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라디오』는 20년째 라디오 작가로 살고 있는 남효민 작가의 첫 에세이다. 매일 성실하게 써온 방송 원고를 모으고 엮어 출간할 수도 있었지만, 라디오 안에서 보낸 20년이라는 시간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도 충분한 의미가 있기에, 새롭게 글을 쓰고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의 가장 특별한 점은 다양한 형태의 실제 라디오 원고들이 실려있다는 것이다. 오프닝 원고는 물론 에세이 코너 그리고 청취자의 사연을 각색한 원고까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디제이에 따라 프로그램에 따라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원고를 써내는 라디오 작가의 진짜 역할을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라디오』 책 제목이 호기심을 자아내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년 동안 라디오 작가를 했는데 이쯤에서 한 번은 내가 하는 일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방송 원고를 묶어서 책으로 낼까 고민할 때, 편집자님께서 라디오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얘기들을 쓰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주셨어요. 지난 원고들보다 라디오를 통해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돌아보는 시간도 의미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해보기로 했습니다.
라디오 작가로의 처음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뭐가 됐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는 싶었는데 라디오 작가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대학시절 친구가 ‘라디오 작가 해볼래?’라는 얘기를 했는데, 그 때도 그런 게 있구나 정도였죠.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후,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당시 방송일을 하던 선배가 ‘별밤에서 작가 구하는데 한 번 해볼래?’라고 또 얘기를 하더라구요. 제가 어릴 때 처음 따뜻함을 느꼈던 라디오가 별밤이어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몇 가지 코너 아이템을 만들어 면접을 보고 그렇게 우연인 듯 운명처럼 시작하게 된 거 같아요.
오랜 시간 라디오 작가로 살아오셨는데,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라디오의 매력’은 무엇인지요?
처음에는 ‘쌍방향 소통’이 라디오의 매력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매체에는 없는 소통이 가능한 게 바로 라디오였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매체들이 많아졌죠. 유튜브나 팟캐스트 같은 것들이요. 심지어 요즘은 팁이 프로그램이나 홈쇼핑에서도 시청자들의 실시간 참여를 유도하고 있어서 더 이상은 ‘쌍방향 소통’이 라디오의 매력은 아닌 거 같았거든요. 그런데 책을 쓰면서, 제가 오랫동안 라디오 작가로 일할 수 있었던 매력을 더 깊이 알게 됐어요. 라디오는 따뜻해요. 변함없이 한결같이 내 옆에 있어주는 오래된 친구 같은 따뜻함이 있어요.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거 같고, 내 편 들어줄 거 같고. 라디오에서 만나는 사연 속 사람들은 생각이나 생활이 나랑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만 결국 다 사람 사는 얘기잖아요. 그거만큼 재밌는 얘기가 없죠.
남효민 작가의 글은 따뜻하고, 쉴 곳을 만져준다는 추천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편안하게 사람들을 어루만져주는 작가님 만의 글쓰기가 궁금해지는데요. 라디오 원고를 쓸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합니다.
일단은 소재를 정해요. 소재를 정하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진 않고요. 그 날의 이슈가 소재가 될 때도 있고, 청취자 사연을 가지고 쓰기도 하고, 책이나 영화에서 본 좋은 글, 전날 밤 드라마에서 본, 인상깊은 대사가 소재가 되기도 해요. 소재가 정해지면 디제이의 말투에 맞춰 원고를 씁니다. 사실, ‘소재가 정해진다’는 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다’는 것까지 다 정해지는 거라서, 그 소재를 어떤 내용으로 풀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어요. 예를 들어 며칠 전엔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부모가 쓴 SNS를 봤는데, ‘아이가 친구 랑 놀고 싶다고 얘기하다가, 친구 얼굴이 헷갈린다’며 펑펑 울었단 얘기였어요. 지금 아이들에게 친구라는 건 마스크를 쓰고 서만 만날 수 있는 친구, 가까이 가면 안되는 친구, 손잡고 껴안고 뒹굴며 놀 수 없는 존재가 된 거죠. 그 생각을 하고, 언젠가 오프닝으로 써야 지 생각했는데, 마침 그 날 디제이한테 전화가 왔어요. “초등학생들한테 너무 미안해요. 이 얘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 얘길 오프닝으로 썼어요. 코로나 19가 빼앗아간 아이들의 친구를 되찾아 주려면 어른들이 더 잘 해야 된다, 그런 얘기로요. 일상에서 듣고 보는 모든 것들이 소재가 되기 때문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힘든 일 있을 때 막 털어놓고 누가 공감해주면 그래도 좀 위로가 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쉴 곳, 따뜻한 느낌을 받는 게 아닐까 합니다.
