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은이 쓴 영화 시나리오로 만화를 그려보자고 제안한 쪽은 정이용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 함께 콘티를 짜고, 캐릭터도 같이 구상한다. 이동은 감독은 둘이 작업한 다섯 편의 장편 중 세 편을 영화로 만들었다. 정이용 작가는 영화와 무관하게 만화를 그릴 뿐이다.
『환절기』, 『당신의 부탁』, 『니나 내나』 출간 순서와 동명의 영화 개봉 순서가 같아요. 만화든 소설이든 원작은 늘 선택‘당하는’ 존재인데, 두 사람 경우에는 겹쳐요. 계획한 일인가요?
정이용 (이하 정) : 전혀요. 지금은 만화도 여러 권 선보였고, 영화도 여러 편 나와서 순차적으로 일어난 일 같지만 『환절기』는 어떤 계약도 없이 그리기 시작했어요. 다 그리고 나서 여러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고요. 시나리오를 쓸 때도 영화제작 계획은 전혀 없었고요.
이동은 (이하 이) : 저예산 독립영화라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원작자라는 게 중심을 잡는 데 도움이 됐어요. <환절기> 시나리오를 다듬으면서 다양한 조언을 받았거든요. 의견 중에는 엄마(미경)와 아들의 연인(용준)이 사랑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있었어요. 그래야 관객이 든다고요. 하지만 그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잘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했죠. 다행히 제작사인 명필름에서 제 의견을 적극 수용해줘서 애초의 방향대로 나올 수 있었어요.
『토요일의 세계』에 수록한 단편 「캠프」까지 여섯 편 모두 책 형태로만 출간했어요.
이 : 고민은 했죠. 꼭 연재가 아니라도 작가가 직접 작품을 올릴 수 있는 플랫폼도 있거든요. 그런데 책의 물성대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보는 게 저희 서사에 맞다. 아직은 그렇게 생각해요.
정 : 제가 그리는 속도가 워낙 느려요. 장편의 경우, 이미 시나리오가 나와 있는 상황에서도 꼬박 1년 정도 작업하거든요. 연재는 꿈도 못 꾸는 속도죠. 하지만 ‘독자가 과연 연재를 원할까?’라고 물으면 ‘글쎄’예요. 저희 만화에는 만화적 표현이 적어요. 감정 표현은 절제돼 있고 내레이션이 한 줄도 없는 작품이 대부분이고요. 그래서인지 문학 독자가 저희 만화로 진입한 경우가 많아요.
두 사람 모두 남자여서 놀랐어요. 『환절기』부터 최근작 『진, 진』까지 발화자가 모두 여자예요. 성소수자를 비롯해 불안정한 삶의 구조를 강요받는 등장인물이 매 작품에 등장하고요. <씨네21> 김혜리 편집위원이 『진, 진』에 쓴 추천사 첫 문장이 “이동은과 정이용은 누구 하나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조금씩 몸을 기울여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린다”인데, 두 사람 모두에게 상당한 의지가 있지 않고서 이렇게 꾸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 : ‘여성 독자가 더 많으니까 여성 이야기를 써야지’ 했다면 거짓말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저에게는 그냥 자연스러웠어요. 세상의 절반인 여성 이야기를 한다는 게. 남성이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쓴 적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남성 서사에서 기대하는 남성 캐릭터가 아니어서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렇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자, 그랬죠.
등장인물의 모습에서도 여성성이 도드라지지 않아요. 『진, 진』 진아 편 첫 화를 여러 쪽 읽은 후에야 그녀가 여성인 줄 알아차렸죠.
정 : 여성을 그린다는 인지 자체가 없어요. 여성 서사지만 여성스러움을 표현해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그릴 때 젠더 표현의 양극단을 삭제하고 가운데 스펙트럼을 오가요. 진아는 저와 친한 누나를 모델로 그렸어요. 책이 나오고 누나가 주변에 책을 선물했더니 “이 사람 혹시 너야?” 하더래요. 그 누나는 중성적인 이미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그 사람’이었던 거죠.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작가도 쇼트커트를 자주 주문한다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여성성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오버’하지 않죠. 단독자인 두 사람이 어떻게 10년 가까이 공동 작업을 해왔는지 궁금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네요!
정 : 둘 다 과잉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편이라, 하하.
아들이 사고를 당하는 순간 옆에 있었던 아들의 동성 연인(『환절기』), 남편이 죽은 후 찾아온 그의 아들(『당신의 부탁』), 오래전 집을 나간 엄마를 찾아 떠나는 세 남매(『니나 내나』)를 비롯해 예사롭지 않은 가족 이야기를 펼쳐왔어요. 그런데도 끝내 막장은 나오지 않아요.
이 : 누구나 때때로 가족이 버겁잖아요. 그런데 가족 이야기의 전통적인 메시지는 ‘다시 돌아갈 곳’이더라고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가족이라는 의미의 문턱을 낮추고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적절한 거리감이 생겼고요. 온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진, 진』은 수진이 盡(다할 진)과 進(나아갈 진)을 쓰면서, 진아가 동생과 함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면서 끝맺어요. 앞선 작품들도 해피엔딩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이 : 진아는 젊은 세대인데도 매 순간 죽음과 맞닿아 있어요. 죽음이 오늘을 살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죠. 수진은 많은 ‘시작’을 맞이하지만 어떤 시작도 달갑지 않아요. 작가 후기에 “삶이 고통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노래를 부르는 일이다”라고 썼는데, 그게 저희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요. ‘현실이 지옥이니까 다 죽자’가 아니라, ‘여기서 한번 시작해볼래?’인 거죠.
정 : 제가 이동은 작가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지긋지긋하지도, 낯간지럽지도 않게 불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만화. 그 편이 우리다워요.
『환절기』 (정이용·이동은 지음 | 이숲)
첫 만화 『환절기』가 나오고 2년 후, 이동은 감독의 첫 영화 <환절기>가 개봉했다.
『니나 내나』 (정이용·이동은 지음 | 애니북스)
“시나리오를 쓸 때 세월호 트라우마 치유센터에서 일하는 분을 만났어요. 유가족과 주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고 하시더라고요. ‘내일은 꼭 휴지 사세요’ 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창한 치유가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만들도록 돕는 거라고. 그게 『니나 내나』 마지막 장면의 이유예요.”(이동은)
『진, 진』 (이동은·정이용 지음 | 창비)
“어떤 대사에는 내 의도와 판단이 작용하고 어떤 그림과 연출에는 이동은 작가의 의도와 판단이 작용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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