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정은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소설을 쓴다는 건 타인의 삶을 생각하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신작 『연년세세』를 쓰면서 등장인물들이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을 할 때마다 마음을 다쳤다는 황정은 작가. 그럼에도 계속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보지 않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삶, 누군가는 이미 살아버린 타인의 삶을. 그리고 그런 삶에 대한 자신의 몰이해를. 1946년생 여성 이순일과 그의 딸 한영진, 한세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네 편의 이야기를 묶은 『연년세세』는 지난 수년간 황정은 작가가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이자 『디디의 우산』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신이다. 이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가닿을까. 황정은 작가는 ‘작가의 말’에 ‘누구에게 어떻게 읽히건 필요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고 썼다.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138쪽)
마음을 다쳐가며 쓴 소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에요.
후기에 그렇게 썼지만 오로지 그 이름 때문만은 아니에요. 순자라는 이름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생각했고 『연년세세』의 씨앗이 그때부터 있었지만, 씨앗이 싹 튼 시기는 『디디의 우산』에 있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낸 후였어요. 그때부터 이상하게 ‘대대손손’이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더라고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 비슷한 말이 등장하거든요. 좋아하지 않는 말인데 자꾸 생각났어요. 그래서 ‘연년세세’라는 제목으로 가부장제가 각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하는 소설을 써보고 싶었고 구상을 시작했어요.
사실 제 할머니 성함도 순자예요. 이순일처럼 호적상의 이름은 아니고요. 신기하고 반가운 동시에 ‘순자’라는 이름의 뜻을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순자’라는 이름이 정말 많아요.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고 지금도 많은 여성들의 삶에 ‘순자’가 있는 것 같아요. 아이의 이름을 굳이 순자라고 부를 때, 어른들이 기대하는 것이 있잖아요. 순한 아이. 그런데 순하다는 것을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어떤 생각인가요?
한 사람의 삶이 온전히 본인의 선택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잖아요. 다양한 삶의 조건이 있고, 조건들은 시대 상황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순한 아이로 살기를 요구받고, 그런 이름으로 호명되는 게 대체 어떤 일일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두 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고요.
그 과정에서 신기한 경험을 하셨다고요.
말을 잘 못하시더라고요. 평소엔 말을 잘 하시는 분들이거든요. 특히 한국전쟁과 이후 몇년에 대해서는 말씀을 잘 못하셨어요. 술어를 말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제 얼굴에서 말을 찾으려는 것처럼 저를 열심히 쳐다보면서 말하려고 노력하는데 말을 잘 찾지 못하셨어요. 그분들도 그때 깨달은 것 같았어요. ‘내가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구나’하고요.
아,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다고요?
네. 말을 잘 할 수 없으니까 자꾸 변명하듯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때는 다들 이런 일을 겪었고, 더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도 많아서 어디 가서 말해본 적이 없다’고요. 피난 이야기를 들으려고 진행한 인터뷰였는데 그때 들은 피난 이야기에서 『연년세세』에 들어간 건 한두 군데 정도예요. 말의 내용보다는 말하는 형식에 관심이 갔고요.
독자 리뷰를 보면 소설 속 인물들에 공감하면서도 마음 아파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소설 쓰기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지만, 『연년세세』를 쓰면서 고생을 조금 했어요.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서요. 보통 단편 하나를 쓰는데 길어야 두세 달 걸리는데 <무명>을 6개월 정도 쓴 것 같아요. 스스로를 괴롭히면서요. 180매까지 썼다가 처음부터 다시 쓰기도 했고요.
어떤 점이 가장 괴로웠나요?
인물들의 삶에 제가 납득할 수 없는 선택들이 계속 등장해요. 그러다 보니 소설을 쓰면서 인물들과 싸우는 거예요. 그 인물은 이미 어떤 선택에 따른 삶을 반평생 이상 살아버렸는데 저는 소설 바깥에서 그 인물한테 계속 ‘왜’를 물으면서 괴로워하는 거죠. 아주 마음 아픈 문장을 써놓고 나서요. 결국 납득했지만, 그 과정에서 계속 마음을 다쳤어요. 그래서 소설을 쓰기가 힘들었고요.