청취자들의 사연들로 만나는 라디오의 매력도 참 크더라고요. 작가님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청취자의 사연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너무 많지만, ‘돌아가신 엄마의 마지막 김치 한 통’ 얘기가 요즘도 종종 생각날 때가 있어요.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가, 친정 엄마가 해 주신 마지막 김치라는 걸 알고 김치통을 붙들고 울었다는 사연이요. 신 김치 먹게 될 때마다 그 분 생각해요. ‘그 때 그 김치는 어떻게 하셨을까, 다 드셨을까, 아직도 먹지 못하고 거품이 보글보글 나는 채로 그대로 두셨을까.’ 사연을 각색해서 쓰는 동안 저도 많이 울었고, 방송에서 읽던 디제이도 울컥했고, 그 날 사연을 들은 청취자들도 많이 울었다는 피드백을 보내오셨어요. 자랑 같지만 ‘엄마 얘기’는 그동안 제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연을 읽고 각색해 소개하면서 어쩌면 내가 아직도 진짜 삶을 잘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울림이 큰 것도 있었지만요.
데일리 마감 생활자로서 일에 권태가 오거나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제가 좀 제 상태에 둔한 편이라서, 권태나 슬럼프가 왔어도 잘 모르고 지나갔을 거에요. 지나고나서 ‘그게 권태였나? 슬럼프였나?’ 한 적은 있는데, 공개방송 준비하다가 크게 다쳤을 때였어요. 그 때도 마약성 진통제 맞아가면서, 허리에 보호대 두르고 계속 일을 했는데 지나고 나니까 제가 그 때 몸 뿐 아니라 마음도 많이 힘들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어요. ‘일을 그만 해야 하나’ 이 생각을 그 때 가장 많이 했는데 그게 슬럼프라면 슬럼프였겠죠.
그러니까 굳이 해결책을 말하자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두는 거. 지나가니까요. 슬럼프나 권태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있어요. ‘하기 싫어, 쓰기 싫어’ 하다가도, 쓰고, 방송에 나가고, 그 날 반응이 좋으면 진짜 힘들었던 거 다 잊어버리게 되거든요. 하루 방송 마치면 ‘오늘도 방송 잘 털었다’고 하는데, 기분 좋게 턴 날은 잠도 잘 오고 퇴근길이 가벼워요. 그렇게 하루하루 털어버리니까 쌓이지 않는 거 같기도 해요.
이 책을 만나게 될 독자분들, 라디오 작가를 꿈꾸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책의 오프닝과 클로징에서도 독자들에게 제 마음을 소심하게 전했는데, 언젠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사연과, 디제이의 얘기와, 한 곡의 노래에 따뜻한 위로를 받으셨던 적이 있다면, 제 책의 어느 한 줄 쯤에서 그 때 따뜻한 기운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 어요. 라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닮아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은 분들께도 만약 이 책을 읽고 어느 한 줄쯤, 라디오 작가로서의 꿈에 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다면, 뻔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계속 쓰라는 얘길 드리고 싶어요. 일기든 짧은 메모든 책을 읽고 한 줄 내 생각을 적는 것이든 뭐든지 꾸준하게 쓰는 것만큼 훌륭한 트레이닝은 없는 거 같아요. 며칠 전에도 갑자기 그런 생각을 떠올렸었는데, 저는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된 열두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뭘 안 쓴 날이 없어요. 요즘은 특히 SNS까지 있으니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뭘 쓸 수 없는 날도 SNS에라도 몇 자 끄적이게 되니까요.
제 책을 읽어 주시고 지난 어느 날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떠올려 주시는 분들,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라디오를 그려보는 분들이 꾸준히 계시기 때문에 라디오는 오래 사랑받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제 책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라디오처럼… 순간 반짝이지 않아도 따뜻하게 오래오래.
*남효민 20년째 라디오 작가. 말을 하는 자리에선 늘 버벅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랬듯 백일장은 좀 휩쓸었다. 그래서 말보다 글이 더 편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라디오 작가 생활을 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쓰는 건 글이 아니라 말이라는 걸 알았다. 이왕이면 재밌게 살고 싶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지금이 행복한 게 좋다. 아무리 좋아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남자친구의 고양이 찡찡이와 티거, 그리고 60여 마리의 도마뱀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그래도 안 되면 꼬마 조카 예린이와 영상통화를 한다. 가능하면 할 수 있을 때까지 좋아하는 것들을 돌보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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