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처럼 커다랗고 둥근 배로 여기저기 씩씩하게 누비던 나는 그해 여름 막달 임신부였다.
8월의 한가운데 모든 사물의 색이 뜨거운 태양 빛으로 하얗게 눈 부시던 날이었다. 남편과 함께 할머니 댁에 놀러 가서 맛있는 것을 잔뜩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나왔다. 할머니는 언덕길을 씩씩하게 걸어 올라가는 손녀딸을 보고 말씀하셨다. “애기 나오려면 멀었겠다. 걷는 게 저렇게 쌩쌩한걸.”
다음날인 말복 새벽 어제 할머니의 말이 무색하게 이슬을 보았다. 초산인데 이슬을 보았다고 아기가 금방 나올까? 확신할 수 없어서 남편을 회사에 보낼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데 그 고민이 겸연쩍게 아기는 그날 오후 2시 50분에 태어났다. 얼굴이 둥글고 빨간 입술을 가진 나의 딸은 여름 햇살이 힘주어 빛을 내뿜는 말복의 한낮에 태어났다.
하얀 싸개에 얼굴만 동그랗게 내놓은 채로 돌돌 싸여 나에게 온 아기를 본 순간 나는 몸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벅찬 사랑을 느꼈다. 내 눈에 아기는 눈썹, 눈, 코, 입술, 얼굴형, 머리카락까지 완벽했다. 신이 내린 지상 최고의 화가가 정성 들여 하나하나 선을 그리고 면을 빚어낸 것처럼 예뻤다. 싸개에 싸여 커다란 바게트 같은 아기를 품에 안아 들고 친정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정말 완벽하게 예쁘지 않아?” 엄마가 코웃음 치는 걸 봤지만, 내 눈에 나의 아이는 정말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그렇게 여름은 나의 딸을 만난 계절이 되었다.
나는 원래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위에 무척 약한 체질이어서 햇빛이 점점 기세를 올리는 여름이 되면 시름시름 의욕 없이 겨우 버티는 사람이다. 가늘고 반곱슬인 머리카락은 장마철이 되면 주체할 수 없이 구불거려 거울을 피하게 만들고, 땀이 나면 유난히 끈적거리는 피부를 가져서 여름에는 살갗이 스치는 정도의 스킨십도 피하게 된다. 이마와 코가 지성인 나는 여름이 되면 미모도 반으로 깎인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었다. 해가 세력을 잃어갈수록 나의 미모와 체력은 반비례로 올라갔으니까.
그런데 여름의 한가운데 태어난 딸은 여름을 사랑한다. 자신이 여름 중에서도 제일 더운 복날 태어났다는 것에 은근한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는 햇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라도 튜브를 끼고 물속에서 참방거릴 수 있으면 그저 행복하다. 생일이 있는 8월엔 한 달 내내 생일인 듯 벅차고 기쁜 얼굴이다.
나무와 풀과 꽃을 좋아하는 아이는 자연이 생동하는 계절이 오면 길가에 핀 형형색색 꽃이며, 햇살에 반짝이는 나무를 살피느라 걸음이 느려진다. 옆에서 땀을 흘리는 나는 길을 재촉하고 싶지만, 선명한 색의 꽃 앞에 서서 반짝이는 눈과 빙긋 올라간 입꼬리로 종알거리는 아이를 보면 그럴 수가 없다. 옆에 서서 같이 꽃을 들여다보며 그 귀여움과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에 아이와 함께 감탄한다. 아빠에게 듣고 책에서 배운 나무와 풀의 지식을 나에게 자랑하는 것도 아이의 큰 즐거움이다. 청단풍과 홍단풍의 차이에 관해 설명하고, 도토리가 열리는 떡갈나무의 잎이 구름 모양인 것도 알려준다. 쑥과 돼지풀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한 퀴즈는 등굣길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쑥은 앞면과 뒷면의 색이 다르고, 돼지풀은 앞면과 뒷면의 색이 같다.)
이제 나에게 여름은 단지 덥고 습하고 끈적거리는 계절이 아니다. 여름은 나의 아이가 세상으로 처음 온 계절이다. 매해 여름이 돌아오면 처음 만났던 아이의 둥근 얼굴과 앙 하고 울던 잇몸만 있는 동그란 입이 떠오른다. 내 품에 쏙 들어오던 따뜻하고 작은 몸과 얼굴이 빨개져라 울다가 젖을 먹고 씩 웃던 배냇짓이 떠오른다. 작은 주먹으로 나의 검지 손가락을 꽉 쥐면 가슴 가득 퍼지던 알 수 없는 찡한 느낌도 기억한다. 햇살이 점점 강해지고 신록이 점점 푸르러질수록 아이 입가에 퍼지는 귀여운 미소와 감탄으로 반짝이는 눈이 나의 여름이 되었다. 여름은 귀여운 꼬마 식물 박사님이 내게 온 사랑스러운 계절이 된 것이다.
수우(樹雨) 나무가 내리는 비. 존재 자체만으로 자기가 속한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나무같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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