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영화, 소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에 나온 ‘여자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3주에 한 번 글을 씁니다. |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총 10편의 목록이 있었다. 계획대로 쓴 건 그 중 절반 뿐이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무궁무진했고 목록은 계속 길어졌다. 이 연재의 마지막 글을 무엇으로 쓸까 고민하다가, 이 연재에서 쓰려고 했던 글들이 뭐였는지 그리고 끝내 쓰지 못한 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쓰는 것으로 연재의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이 마무리를 택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이렇게 해놓으면 나중에 하나씩 잊지 않고 쓸 것 같아서이고, 여자들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나 무궁무진하다는 걸 다시 한번 환기하고 싶어서이며, 그리고 어떤 글을 끝내 쓰지 못한 이유에 대해 쓸 수 있는 만큼이라도 써두기 위해서이다.
아직 쓰지 않은 글과 쓰고 싶었던 글
목욕탕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한 달에 한번 갈 때는 몰랐는데 수영장을 다니면서 알게된 여탕문화의 정수랄까. 수영장에 딸린 여탕과 작은 사우나에 잠깐이라도 앉아있으려고 하면 아무것도 피할 수 없었다. 거기서는 주로 요즘 핫한 각종 민간요법들에 대한 정보가 교환되었다. 입담 좋은 몇몇 분은 몸이 어떻게 아픈지 그리고 그 고통을 어떤 방법으로 낫게 만들었는지 탁월하게 묘사했는데, 고통이 사라졌다며 이야기가 절정에 치달으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해당 물건(혹은 식품)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다. 말을 꺼낸 이는 진정성이 가득하게 아무 마진도 남기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귀찮지만 여러분 모두를 위해 이 정도는 해준다는 태도로 구매 희망자를 모집했다. 수영장의 ‘인싸’ 언니들은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얼마나 아픈지에 대해 기회만 닿으면 말하고 싶어 했고, 그것을 낫게 해주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돈자랑, 자식자랑, 남편자랑은 금물이었고 가장 환영받는 이야기는 ‘아프다가 나아진 썰’이었다. 남자 감독들이 사춘기 소년이 느끼는 성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자 목욕탕을 그리는 일이 가끔 있다. 이때 묘사되는 풍경은 진짜 여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여탕에 대해선 이미 마일로 작가의 웹툰 <여탕보고서>가 있으며 거기에 김유담 작가의 <이완의 자세>, 그리고 미술작가 방정아의 <급한 목욕>을 엮어서, 영국의 스파 여성공동체 이야기로 시작하는 여성 목욕의 사회문화사를 써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쓰고 싶은 글은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할머니들 이야기는 대중문화 어디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의 삶을 담아낸 다큐와 구술생애사를 통해서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 기획을 할 때 소설, 영화, 만화, 예능 등 대중문화에서 비춰진 모습을 통해 여성동성사회를 그려내겠다고 한 이유는 실존 인물을 묘사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할머니 이야기들은 대중문화가 아니라 각종 논픽션에 등장했다. 그러면 그 논픽션들을 통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이 들었다. 일곱 명의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워서 시인도 되고 영화배우도 된 영화 <칠곡가시나들>에 대해서 쓸까, 점점 나이 들어가는 엄마와 중년이 된 비혼주의자 딸이 유일하게 같이 본다는 <신계숙의 맛터싸이클 다이어리>는 어떨까.
나무 위에 올라간 고양이에게 두 달 동안 장대를 이어 밥과 물을 챙겨준 충청도의 고양이 확대범 할벤저스 할머니들 이야기는 방송국에 제보하여 나무에서 내려온 고양이가 할머니들 중 한 명에게 입양되었다는 결말까지 완벽했다. “야위었어 그치?”라고 물었던 할머니 뒤에 토실토실하기 그지없던 나무 위의 고양이가 비춰지던 장면은 기분이 우울할 때마다 몇 번이고 보고 있다. (TV 동물농장X애니멀봐) 김영옥의 <노년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송전탑 투쟁의 주인공 울력공동체의 밀양할매들 이야기와 나주여성농민생애사를 쓴 최현숙의 『억척의 기원』에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 할머니들이 만들어온 사회와 세계를 전달하고 싶기도 했다. 한 마을에서 오래 같이 살아온 할머니들의 관계만큼 찐한 여자들의 사회가 어디 있으랴. 마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고(무루), 장래희망이 자연사(미미시스터즈)인게 꿈인 사회에서 할머니들은 이제 점점 더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실존 인물의 관계성에 대한 글을 써도 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해답을 찾는다먼 송은이 김숙과 박나래 장도연 등 여자 코미디언에 대해서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있다.
