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라디오 음악방송을 듣는데 DJ가 ‘오늘이 하지’라고 말했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하루이자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날. 이제 바야흐로 여름이다. 은밀하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침이 고였다. 깻잎찜과 오이지무침, 호박 새우젓 볶음을 자주, 마음껏 해 먹을 수 있는 계절이 왔다.
무더위로 여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여름에 한껏 맛볼 수 있는 반찬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좋아하는 한식 반찬들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깻잎찜, 오이지무침과 호박 새우젓 볶음을 들겠다. 구수한 들기름 향과 싱그러운 깻잎 향이 어우러지고 살짝 뜸 들인 깻잎의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인 깻잎찜, 꼬들꼬들하고 매콤달콤한 오이지무침과 달큰한 맛과 보들보들한 식감의 애호박 새우젓 볶음을 먹다 보면 한여름 더위가 저만큼 물러섰다.
어느 찌는 듯 무더웠던 여름, 이모가 차려준 투박한 시골밥상의 깻잎찜이 맛있어 잘 먹으니 이모가 만드는 법을 알려줄 겸 새로 만들어 많이 가져가라고 조리법을 설명해주었다. 진간장에 설탕, 다진 파와 마늘, 들기름 듬뿍, 들기름을 많이 넣어야 맛있다고 강조하던 지금의 나보다 젊던 이모. 고춧가루, 깨소금을 넣고 잘 씻은 깻잎을 몇 장씩 겹쳐 놓으며 그 위에 양념간장을 조금씩 뿌린다. 차곡차곡 잘 쌓은 후 냄비 뚜껑을 덮고 불에 올리고 김이 오르면 금방 내린다. 그래야 깻잎이 질겨지지 않고 깻잎의 초록색도 살고 식감이 산다고 이모는 여러 번 강조했다.
오이지무침은 할머니가 만들어주었을 때 어깨너머로 배웠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만들어 두었던 오이지를 2~3개 꺼내 나박나박 썰고 물에 담가 오이지의 소금기를 뺀다. 20분 정도 지난 후 손목에 힘을 주어 오이를 꽉 짜서 물기를 없앤다. 수십 년 전 기억인데도 나보다 나이 든 할머니의 손 아귀힘이 얼마나 셌는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깨소금, 파 다진 것, 마늘 간 것, 고춧가루, 참기름과 매실액과 깨소금 조금 넣고 조물조물 무치면 꼬들꼬들한 식감이 최고인 오이지무침이 만들어진다.
내가 어렸던 시절은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많이 놀던 때였다. 집 앞 골목길 아닌 조금 먼 곳으로 한나절 소풍이라도 떠난다면 엄마가 집에서 도시락을 싸 주셨다. 밖에서 사 먹을 것이 변변치 않던 시절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오이지무침은 얼마나 달콤했었는지. 단 하나의 반찬이었어도 심심한 밥과 잘 어울리는 짭짤한 오이지가 얼마나 입 안을 개운하게 했는지 지금도 생각난다.
애호박은 또 어떤가. 이름부터 여리고 색도 초록이 되지 못한 연두색 애호박. 매끈한 호박을 길게 반으로 잘라 반달썰기를 하고 팬에 들기름을 둘러 볶는다. 꼭 들기름을 써야 한다. 채소를 익힐 때는 들기름으로, 생채소를 무칠 때는 참기름으로. 파, 다진 마늘, 깨소금을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다. 애호박과 들기름과 새우젓이 얼마나 조화로운 달큰한 맛을 빚어내는지 애호박 새우젓 볶음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공기를 비울 수 있다. 한여름의 더위쯤은 거뜬히 견뎌낼 밥심이 생긴다. 깻잎찜, 오이지무침, 애호박 새우젓 볶음은 어느 것 한 가지만 있어도 밥 한 공기를 쉽게 비울 수 있는 반찬이다. 이 세 가지 여름 반찬이 함께 오르는 어느 여름 저녁의 밥상이라면 얼마나 넉넉하고 충만할까.
제철 여름 반찬을 충분히 먹을 때 여름을 잘 보내는 것 같고 여름이 내 몸을 잘 통과해가는 것 같다. 여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여름 반찬을 즐기며 여름이 많이 좋아졌다. 이제는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매일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이 닥쳐오는 삼시세끼. 내가 먹는 한 끼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다짐, 아무렇게 만들어 대충 먹은 한 끼는 돌이킬 수 없으니 내가 나를 잘 대접해서 한 끼를 정성스럽게 먹는 것이, 내가 빚는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여겼다.
다음 주면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빨리 오이지를 담가야겠다.
생강 지구에 쓰레기를 덜 남기기를 고민하며 매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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