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지 않아!”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에서 정은지가 맡은 주인공 나타샤는 자신을 유혹한 유부남 아나톨에 대해 피에르가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하자 화를 낸다. 아주 똑똑하거나 지혜롭지는 않지만 밝고 명랑한 어린 여성 나타샤는 전쟁터에 나간 약혼자 안드레이를 기다리다가 순진한 그의 마음을 이용한 아나톨과 사랑에 빠지고, 그와의 도주를 계획한다. 하지만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피에르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아나톨을 비난할 때, 그는 아나톨을 변호하면서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스스로 나서서 단호하게 안드레이와 그의 가족에게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음을 알리기까지 한다.
뮤지컬 속 많은 여자 주인공들은 자신이 사랑에 빠진 남자가 사실은 떳떳하지 못한 배경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제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그중에서 나타샤는 유달리 맹목적으로 사랑을 따르는 여성이며, 남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사랑했던 남자가 비열하게 홀로 도망을 치더라도 그를 향한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 어린 여성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타오른 불길에 몸을 던지듯이 사랑에 빠졌던 우리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정은지는 이 격렬해진 감정을 주저 없이 표출하며 무대 바깥의 사람들이 결국은 나타샤를 보며 연민과 응원이 함께 담긴 박수를 치게 만든다.
에이핑크 활동을 오랫동안 이어오면서 솔로 활동을 통해 자신의 음악관까지 드러낸 정은지는 <그레이트 코멧>을 통해 약 7년 여 만에 뮤지컬 무대에 섰다. 정은지에게 7년의 시간은 대중에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굳혀가기 위한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또한 본격적인 유명세를 선사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이후로 그는 여러 편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배우로 활동했고, KBS 라디오 ‘정은지의 가요광장’을 통해 DJ로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니 오랫동안 공백을 뒀던 뮤지컬 무대에 선뜻 다시 오르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관객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터져 나오는 이곳은 상처받기 가장 쉬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가장 뜨겁거나 차가운 이 무대에, 정은지는 허리를 곧게 펴고 또 한 번 올라섰다. 아이돌 출신 뮤지컬 배우들이 말하듯 “걷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하”고, 가요를 부를 때와는 다르게 “창법도 바꿔야 하는” 어려운 과정을 겪으며, 2014년 뮤지컬 ‘풀하우스’ 이후로 다시 뮤지컬 무대에 도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심을 굳힌 그의 모습은 굳은 심지를 지닌 나타샤에게서 정은지라는 사람을 새롭게 발견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에이핑크라는 그룹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앨범을 직접 프로듀싱하기로 결심하고, 트랙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겉면과 달리 늘 투철함이 엿보였던 것처럼, 나타샤로서의 정은지 또한 뒤로 물러서지 않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적절한 시기에 잡을 줄 알고, 다음 행보를 스스로의 생각으로 결정한 이상 물러서지 않는 사람. 정은지의 이야기는 스스로 잡은 펜으로 종이에 적히고, 나아가 사람들의 눈과 마음에 적힌다. 상대방이 자신을 뒤로하고 도망쳐 버렸다 할지라도 나 자신의 선택에 관한 믿음을 잃지 않는 나타샤와 함께 무대에서 도망치지 않는 주인공의 이야기. 정은지의 현재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가슴이 뛴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 자리에 서 있기를 결정한 사람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위안이다. 뒤돌아서지 않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람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위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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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아
전 웹진 IZE 취재팀장. 대중문화 및 대중음악 전문 저널리스트로, 각종 매거진, 네이버 VIBE, NOW 등에서 글을 쓰고 있다. KBS, TBS 등에서 한국의 음악, 드라마, 예능에 관해 설명하는 일을 했고, 아이돌 전문 기자로서 <아이돌 메이커(IDOL MAKER)>(미디어샘, 2017), <아이돌의 작업실(IDOL'S STUDIO)>(위즈덤하우스, 2018), <내 얼굴을 만져도 괜찮은 너에게 - 방용국 포토 에세이>(위즈덤하우스, 2019), <우리의 무대는 계속될 거야>(우주북스, 2020) 등을 출간했다. 사람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