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예스>에서 격주 화요일마다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아직도 고민’ 상담 칼럼을 연재합니다. 독자 분들의 사연을 받아 채택된 고민에 따뜻한 처방을 드립니다. 익명으로 신청이 가능하며, 간단한 소개(연령 등)와 함께 고민을 보내 주세요. chyes@yes24.com |
독자에게 온 사연
18살 여고생입니다. 4월 초, 오랜 기간 암으로 투병하시던 엄마를 보냈고 그 이후로 죽지못해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엄마는 오랫동안 암으로 고생하셨지만 중간중간 호전되어 일반인처럼 지내신 적도 많으셨기 때문에 엄마는 저를 정말 잘 챙겨 주셨고 추억도 많습니다. 엄마와 정말 친한 친구처럼 지내왔고 엄마는 저보다도 저를 더 잘 아시는 분이었어요.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공부에 매진하다 보니 친구와 서먹해지고 제 얘기를 맘놓고 할 수 있는 곳은 정말 엄마가 유일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건강이 작년 말부터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올해 4월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후로 아빠와 동생, 저는 정말 심적으로 고통을 받으며 정말 죽지 못해 살고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영향도 있고 해서 어렸을 때부터 의사라는 꿈을 갖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의사가 되어서 환자들을 본다는 것 자체가 두렵고 앞으로 뭘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그저 막막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가족과 같이 생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정말 희망이랄 것도 없고 기대되는 것도 없어요. 생각보다 '엄마'라는 존재가 제 삶의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여느 가족처럼 부모님과 형제자매와 함께 지내는 것이 저의 큰 욕심인가 싶기도 하고, 그저 너무 막막합니다. 원래 제 성격 자체도 남 눈치 많이 보고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정말 싫어하고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이 시기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처방전
독자님께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죽지 못해 살고 있다는 말이 정말 마음 아프게 들립니다. 제 삶에도 가까운 이들과의 사별이 있었지만 그 고통들을 다 합할지라도 지금 독자님의 아픔에 비할 수는 없을 거예요. 상실감은 우울을 불러일으키는 핵심 감정인데, 그 상실의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이니까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크게 힘들 때입니다. 삶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고 따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에요. 의사의 길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도 너무도 당연하죠. 아무리 오랫동안 가져왔던 꿈이라고 해도요.
하지만 이 힘든 시기는 반드시 지나갑니다. 반드시요. 지금은 이 힘든 감정을 충분히 느껴야만 하는 애도의 시기인 것이고요. 몇 년 전, 제 친구가 암 투병 끝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먼저 떠났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도 힘들었지만, 역시 친구의 어머니께서 비교할 수 없이 힘들어하셨죠. 장례식 이후 몇 차례 뵐 때마다 눈에 띄게 야위어 가셨고 1년, 2년이 지나도 저와 친구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정신과 의사로서 걱정되기도 했어요. 대부분 6개월 이내에 가라앉는 일반적인 애도의 기간보다 길게 힘들어하시는 모습에 진료를 권유 드려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기도 했죠.
그런데 다음 기일에 뵈었을 때 친구 어머니의 모습은 180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저희를 반기며 예전에 아들과 찍은 사진들을 모두 모아 달라,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들을 해달라고 요청하셨어요. 심정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인지 여쭤봤고, 어머니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긴 시간 크게 슬퍼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어떤 깨달음과 함께 그 슬픔의 끝이 왔다고. 아이를 힘들게 떠나 보낸 마지막 그 몇 달의 기간과 비할 수 없이 훨씬 더 길게 행복했던 시간들이 있는데, 마지막의 그 감정으로만 아이를 기억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찾아왔다고 하셨어요.
이렇게 먼저 떠나간 누군가를 추억할 때 눈물보다 웃음이, 슬픔보다 행복의 기억이 떠오르는 시기는 분명 오게 됩니다. 저도, 제가 진료실에서 만난 분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지만, 더 슬퍼하고 난 뒤엔 독자님에게도 자연스럽게 이런 변화가 찾아올 거예요. 어머니와의 마지막 이별 장면이 아닌 행복했던 기억들이 더 자주 떠오르게 될 거예요. 지극히 당연합니다. 행복한 순간들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요. 물론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또 마음 아프겠지만, 그것 자체가 받아들여지는 날이 분명 올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지금 애도의 시간을 잘 보내야 합니다. 마음속 슬픔을 느껴지는 대로 충분히 표출해야 합니다. 눈치 많이 보고 민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려요. 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 그래도 힘든 가족들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까 고민하며 눈치 보는 경우에 애도 기간이 더 길어지고 더 아파지게 되거든요. 누구보다도 나와 같이 느끼고 있을, 그렇기에 누구보다 내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가족들과 더 많이 감정을 나누세요. 함께 추억하고 함께 아파하며 함께 눈물로 슬픔을 씻어보세요. 그래도 되는 것은 물론이고, 더 그래야만 하는 시기입니다.
사실 이 외에도 전하고 싶은 말들이 더 있는데, 다 전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어요. 우선 아직 그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그 어떤 말로도 잘 위로가 되지 않을 시기이고, 조금 더 냉철한 조언은 적절하지 않거든요. 또한 우리가 처음 대화를 나누는 사이이기 때문이에요. 충분한 시간 동안 아픈 마음을 같이 나눈 후에, 그래서 조금 더 가깝고 신뢰할 수 있는 사이가 되고 나서야 나눌 수 있는 말들이 있어요. 이번에 이렇게 사연을 보내 주신 것은 너무 잘 하신 일이지만, 온라인에서의 단발성 이야기로 지금 독자님 마음의 극심한 고통이 해결될 수는 없어요. 대신 현실에서 꾸준히 함께 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가족들과 아픈 마음을 나누는 것이 어렵다면, 혹은 그렇게 했음에도 아픔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는다면 상담을 받아볼 것을 권유하고 싶어요. 앞서 말씀드렸듯 분명히 힘든 것이 당연한, 충분히 힘들어야 하는 애도의 기간이지만, 또한 앞으로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데 중요한 시기이니까요. 그리고 그 과정을 혼자 걸어 나가는 것은 어른, 학생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요.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지용(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책 <어쩌다 정신과의사>를 썼고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다.
네네
2021.06.30
오스트
2021.06.30
seohk322
2021.06.30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