가장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이 있다면요?
글쎄요. 예를 들어 기혼의 삶이 그랬고요. 이순일이 한영진에게 생계를 의탁한 것이나 한세진이 한영진의 삶을 무대에 올린 것들이요.
화해를 원하지 않았어요
이순일과 한영진의 관계와 갈등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영진이 끝내 이순일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잖아요.
일단 갈등 해소가 이 소설의 목적은 아니었어요. 말 몇 마디로 해결될 수 있는 갈등도 아니고요. 어떤 갈등 상황에서 한바탕 퍼부어대면 그 순간의 감정은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르죠.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사실 저도 ‘한영진은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안 하더라고요 한영진이. 그건 제가 아니라 한영진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한영진은 왜 끝내 말하지 못했을까요?
한영진의 원망은 이순일을 향하고 있지만, 온전히 이순일만 탓할 수는 없다는 걸 한영진도 알 것 같았어요. 이순일에게 원망을 터뜨린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요. 살림과 육아로 이순일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도 한영진은 알고 있고요. 게다가 가장 역할을 충실히 해 온 한영진이라면 이순일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한세진이 한만수에게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메시지를 받고 모욕감을 느끼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이때 한세진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모성애에 대한 칭송, 정언명령과 같은 말이 기만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만수가 이야기하고 있는 맥락에서요. 한세진도 그걸 즉각 알았을 거고, 소설 바깥에서 이 상황을 목격하는 독자들도 한세진과 같은 감정을 느낄 거로 생각했고요. 그리고 한만수가 정말 베풀듯이 이야기하거든요. 영어를 번역한 것 같은 말투로요.
그 부분에서도 멈칫했어요. 정말 베푸는 말로 들려서요.
‘모성은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말들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베풀어져요. 다들 알잖아요. 그래서 그런 유사한 이야기를 접했을 때 누군가는 모멸감을 느끼는 거죠. 이제는 너무 많은 여성이 눈치를 채서 예전보다 더 많지 않을까 싶고요. 한세진도 그런 인물인 거죠. 그리고 한세진이 이런 상황에서 모멸감을 느끼는 인물이기 때문에 한세진으로 마지막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모멸감에 대한 보상 같은 건가요?
아뇨. 이전 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 이전 세대의 삶을 알고 있지만 다른 선택을 하고, 앞으로도 할 수 있는 화자의 이야기로 마지막 단편을 쓰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말>에 한영진이 김원상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 ‘특별한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하죠.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면서 답답했던 것 같아요.
한영진의 이런 생각들과 다투는 게 대단히 힘들었어요. 소설 초반에 한영진이 “매력 있다”는 말을 듣잖아요. 한영진이 즉시 말해요. “나는 이미 40대고, 결혼도 했다”고요. 반발하듯이. ‘내게 매력 있다고? 그럴리 없어’ 하는 태도인데 그 이유가 ‘나는 나이 먹었고 이미 결혼했고 아이도 있다’ 였어요. 이 반사적인 반응이 이상하고 속상했어요.
현실에서 많은 여성이 한영진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을 폄훼하는 말 같은 것들이요. 자주 들어서 자주 하게 된 말 같은 거. 한영진은 본인이 왜 이런 대답을 하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지만 저는 그 대답이나 태도의 맥락을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걸 생각하면서 일일이 마음을 다치는 거죠. 소설 바깥에서.
한영진과 작가님이 대치하는 상황이…(웃음)
대치까지는 아니지만… 그렇죠. 앞에서 말씀하신 '특별한 악의’ 같은 것도… 모종의 악의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소설에서 그렇게 말해버리면 그건 한영진이 아니라 작가의 말인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하고 싶은 말>에서는 한영진이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말들을 제가 받아 적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또 발생해 버리고 그건 소설 바깥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도 계속 쓰게 만든 동력이 있다면 뭘까요? 마음을 다치면서 써야 했던.
