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의 두 군주, 영조 그리고 정조. 영화와 드라마 등 사극의 단골 소재였던 이들의 모습에는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이랄 게 있다. ‘영조는 불우한 아들 사도세자를 비정하게 죽인, 노회하고 히스테릭한 군주.’ ‘정조는 문예를 사랑하고 인재를 애틋하게 여긴, 인품 좋고 너그러운 군주.’
이처럼 극단적으로 대비해놓는 ‘캐릭터’는 대중문화 작품들에서 활용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그러다 보니 영조와 정조를 이런 이미지로 묘사한 작품들이 줄을 이었고, 대중은 두 인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영조와 정조의 ‘진짜’ 모습일까? 이런 인상평에 가려, 두 군주의 통치행위 전반을 오인하거나 곡해할 우려는 없을까?
역사학자 노혜경(호서대 혁신융합학부 교수)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했다. 기존의 패턴화된 시선을 넘어서서 ‘조선 르네상스’의 ‘두 리더’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했다. 그 결과물로, 신간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을 펴냈다. 베일을 벗은 영조와 정조의 진면모, 그리고 그것이 조선 후기사에서 갖는 의의를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본다.
최근 치러진 미국 대선을 계기로 ‘리더십의 위기’가 회자되는 이때, 마침 국가지도자의 리더십 문제를 역사적 시선으로 반추하는 책이 나와서 반갑습니다. 이 책을 집필하시게 된 계기,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담고자 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애초 이 책의 소재들은 ‘리더십’을 주제로 한 인문강연 콘텐츠 시리즈를 준비하며 마련되었습니다. 각계각층 리더들을 대상으로 약 4년간 영상 강연을 진행하며 차곡차곡 원고를 구축해나갔죠. 18세기 ‘조선 르네상스’의 두 임금인 영조와 정조가 시행했던 정책, 당시 사회의 변화상과 그 대응, 리더로서 발휘했던 면모들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요소들을 추출하여 책으로 엮은 겁니다. 중요한 시기에 국가지도자로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거나 그러지 못한 점들을, 그 시기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해보고 싶었습니다.
후대인의 시각으로 색안경을 쓴 채 역사의 순간들을 프레임화하고 정형화해버리는 태도는 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 우리 선대 왕의 이야기라는 이유로 어떻게든 미화하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일이겠죠. 시대 흐름에 역행한 것은 잘못했다고 평가하고, 잘 대응한 것은 잘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장면들을 한 발짝 떨어져서 차분한 호흡으로 다시 바라보고,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판단하여,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견주어 성찰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흔히 영조 하면 ‘아들을 잔인하게 죽인 비정한 군주’, 정조 하면 ‘신하에게 애틋했던 너그러운 군주’로 묘사되는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영조와 정조의 진짜 모습은 어떤가요? 두 왕의 ‘리더’로서의 캐릭터를 분석해보자면요?
우선 영조는 대단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대응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임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직접 마주하는 신하들, 그리고 궐 밖 대중의 심리를 잘 읽어내고, 그걸 활용해서 적절한 정책들을 이끌어낸 면이 돋보입니다.
반면 정조는 정석대로, 성리학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면서 대단히 높은 수준의 지식을 쌓아, 스스로 최고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이로써 자신이 모든 걸 조정할 수 있다고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자신이 재단한 대로 들어맞지는 않았지요.
영조와 정조 모두 즉위하기까지 엄청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과정과 배경이 콤플렉스로 작용했고, 두 임금 치세 내내 거기에 발목 잡힌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적극적으로 극복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를 일으키곤 했죠.
