 주고받는 방식의 보컬 또한 생동감을 생성하는 요소 중 하나다. 아레사 프랭클린이 코러스에서 외치는 "아~" 소리에는 약간의 울림 효과가 가해져서 노래가 신비로운 메시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꾸준히 흔들어!"라는 문장은 파티나 춤을 즐기는 사람들의 잠언이 됐다. 198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록 스테디 크루라는 브레이크댄싱 팀이 생겼다. 지난달 29일 열린 브레이크댄싱 배틀 대회 <의정부 브레이킹 게임즈>에서는 음악을 담당한 브레이킹 심포닉이 오프닝 무대로 'Rock steady'를 연주하고 불렀다. 브레이킹 시합에서 'Rock steady'가 자주 흐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또한 수많은 힙합 노래에 차용되며 오랜 세월이 흘러도 강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Jump to it (1982년)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펄펄 날던 '여왕'은 1974년부터 여러 문제에 휩쓸리면서 인기 전면에서 퇴각한다. 아레사란 이름은 오랫동안 차트와 매체에서 사라졌다. 1976년 'Jump'라는 곡을 발표해 간절히 '점프'를 원했지만 여의치 않았다(72위). 하지만 1982년 이 곡과 함께 제집처럼 드나들던 전미 차트 톱 40에 '6년 만에' 마침내 '점프'(24위), 리즈시절 재(再)도래에 희망을 갖게 된다. 1985년 'Freeway of love'로 시작된 2차 전성기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은 물론 구원을 도모했다고 할까.
아레사는 갈망하던 히트 산출을 위한 기법을 당시 막 프로듀서, 작곡자, 가수로 떠오르던 루더 밴드로스에게 맡겼다. 그는 마커스 밀러와 공동으로 이 곡을 써, 아레사만이 구사하는 필살기, 그 펑키(Funky) 비트 지배력에 모든 것을 맡겼다. 서로를 향한 상호의탁과 신뢰가 낳은 결실! 환상적인 밀러의 베이스 연주 위에, 정말이지 비트를 쪼개가며 '노는' 능란하고 찬란한 가창은 6년 뒤의 걸작 'Jimmy Lee'를 예약하고 있다. 대표곡 리스트에 오르진 않지만 예술성과 이력 모두에 중한 위치를 점하는 숨은 보석. 이 곡을 대야 아레사의 리얼 팬이다.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 (With George Michael) (1986)
곡의 의의는 왬!의 조지 마이클이 아이돌 이미지에서 벗어나 음악 역량을 증명한 데 있지만, 그 성과만큼 아레사 프랭클린에게도 거대한 족적을 남긴다. 가장 큰 기록은
소울의 여왕이란 왕좌는 넘버원을 달성하는 퀘스트를 깨면 받는 보상처럼 자동으로 오르는 자리가 아니다.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대중의 음악, 말 그대로 그가 대중을 위한 음악을 불렀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에 당도한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노래나 부르면서 방구석 뮤지션으로 실력을 쌓아간들 그냥 노래 잘 부르는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준 데에 대해 팬들이 선사한 영원한 선물이자 최고의 존중이다. 누가 뭐래도 소울의 대명사는 아레사 프랭클린이다.
Who's zoomin' who (1985)
1983년에 발표한 앨범
'Freeway of love'에 이어 두 번째로 빌보드 싱글 차트 톱 텐에 오른 '신스팝 소울' 넘버 'Who's zoomin' who'는 808 드럼머신을 적극 활용해 투명하고 선명한 비트를 강조했다. 상승한 리듬감과 여유로운 그루브로 채워진 이 곡은 미국 대중의 선택을 받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철저히 배척당했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볼륨감이 넘실거리는 명곡 'Who's zoomin' who'를 발표하고 2년 후에 조지 마이클과 함께 부른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로 국내에서 넓은 인지도를 쟁취했다.
Jumpin' jack flash (1986)
2차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그 행렬의 선두는 'Jumpin' jack flash'였다. 롤링 스톤스가 1968년 발표한 명곡은 밴드의 멤버 키스 리처드의 주도 아래 재해석되었고 우피 골드버그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
Freeway of love (1985)
이러한 협업 가운데 탄생한 이 가벼운 드라이빙 송은 발매 2개월 만에 빌보드 차트 3위에 오르며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이후 그래미상 최우수 여성 R&B 보컬 퍼포먼스 부문에서도 수상을 안겨주는 등 과거 못지않은 영예를 선사하기에 이른다. 디스코와의 합일로 도약을 시도한
Until you come back to me (that's what I'm gonna do) (1973)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과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의 명성을 이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대표 발라드 넘버. 스티비 원더가 클라렌스 폴, 모리스 브로드낙스(Morris Broadnax)와 함께 쓰고 1967년 녹음까지 한 이 멋진 곡이 아레사를 통해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1973년 노래의 잠재력을 발견한 그는 자신의 버전으로 곡을 제작해 이듬해 빌보드 싱글 차트 3위에 안착시켰다. 스티비 원더의 잔반을 커리어 최고의 싱글 중 하나로 맞바꾼 셈이다.
직접 연주한 낭만적인 피아노 전주와 조 파렐의 플루트가 산뜻한 재즈 감성을 제공하지만 곡 내용은 다소 등골 오싹하다. 자신을 차버린 전 애인을 찾아가 그의 집 현관문과 창문을 두드리는 스토커의 '집착' 송! 굽이진 선율 곳곳을 매끄럽게 타고 흐르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황홀한 목소리는 스릴러 영화 같은 이런 으스스함마저 극도의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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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