한국 전쟁을 겪은 세대의 삶, 선택이라는 게 그다지 가능하지 않았던 시기에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잖아요. 살림을 정말 사람을 살리는 일로 경험한 어떤 사람의 삶이요. 출산과 양육을 감당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여성의 삶에 대한 몰이해가 저한테 있었고, 그런 몰이해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나 봐요. ‘더’ 생각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어요. 내가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현실에 이미 있는 삶들에 대해서요. 실은 이 욕망이 이 소설들을 쓰게 만든 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디디의 우산』에 이은 연작소설인데 이유가 있나요?
연작소설을 선호하는 건 아니고요. 하나의 흐름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보려고 하니까 여러 시점이 필요해서 연작이라는 형태로 계속 작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디디의 우산』이나 『연년세세』 이전에 한 작업도 실은 연작 성격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예전에 “이야기가 이야기를 불러온다”는 말도 하셨더라고요. 같은 맥락인가요?
어렴풋이 기억나는데요. 아주 예전인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그냥 어떤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그게 어느 순간 소설이 돼요. 지난 10년간 저를 계속 생각하게 만든 건 한국 사회였고요.
소설 속 장면에 관해 묻고 싶을 때가 많은데 망설여져요. 독자들의 해석을 제한할 것 같아서요. 소설에 대해서 작가가 어느 정도로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요?
기본적으로 많이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디디의 우산』 과 『연년세세』의 경우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독자와 작가 사이에 대화가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제 다른 책들보다 조금 더. 그래서 이 소설들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어요.
말을 많이 하는 걸 꺼리는 것 같아요.
말은 생각보다 빠르잖아요. 실수할 수밖에 없어요.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말들을 하거나, 습관 같은 말들을 나중에 보면 모골이 송연해질 때가 많아요. 저도 수십 년을 한국 사회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내면화하고 있는 상투적인 말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 말들이 언제 나올지 몰라서 긴장하는 편이에요.
책 앞부분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라는 글귀를 사인과 함께 쓰셨어요. <다가오는 것들>에도 비슷한 문장이 있고요. 어쩌면 이 소설을 통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싶은데요.
<다가오는 것들>에 ‘안나는 안나의 삶을 여기서’라는 문장이 있는데 그게 나올 줄 몰랐어요. 그 문장을 쓰면서 이 소설이『디디의 우산』을 향한 답신 중 하나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디디의 우산』에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그 문장을 자주 생각했거든요. 그 문장을 ‘안나는 안나의 삶을 여기서’라는 문장으로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책의 앞에도 그 메시지를 쓰고 싶었고요.
이순일이 잘 사는 게 뭔지 모르면서 ‘잘 살기’를 바랐다고 말해요. 이순일의 말을 빌려서 ‘잘 살기’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는데요. 작가님에게 ‘잘 살기’란 무엇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저도 ‘잘’의 의미를 열심히 생각하고 노력하는데요. 많은 사람이 ‘잘 살기’가 무엇인지 질문할 기회도 없이 사는 것 같아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잘 사는 삶이라는 게 답이 하나일 수 없는데도 그렇죠. 그러니 이런 질문들을 더 여유 있게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좋겠어요. 이순일 뿐만 아니라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잘 사는 게 무엇인가라는 내용이 개인적으로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채로 거대한 질문이 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너무 큰 소리로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이미 많은 삶이 그렇게 연년세세(年年歲歲)로 이어져 왔고요. 앞으로는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이미 많은 여성이 온 사회가 자기한테 하는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챘으니까요. 충분하지는 않지만, 달라진 것들이 있고 앞으로도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황정은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올해의 문제소설’에 선정되고, 한국일보 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더」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아무도 아닌』,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연작 소설 『디디의 우산』 등을 썼다. 한국일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대산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양의 미래』로 제5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나 현대문학 사태로 상을 반납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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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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