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혹은 언데드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최초의 작품으로는 자크 투르네 감독의 1943년 영화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네즈 월레스의 동명 단편 소설(『좀비 연대기』 수록작)을 토대로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아이티의 부두교 관습을 뒤섞은 호러 영화의 걸작이다. 이 영화 속 좀비는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런 자의식 없이, 그 무엇도 바라보지 않는 눈으로 세계를 응시하며 느릿느릿 배회할 뿐이다. 여기서 좀비로 밝혀지는 여성은, 이후 우리에게 익숙해진 현대적 좀비의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흰색 긴 드레스를 입고 잘 다듬어진 금발을 늘어뜨린 채 우아하고 나른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그는, 사실상 불행한 결혼 생활에 갇혀 시들어가거나 미쳐가는 여성(‘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유명한 문구는 바로 『제인 에어』에서 비롯된 것이다)의 일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 누군가에게 억압받는 데 익숙해져서 무기력하게 순응하고, 자신의 의지를 내세울 힘조차 없는 그런 무관심의 상태 말이다. 이 무렵의 좀비는 그런 이미지였다. 일종의 골렘.
좀비에 대한 인식의 변환은 그로부터 10여 년 뒤, 1954년에 출간된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핵전쟁 이후 모종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류가 ‘죽었으나 죽지 않은 자’이자 ‘흡혈귀’인 상태로 변하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 네빌이 처절한 생존 투쟁을 벌인다. 몇 년째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지 못한 채, 밤마다 몰려와서 그의 집 앞에서 울부짖으며 신선한 피를 갈구하는 ‘언데드’들에 맞서 십자가와 마늘, 거울 등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낮에는 햇빛을 피해 쉬고 있는 언데드들을 찾아 말뚝을 박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네빌에게는 시간이 많다. 지나치게 많다. 절대적인 공포와 고독에 침잠되어가는 그는 애써 이 언데드들의 정체와 기원에 대한 정보들을 취합하려 노력한다.
“그건 착각이어야 했고, 헛소문이어야 했다. 결코 실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과학이 전설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에 전설이 과학을 통째로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네빌은 언데드에게서 추출한 혈액 견본을 통해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병원균을 관찰한다. 불가해한 전염병의 정체가 신의 저주인지 의아해하면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고작 ‘흡혈’ 박테리아에게 잡아먹힌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허무함을 느낀 네빌 앞에, 뜻밖에도 절뚝거리는 개 한 마리와 젊은 여성 루스가 등장한다.
『나는 전설이다』의 언데드는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에 등장하는 부두교의 희생자로서의 좀비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신선한 피를 갈망하고 햇빛과 십자가 등을 두려워하는 등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로부터 익숙해진 흡혈귀(뱀파이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동시에 다른 존재(박쥐나 늑대 등)로 모습을 바꿀 수 있고 불멸의 창백한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는 뱀파이어의 특징은 간데없다. 대신 시체와 다를 바 없이 피부가 썩어들어가고 악취를 풍긴다. ‘살아 있던 시절’의 기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지만(그들이 햇빛과 십자가 등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네빌은 이렇게 추측한다. “신에게 버림받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까다로운 신체적 요구를 견뎌내야 하는 위태로운 존재들”이 “전설과 미신의 오역”이라는 익숙한 옛이야기를 떠올리며 자동적으로 그것에 반응하게 된 심리적 요인일 뿐이라고), 그것을 되살리거나 기억하면서 다시금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오려 노력하는 대신 인간적인 특성을 무엇이든 파괴하고자 하는 야만스러운 포식자의 특성을 보인다. 무기력한 골렘이 아닌, 나름의 지능을 갖추고 있는 생생한 적. 이 설정은 이후 조지 로메로 감독의 1968년 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부터 시작하는 현대적 좀비의 기나긴 목록을 통해 점점 완성도를 높여간다.
리처드 매드슨이 새롭게 그려낸 좀비의 특징은, 2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50년대의 미국을 사로잡았던 전쟁(특히 핵전쟁)에 대한 몸서리쳐지는 공포심과 ‘빨갱이 콤플렉스’라는 히스테리가 온갖 SF/판타지/호러 소설 속 다양한 형태와 증상으로 등장했던 것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잭 피니의 『바디 스내처』라든가 리처드 매드슨의 또 다른 걸작 『줄어드는 남자』 등이 포착했던, 위험한 ‘외부’가 어느새 ‘우리 중 하나’로 스며들거나 혹은 다른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자신만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이되어가며 전혀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50년대-미국-남성’의 불안과 신경증 말이다.
『나는 전설이다』의 중후반부로 접어들면, 네빌은 불현듯 자신이 언데드와 더이상 구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 두려워한다. “희망보다는 살인이 훨씬 더 쉬운 세계”라는 걸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되면서(밤에는 그들이 네빌을 사냥하려 시도하고, 낮에는 네빌이 그들을 사냥한다)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정상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의혹으로 바뀌는 것이다. ‘정상인 나’는 실패하고 ‘비정상인 그들’이 성공한 걸까? 결국 그는 완전히 전도된 상황을 맞닥뜨린다. 언데드가 정상이고, 그는 반대의 존재인 것으로. “경외,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공포. 그렇다.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벌이고 천형이었다.” 지금까지 ‘정상’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순간, 살아 있는 인간을 숙주로 삼는 ‘기생충’이 아니라 그 자신들이 스스로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는 돌연변이가 되기로 결정한 순간, 그들이 결정한 그 새로운 존재의 기준 앞에서 ‘최후의 인간’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나는 전설이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당신 역시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리거나 혹은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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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범죄소설』, 『문학소녀』 등을 썼고, 『코난 도일을 읽는 밤』, 『죽이는 책』 등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