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때 친구와 동유럽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예산이 넉넉지 않아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3개국만 도는 여행이었지만 여자 단둘이 가는 데다 치안이 안 좋다는 말에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소매치기를 방지하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앞으로 둘러매는 일명 “일수 가방” 을 구매하고, 지퍼에 옷핀까지 달아 가방 주인조차 열기 힘든 가방으로 무장했다. 무장은 하면 할수록 좋다는 친구의 지론에 따라 호신용 호루라기와 캐리어 도난을 막기 위한 자전거용 자물쇠도 샀다.
준비하면서도 “이게 정말 여행일까?” 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먼 타국에서 무탈하게 돌아오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처음 발을 디딘 곳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한 숙소 앞에서 마주한 것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취객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보이는 취객끼리의 다툼으로 보였지만 낯선 이방인인 우리는 덜컥 겁이 나 곧장 숙소로 직행했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잠든 첫날 이후로는 생각보다 안전하게 아름다운 부다페스트를 노닐 수 있었다.
곧 부서질 것처럼 삐걱거리는 지하철과 돈을 넣어도 표를 뱉어내지 않는 기계에 대한 불만 따위는 유람선을 타고 마주한 국회의사당 야경 앞에 처참히 묵살되었다. 야경에 취해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세체니 다리 부근을 걸어 다녔을 때의 공기, 마트에서 산 와인을 먹고 취해서 몽롱한 상태로 가이드 투어에 참여했던 기억… 학교, 집, 알바만 반복하던 일상에 지쳐있던 우리에게 처방전 같은 시간이었다.
짧다면 짧은 9박 10일간의 동유럽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은 부다페스트를 떠나 잘츠부르크로 향하는 기차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모든 교통편을 한국에서 미리 예매했는데 잘츠부르크 직통 편은 구하지 못해 비엔나에서 내려 환승해야 했다.
비엔나까지는 꽤 오랜 시간 달려야 해서 우리는 앞 좌석 손잡이와 캐리어를 자전거 자물쇠로 연결하고 마음 편히 가기로 했다. 사이좋게 이어폰을 나눠 끼고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여행 중 찍었던 사진을 보다 보니 비엔나 역에 가까워졌고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친구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온 자물쇠는 다이얼로 비밀번호를 맞춰 여는 식이었는데 무언가 잘못 돌아간 모양인지 이리저리 돌려 보아도 열리지 않았다. 비엔나 역은 점점 가까워져 마음은 급한데, 캐리어가 묶여 있으니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기차가 정차를 위해 속도를 줄이는 그 구간이 얼마나 짧게 느껴지던지, 너무 당황스러워 가만히 자리에 서 있는 것 외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기차가 정차하자 친구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는데 우는 와중에도 나를 보며 “너라도 먼저 내려.”라고 하는 통에 웃음이 터졌다.
그 한 줌의 웃음이 나에게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해결책을 모색하라는 주문처럼 다가왔다. 일정이 좀 틀어지더라도 우리가 탄 기차는 어딘가에 정차할 것이고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할 방법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들었다. 그렇게 어딘지도 모를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한 손으로는 우는 친구를 달래고, 다른 손으로는 발권한 기차 티켓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지나가던 역무원을 붙잡고 티켓을 보여주며 서툰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제 덩치만 한 캐리어를 붙잡고 한 명은 울고, 한 명은 달래 가며 서툰 영어로 사정하는 상황이 안쓰러워 보였을까. 다행스럽게도 한참을 묵묵히 듣고 있던 역무원은 이 기차의 종착역이 잘츠부르크 역이라며 표를 구매했으니 그대로 쭉 타고 가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니 그전까지 저 자물쇠를 풀어보라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우연한 사고로 인해 예정보다 더 빠르고 편한 방법으로 잘츠부르크까지 가게 된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자물쇠 열기에 몰입했다. 000부터 시작해 하나씩 맞춰보다 보면 언젠가는 풀리겠지 싶었고, 20분 갸량의 사투 끝에 자물쇠를 풀 수 있었다. 그 순간 얼마나 기쁘던지! 운 흔적이 남은 벌건 눈으로 서로 손을 맞잡고 느꼈던 그 환희는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뿐한 마음으로 잘츠부르크 역에 도착한 우리는 그 길로 역 휴지통에 자물쇠를 버렸다. 불안이 또 다른 불안을 낳는다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마련한 자물쇠가 되려 마음의 불안을 키웠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물쇠를 버린 후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여행지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당장 내일의 일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불확실한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면 우리가 놓친 그 순간들은 후회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여행하라는 말은 아니다. 내 신변을 지키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걱정과 적당한 여유로 '오늘의 나'를 즐기자. 이는 잘츠부르크행 기차에서 얻은 한 줌의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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