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에서 일하다 출판 편집자로
7년간 영화 일을 하다가 편집자로 일한 지 올해로 10년. 강소영 후마니타스 편집자는 스스로를 ‘17년차 콘텐츠 제조/서비스 노동자’라고 말한다. 영화사도 출판사도 사업자등록증상 ‘업태’가 제조/서비스이기 때문이다. 강소영 편집자가 처음 편집 일을 시작한 곳은 마티 출판사, 이후 생각정원에서 일했고 2017년부터 후마니타스에서 책을 만들고 있다.
“대학에서는 국어국문학을 공부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장래희망 란에 ‘소설가’라고 적었는데요. 그 시절 서점에서 열리는 ‘작가와의 대화’나 문화센터 같은 데서 기획한 성인 대상 소설 창작 강의에 많이 찾아다녔어요. 좋은 작가가 되려면 뭐든 많이 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뭐든 닿는 것마다 제 안에 넣고 싶었고, 감응하려 했죠. 그러다 영화를 깊이 좋아하게 돼서 고등학생 때부터는 영화감독, 비디오가게 사장을 꿈꿨어요.”
대학 졸업 후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다. 영화학교 입학도 고려했지만 월급을 받는 영화 일을 하고 싶어서 영화사에 입사했다. 현장은 분명 흥미로웠지만, 사람들의 좌절을 많이 봤다. 많게는 79고까지 고치는 시나리오와 몇 년째에도 엎어 지는 영화를 보면서, 그런 작업을 하는 감독, PD, 연출부와 동고동락하면서 당장 ‘되는’ 투자받는 영화에 참여했다.
“일하던 중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후유증이 크게 와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밤마다 잠이 너무 안 오는 거예요. 불온한 생각을 굴리고 굴리다 전업을 결심했어요. 창조적인 일을 하되 영화보다는 리스크가 적은 일, 그리고 그간 해온 일을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업종을 생각해보니 출판 마케팅이었어요.”
서른이 훌쩍 넘은 여성이었기에 전업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마티 출판사가 그의 손을 잡았다. 마케터 채용은 끝난 상황이었지만 강소영 편집자의 이력서를 인상 깊게 본 정희경 대표가 ‘마케터가 아닌 편집자’ 업무를 제안했다.
“마티에서 작업한 책들은 모두 기억에 남아요. 그중 노시내 선생님과 엮은 두 권의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요. 노시내 선생님이 일본, 미국, 오스트리아 빈, 스위스 베른 등을 거쳐 지금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계시거든요. 출판사에서 몇 권의 역서를 내셨는데, 빈의 숨은 ‘명소’를 소개하는 기획이 돼 있어요. 그 책을 맡아 땡스북스스튜디오 디자이너들과 함께 알록달록한 책을 만들었어요. 첫 책 『빈을 소개합니다』가 나올 때쯤 스위스 베른으로 거처를 옮기셨기 때문에 스위스를 거쳐 간 ‘사람들’ 이야길 해보자며 『스위스 방명록』을 만들었어요.”
책 쪽으로 나와 준 독자와 중간에서 만나게 될 책
2018년에 출간된 『배틀그라운드』는 지금까지 편집한 책 가운데 최단 시간 가장 많은 북토크를 진행한 책이다. 연구자, 활동가, 의사, 변호사 등으로 일하는 여러 필자들이 두세 명씩 조를 짜서 지역을 가리지 않고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갔다. 종교, 의료, 장애 등 전방위한 분야와 연결 지어 강연했다.
“낙태죄가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나고 2020년 12월 31일 자정에 폐지되기까지, 이 책이 한 역할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연초에 사비로 “낙태죄(1953~2020)”이라고 자수한 수건을 제작했어요. 낙태죄 폐지 운동에 앞장섰던 모낙폐(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운영위원들과 『배틀그라운드』의 필진이 소속돼 있는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 분들을 중심으로, 생각나는 이들에게 수건을 돌렸어요. 제가 책 만드는 편집자이기 전에 한국의 여성으로서 이런 중요한 운동의 한가운데를 책과 함께 관통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기쁠 것 같아요.”
강소영 편집자가 가장 최근에 만든 책은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이다.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로 일하다가 방송 현장의 장시간 노동과 비정규직 해고 같은 부당한 업무 강요, 폭언 등의 인격 모독을 고발하며 떠난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 저자가 쓴 책이다.
“그전에 후마니타스에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님에 관해 쓴 『유월의 아버지』나 세월호 엄마, 아빠들이 쓴 편지글을 엮은 『그리운 너에게』가 나왔는데요. 그 책들과 연결되면서 길이 조금 다른 책이에요. 저는 ‘어떤’ 죽음임을 상기하기보다는,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그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책을 엮었어요. 잘 살겠다, 울지 않겠다고 말하다가도 바로 그 말을 뒤집는, 그 분열하는 심정을 책에 어떻게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누군가 손잡아 주기를 바라면서도 아무도 없는 곳에 처박히고 싶은 마음, 뭔가를 말하다가도 영영 이해 받을 수 없을 거라며 단념하는 마음의 고립을 누가 들여다봐 줄까. 아마 이 책을 집어 든 독자들은 어쩌면 책보다 더, 저자나 편집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일 거예요. 글의 행간을 잘 이해하려고, 필자의 이야기에 잘 닿으려고 몸을 숙여 집중하는 독자일 거고요. 독자 쪽으로 가는 책이 아니라 책 쪽으로 나와 준 독자와 중간에서 만나게 될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강소영 편집자는 원고 앞에서 단호하지 못한 사람이다. 원고에 개입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막 고치다가도 ‘이러면 안 되지’하고 되돌릴 때가 많다. 그래서 그의 교정지에는 교정한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때 쓰는 한자 ‘生’이 많은 편이다. 책을 만들면서 알게 된 필자들로부터 ‘활동가 같은 편집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과분하고 감사한 이야기인 동시에 곱씹어보게 되는 말이기도 했다.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주로 만들고 있으니, 책이 사회를 바꾸는 일에 쓰이길 바라고, 그것이 책이 가진 ‘실용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책의 의미를 강조하다 보면, 재밌어 보이지 않고 뭐랄까요, 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잖아요. 상업성은 일절 추구하지 않는, 어떤 면에서 무능하고 무책임한 편집자로 보일까 봐 내심 걱정했던 마음을 건드렸나 봐요. 일례로 제가 어느 자리에서 ‘100명의 독자가 당연히 더 좋겠지만 한 명의 독자를 잘 만나는 것도 소중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한 명의 독자면 충분하다’고 기사가 나간 적이 있거든요. 세상에, 이 무슨! 정말 깜짝 놀랐어요. (웃음) 모든 편집자가 그렇겠지만 언제나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고, 그 책이 저자, 역자들과 출판사의 살림에 도움이 되길 바라요.”