두 군주의 성장 배경이 그들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군요. 아쉬운 건, 두 인물 다 강력한 혁신 의지를 갖고 국가 개조에 나섰는데, 결국 조선은 점차 기울어져 갔다는 점입니다. 혹시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영조나 정조가 당시 다른 판단을 했더라면 이후 조선의 국운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영조의 판단 중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역시, 사도세자의 운명을 결정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다른 판단으로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후계 구도뿐만 아니라 구한말,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분명 달라졌을 거예요. 그러나 그 흐름이 반드시 더 나은 방향으로, 근대화를 불러오고 국가가 번성하는 쪽으로 진행되었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정조의 경우는 역시,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본인이 구상하고 시도했던 여러 정책들이 결실을 맺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다 보니, 이후 정국도 급속한 세도정치로 기울어간 것 같은데요. 정조의 개인 성향이나 정책적 지향 등을 놓고 볼 때, 그가 더 오래 살아서 자신의 손으로 결과를 냈다면 후세에 좀 더 정확한 평가가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강력한 개혁 의지가 정통 성리학으로의 회귀 쪽으로 기운 성격이 짙기 때문에, 18세기 세계가 나아간 근대화의 방향과는 동떨어진 부분이 많긴 합니다만…… 글쎄요, 정조가 오래 살았다면 조선도 좀 더 일찍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국가지도자의 리더십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니, 현대 한국 대통령들이 맞은 비극적 결말이 떠오르네요. 정치세력 간 대립으로 정치지도자들의 불행이 거듭되는 현대의 정국에 있어서, 영조와 정조의 사례들 중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게 있을까요?
조선의 임금은 종신직이었기에, 현대 민주주의하 정치지도자들의 경우와는 전제가 다르다는 점을 우선 밝혀둬야 하겠습니다. 전반적으로 조선의 임금은 퇴임 이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죠. 그보다는 훗날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임금도 있었지만요.
정조의 경우 자신의 퇴임 이후를 준비한 것 같습니다. 화성 건설이 대표적 사례로 보이는데요. 수도 서울이 아닌 경기에 새로운 도시를 인공적으로 조성하고, 도시 내에 주민들의 삶터와 일터가 마련된 가운데 자족적인 삶을 꾸릴 수 있도록 구상한 겁니다. 물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가까이에서 효를 실천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도 하는 말년을 구상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영조나 정조의 재위 기간 동안 이어진 신하들의 파당적 분위기는 국가 개조나 혁신 같은 명제보다는, 정국을 정무적 판단에 따라 조정하고 그에 맞는 경제, 사회, 제도 등으로 몰고 간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두 임금 모두 즉위 과정에서 특정 당파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터라, 임금인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게 하기가 쉽지 않았죠.
당시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급속도로 바뀌고 백성들의 인식조차 급변하고 있었는데, 정치판에서는 이를 커버하고 전력을 쏟을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 아쉽습니다. 물론 영조와 정조 때만의 문제였던 건 아니에요. 좀 더 근원을 찾자면, 숙종이 그런 분위기의 판을 깔고, 그 영향이 아들과 증손자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라 볼 수 있죠.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요소들 중 하나는, 동시대 조선과 서양의 정치·경제·사회상을 병치하여 소개하는 부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역사 속의 특정 맥락을 당대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살펴보는 작업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이런 비교 방식은 제가 미국 UCLA에서 박사후 과정을 하면서 그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던 부분입니다. 당시 지도 교수님과 대학원 수업 co-teaching을 진행했는데요, 한국의 대학원처럼 석, 박사 과정 학생들이 같이 참여하는 수업이었습니다. 그들의 전공을 들어보니, 크게 보면 한국학이지만 세부적으로는 다 달랐죠. 가장 크게 와닿은 건, 한국학 전공이라고 해서 한국학이나 한국사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석사 과정까지 전공 분야 외의 관련 학문 수업을 모두 이수하게 하고, 자국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박사 과정 중에는 course-work를 마치면 반드시 전공하는 나라에 가서 유학을 하도록 했습니다. 조선 후기를 다루는 대학원 수업에서도 조선만 연구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기본적인 시각은 동아시아 속의 조선, 세계 속의 아시아라는 개념이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한국사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한국사 전공자가 제일 영어 못해”라는 농담이 오갑니다. 한국사 전공이랍시고 한국사만, 사료만 들이판다는 거죠. 깊이 파는 게 물론 좋긴 한데, 문제는 외국인 연구자들과 교류하면서 터져 나와요.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렇게 들이판 한국사가 당대 세계사 속에서 어떤 의미 맥락을 갖는지 제시하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석사 과정부터 전공만 공부하는데, 이렇게 우리 것만 알면 ‘무조건 우리 게 최고’만 부르짖을 수밖에 없게 되죠.
