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영화는 슈퍼히어로물로 분류되지만, 몇몇 작품은 다른 장르를 경유하여 주제를 강화한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2016)는 슈퍼히어로 등록제를 두고 어벤져스가 ‘팀 아이언맨 vs 팀 캡틴 아메리카’로 분열된 상황이 쉴드 내 음모의 결과라는 데 착안하여 ‘정치 스릴러’의 분위기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슈퍼히어로 이전 천방지축 청소년 피터 파커(톰 홀랜드)의 정신적 성장을 <페리스의 해방>(1986)과 같은 ‘하이틴물’에 오마주를 바치는 식으로 드러냈다.
<블랙 위도우>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전율의 텔레파시>(1978), 뤽 베송의 <니키타>(1990) 등 소년·소녀를 어릴 적부터 세뇌하여 인간병기로 키우는 작품들을 노골적으로 연상하게 한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 이후 지명수배가 되어 잠적 중이던 블랙 위도우/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는 이참에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며 그 때문에 쌓였던 죄책감을 털어낼 작정이다. 이에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찾아 그동안 등을 돌렸던 옐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와 마주하니, 서로 죽일 듯 싸움을 펼치지만, 실은 자매 사이였다.
이들의 부모는 멜리나 보스토코프(레이첼 와이즈)와 레드 가디언(데이빗 하버)으로 각각 1세대 블랙 위도우와 슈퍼 솔져이었다. 미국에 암약해 있다가 정체가 들통난 후 탈출한 멜리나와 가디언은 레드룸에 나타샤와 옐레나를 넘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실제 부부도, 부모도, 가족도 아니었던 셈. 영문도 모른 채 레드룸에 잡혀 온 어린 나타샤와 옐레나는 또래의 소녀들과 혹독한 훈련 과정 속에 스파이로 성장한다. 하지만 나타샤는 탈출해 어벤져스 멤버가 되었고 떠난 언니에게 원망의 감정을 가진 옐레나는 최정예 요원으로 활동하다 각성한다.
나타샤와 옐레나처럼 누군가를 살상하는 인간 병기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는 일에 자책하는 마음을 느껴 인간으로의 각성을 이끄는 건 ‘가족애’다. <블랙 위도우>에서 일종의 가족 설정은 세상을 지배하려 일을 꾸미는 레드룸의 수장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와 나타샤와 옐레나와 같은 요원들의 상하 관계,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결국 서로 의지하게 되는 나타샤와 옐레나와 멜리나와 레드 가디언의 공동체, 그리고 각성한 자매와 다르게 여전히 드레이코프의 마수 하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상 훈련을 받는 여성들이다.
<블랙 위도우>를 연출한 케이트 쇼트랜드는 이의 설정에 관해 “현시대에 전하는 의미가 크다. 이 영화는 본인의 인생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나아가는 여러 가지 여정을 따라가는 작품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물 장르 안에서 ‘나쁜 아버지’에 이용당하던 딸 같은 요원들이 탈출하여 세계 정복의 야욕을 저지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이야기다. 시대 반영 적으로는 남성의 지배 시스템에서 핍박받는 여성들이 오랜 시간 이어진 부조리를 깨고자 뜻을 같이하는 메시지다.
레드룸으로 대표되는 억압의 시스템이 얼마나 견고한지 슈퍼히어로 한두 명의 힘으로 해체하는 것은 힘들어 뜻이 맞는 이들과의 협업이 절실하다. 어벤져스 멤버의 등장을 바랐던 팬들의 기대와 다르게 <블랙 위도우>에는 사진과 음성 속 호크 아이(제레미 레너)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기존 캐릭터의 존재는 없다. 대신 블랙 위도우가 중심이 되어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2기의 주역이 될 옐레나와 자매에 미안한 감정을 느껴 대의에 동참하는 멜리나와 레드 가디언, 피해 서사에 묶이기를 거부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무명의 블랙 위도우들이다.
여기에는 상하 관계 대신 나란히 어깨동무하는 ‘연대’의 가치가 가족의 개념으로 확장한다. 나타샤와 옐레나는 오해를 풀고 자매애를 회복하고 멜리나와 레드 가디언까지 합류하여 이제야 진정한 가족의 가치를 실천한다. 이들 ‘가족’은 레드룸 시스템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쓰러진 여성들을 일으켜 세우고 부축하여 평등한 세상의 가치를 향해 발을 맞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여성 슈퍼히어로 솔로 무비 <블랙 위도우>는 블랙 위도우의 정체성을 가족애와 연대에 맞춰 인류애를 향한 슈퍼히어로의 또 다른 형태를 제시한다.
레드 가디언 역의 데이빗 하버는 냉전 시대 배경의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에서 실험실에 감금당해 인간 병기로 길러진 엘(밀리 보비 브라운)의 피를 나누지 않은 아버지로 출연했다. 데이빗 하버의 <블랙 위도우> 출연은 배우의 전력을 감안하여 메시지를 드러낸 캐스팅 전략이다. <기묘한 이야기> 시즌 3에서 데이빗 하버는 괴물 마인드 플레이어를 무찌르고 성장한 엘에게 편지로 조언을 남겼다. ‘삶은 좋든 싫든 시시각각 움직여. 때로 고통스럽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놀랍고 행복하지. 삶이 널 아프게 하면 그 아픔을 기억해.’ <블랙 위도우>는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들의 활약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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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