경력이 쌓이다 보니, 딱히 써둔 원고가 없는 책을 써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책을 제안하는 경험이 늘었다. 지난해 8월에 출간한 『김군을 찾아서』도 저자의 첫 책이다. 강소영 편집자는 이 책으로 제61회 한국출판문화상 편집 부문을 수상했다.
“영화 <김군>을 보고 영화에 다 담기지 않은 아까운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어요. 그런 이야기들의 맥락을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이 책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제가 강상우 감독을 만나 책을 내보자고 했을 때, 감독을 움직인 것은 책을 쓰고 싶다는 평소의 욕망이 아니었어요. 풀어낼 이야기가 분명 있고 한 번쯤 정리해야 할 것 같다는 당위였어요. 이 책으로 상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한 일은 저자에게 책 작업을 제안한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연출에 이어 책 집필까지 멋지게 해낸 감독님께 감사해요.”
뻣뻣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이 기획되고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편집이라는 이름 앞에 ‘책임’이라는 묵직한 단어가 보태진다. 강소영 편집자가 생각하는 좋은 편집자는 ‘협업을 잘하고 협업을 중시하는 편집자’다.
“편집자가 마감을 해야만 책이 나오지만, 그 공정엔 많은 협업자가 있어요. 특히 저는 디자이너와의 협업에 몰입하는데요. 이를테면 표지 시안이 나왔는데 마음에 차지 않을 때는 그게 디자이너 탓이라고 생각지 않으려고 해요. 그 디자이너에게 작업을 의뢰하고 책 내용을 설명하고 레퍼런스를 제시한 건 편집자인 저니까. 애초 콘셉트가 불분명했거나, 책 설명을 잘하지 못했거나, 충분히 소통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죠.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필요하다면 처절한 자기반성을 녹여 어떤 지점을 두고 고민하는지 고백합니다. 그리고 수정 시안을 함께 만들어 나가요. 이 과정에서 경험하는 성취감이 크고 많은 것을 배워요. 책을 만드는 저의 미감이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면, 디자이너들과의 협업 과정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강소영 편집자는 책을 만들면서 뻣뻣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연차가 쌓이고 책을 만드는 경험이 많아져 자신감이 붙을수록 샛길로도 가보고 다른 길로도 가볼 용기와 기회가 있길 바란다. 책 만드는 주체들이 ‘책을 위한 각자의 열심’을 발휘할 수 있도록,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잘하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제가 만들고 싶은 책의 중요한 기준은 결국 ‘접점’인 것 같아요. 이 문제가 다른 문제에 연결된다, 이 존재가 다른 존재에 연결된다는 것을 말하는, 접점을 드러내는 책이요. 이 책을 꼭 읽을 것만 같은 사람뿐 아니라 언저리에서 고민하던 독자들이 ‘이거다’ 하고 반길 책을 만들고 싶고, 저쪽에만 있던 사람이 이쪽으로도 와 보게, ‘움직이는’ 책을 만들고 싶어요.”
강소영 편집자가 만든 책
나영 외 지음, 후마니타스
<책읽아웃>에 소개되면서 방송을 들은 수신지 작가의 『곤』에 영감을 준 책(낙태죄 폐지에 못지않게 기쁜 일). 하나의 이슈에 얼마나 여러 쟁점이 연결될 수 있는지, 읽을 때마다 다른 지점에서 멈칫거리며 읽었다. 쇄를 거듭할수록 수록된 사진 연표가 어떻게 업데이트되는지 찾아보는 것이 소장 포인트.
오혜진 외 지음, 후마니타스
14명의 빛나는 필자들의 글을 집대성한(!) 책. 이 책을 읽는다는 건 다만 한 권이 아니라, 14권 α의 책을 읽는 것이라고 자부한다. 14명의 필진과 주고받은 메일 타래 양이 엄청난데, 내 이메일 보관함에서 가장 점유율 높은 책이 아닐까 싶다.
강상우 지음, 후마니타스
1980년대생 저자, 디자이너, 편집자가 ‘포기하지 않음’을 두고 경쟁한 책. 그 결과 제61회 한국출판문화상 편집상을 받았다. 곧 5월이 오는데, 벚꽃 시즌마다 다시 울려 퍼지는 그 노래처럼, 도서 판매 순위를 역주행하기를 편집자는 기대하고 있다. “포기하지 않음”.
김혜영 지음, 후마니타스
자식 잃은 엄마의 글이라니, 걷잡을 수 없는 슬픔부터 예감되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누구나 자식이거나 부모니까, 노동자이거나 사회의 구성원이니까 지닐 수 있는 ‘인지상정’을 건드린다. 가정의 달 5월에 읽거나 선물하기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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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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