우리를 둘러싼 당대 세계의 여러 사례를 앎으로써 우리의 위치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 사료를 아주 깊게 분석하는 동시에 세계의 거시적인 흐름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분석, 논리적인 판단이 가능하도록 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요즈음 학문 간의 벽을 깬 통합적, 융합적 사고를 강조하는 경향이 보이는데, 참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비교 연구나 학제 간 융합의 방식으로 진행하시는 연구 작업을, 나중에 또 다른 콘텐츠로 만나보게 될 수도 있겠군요. 유튜브를 통해서도 대중과 소통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앞으로 책이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대중과 공유하게 될 주제가 무엇인지 귀띔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멤버로 활동 중인 유튜브 채널 ‘인문채널 휴’에서,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그러한 방식으로 접근한 콘텐츠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직 변호사님과 함께 조선의 법을 다뤄보고 있고요, 제가 경영사, 기업사 쪽으로도 연구하는 터라 경제학 박사님과 함께 코너를 진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축한 콘텐츠들을 유튜브에서도 일부 공유하고, 따로 책으로 엮어낼 계획도 세워두고 있습니다. ‘목민심서 새로 보기’ ‘조선의 법 이야기’ ‘조선 경제 이야기’ 등의 주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인문채널 휴’는 전쟁사 분야에서 유명한 임용한 박사님을 주축으로, 저와 동문 선배들이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인문학의 공유와 대중화를 목표로 합니다. 이 멤버의 인연은 제가 석사 과정일 때 진행된 중세사 연구반의 ‘경제육전팀’에서 시작되었죠. 지금은 전하지 않는 조선의 법전 ‘경제육전’을 복원하고, 이것이 ‘경국대전’으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는 세미나 팀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완결한 뒤 평생교육, 인문학 교육을 할 수 있는 장을 함께 마련해보자는 생각을 멤버들이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인문채널 휴’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으로도 장을 넓혀서 ‘아카데미’로 나아가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과거의 역사를 배워 미래를 준비한다.’ 맞는 말입니다. 역사란 거대한 빅데이터인 셈이니까요. 문제는, 역사를 안다고 해서 곧바로 우리의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작위로 얽혀 있는 막대한 데이터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정보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뽑아 엮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것이 무조건 좋다, 옳다고 여기는 건 자만입니다. 열린 자세와 객관적인 시각으로 역사 속에서 유의미한 데이터를 뽑아내고, 그것을 기반으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설계를 해내야만, 진정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조와 정조는 조선을 대표하는 군주입니다. 이들이 재위했던 18세기는 알다시피 전 세계적으로 다이내믹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당시의 기록을 꼼꼼히 살피면, 조선이란 작은 나라가 임금을 중심으로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는지, 성장하는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등 다른 시기에 비해 사료의 종류도 많고, 재위 기간이 길었던지라 기록의 양도 많아서 비교적 상세하게 그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는, 그처럼 다양한 사료들을 나름대로 꼼꼼히 분석하여 내놓은 결과물입니다. 두 군주가 행한 정치적 행위, 법과 제도의 집행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어떤 리더십을 발휘했는지 낱낱이 밝혀보고자 했습니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리더십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달라지는 부분이 물론 있습니다만, 인간의 본성과 욕망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시대를 뛰어넘어 적용될 수 있는 가치들은 분명 많습니다. 가능한 한 사료에 충실하면서 판단의 근거를 최대한 풍부히 제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책을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현대사회의 많은 장면들이 오버랩됨을 느끼실 겁니다. 이 책을 통해 오늘 우리 사회의 리더십을 되짚어보는 계기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노혜경 호서대학교 혁신융합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UCLA에서 Postdoctoral Scholar 과정을 거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실학박물관 학예사, 덕성여대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조선후기 수령 행정의 실제』 『영조어제 해제 6』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공저) 『인도, 신이 인간이 되어 사는 세상』(공저)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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