끝내 쓰지 못한, ‘자매애’의 어두운 면
여자들이 서로 미워하고 잔인하게 구는 문제에 대해서는, 끝내 쓰지 못했다. 예컨데 ‘자매애의 어두운 면’에 대해 글을 쓴 조린(Joreen)의 문제의식을 잇는 글을 쓰고 싶었다. 조린은 1976년 4월,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 매거진>에 실린 ‘쓰레기 취급하기: 자매애의 어두운 면(trashing: The Dark Side of Sisterhood)’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자매애의 어두운 면(trashing: The Dark Side of Sisterhood) 전문
조린은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작은 모욕들을 견뎌내다가 결국은 자신을 완전히 무시해온 곳을 떠난다. 왜 그렇게 견디어내며 아무 말 없이 떠나게 되었냐면 운동을 신뢰했기 때문이고 운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인용된 안셀리마 델 올리오는 ‘여성운동 안에서의 분열과 자기 파괴’라는 연설문에서, 운동 내부에서 약간이라도 성취한 여성을 표적으로 삼는 공공연하고도 은밀하게 퍼져 있는 공격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조금이라도 결과중심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목적지향성이 높거나 상대를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표현하는데 관심을 쏟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명성을 찾아다니는 기회주의자, 용병, 파시스트, 엘리트주의, 권력에 미친 사람, 마침내는 남성과 동일시하는 사람이라는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쓰레기취급은 다른 사람보다도 스스로를 급진적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화되며, 이들이 주장하는 평등주의는 평등에의 지향이라기보다는 차이에 대한 공격에 가깝다. 조린은 이 모든 일들을 통칭하여 트래싱, 즉 쓰레기 취급이라고 명명한다. 왜 트래싱 같은 일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걸까? 근본적으로는 세상이 정말로 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급진성과 선명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정치적 올바름의 자리를 선점하는 것에 만족하고, 모두 함께 기여한 생각과 운동이므로 아무도 이것을 독점할 수 없다는 급진적 평등주의의 이상적 아이디어로 인해 결국 아무것도 기록되지도 대표되지도 않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이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배신자로 공격하고 낙인찍는 일이 반복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편 오직 명성을 얻기 위해서 표절을 하거나 사기를 쳐도 유명하기만 하다면 악명이어도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셀레브리티 문화’는 트래싱을 유일한 저항의 수단으로 생각하도록 더욱 강화시켰던 것은 아닐까? 이런 고민들은 여전히 머릿 속에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무궁무진한 여자들의 사회
개인의 성취는 왜 집단의 자원을 갈취한 것으로 취급되었던 걸까. 그 개인이 충분히 집단과 몫을 나누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개인의 성취와 집단의 이익을 상호적대적으로 만드는 다른 부정적인 힘이 작동했기 때문일까. 개인이면서 동시에 집단의 일원으로 여성동성사회에서 환영받고 인정받는 존재로 살아가는 건,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자매애는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홍은전의 말대로, 억압받은 자들의 본능은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는 것이다. 저항은 아주 드물게 이루어지며 그래서 놀라운 것이다.
자매애도 그렇다. 가부장제는 선택과 인정의 권력을 일부 남자가 독점하도록 만든 체제다. 그런 사회에서 여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관계로 지내는 것은 쉽지도 않고 당연하지도 않다. 똑같은 위치에 있을 때에만 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고, 조금이라도 튀거나 부족하면 원 바깥으로 내치면서 그 집단의 수준을 관리하는 것 역시 계급 사회의 여성들에게 주어진 성역할 중 하나였다. 페미니스트가 만든 사회라고 해서 완전히 해방적인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동등한 것과 동일한 것을 착각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언제나 가부장제 사회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방식으로 여성 동성 사회를 만들어왔다. 그 증거들을 대중문화 속에서 찾아내는 작업은 아주 즐거웠다. 그리고 이 연재를 시작으로, 아직 쓰지 않은 글과 쓰고 싶었던 글과 끝내 쓰지 못한 글들을 쓸 수 있게 될 것도 같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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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여성학자)
여성학 연구자. 언제나 여자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