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례를 무릅쓰고 첫인상을 말하면, 전현우 저자는 <은하철도 999>의 철이를 닮았다. 철이가 은하철도를 타고 은하계의 행성을 누비며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면, 전현우는 철도 속에서 사유하고 기록하면서 ‘철도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생명을 얻고 있는지’ 정밀하게 묘사한 552쪽짜리 백과전서를 만들어낸다. 얼마 전 출간된 『거대도시 서울 철도』가 그 책이다. 이쯤 되면 철도를 연구하는 박사님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의 본업, 아니 본캐는 철도와는 거리가 있는 서울시립대학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원이다. 대학에서는 분석철학을 공부했다. 철도 연구라는 ‘부캐’의 탄생은, 경인선 지옥철을 온몸으로 기억하는 인천 사람, 세상을 실질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과 버무려진 교통 데이터에 대한 관심과 분석이 동기가 됐다. 2013년 12월 철도파업을 보며 한국철도사를 재정의 관점에서 살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2014년 봄부터 조사와 기획을 시작했으니 실제 책을 만들기까지 걸린 시간은 총 6년. 책 속에는 전 세계 거대도시 50개의 철도를 시작으로 서울을 둘러싼 철도망에 대한 분석, 한국 철도의 역사를 되짚은 뒤 저자가 제안하는 총 946km에 달하는 철도망 계획 등이 쉼 없이 지축을 울린다. 한마디로 ‘부캐’의 대단한 야심작이다.
도대체 철도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매력적인가요?
사실 탈것 혹은 길 자체보다는 이동, 그리고 탈것과 길이 주변 도시와 맺고 있는 관계에 더 관심이 큰 것 같아요.
본캐라고 할 수 있는 분석철학자의 면모와 철도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이번 작업 역시 일종의 철학적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철학은 어떤 분야가 기반하는 세계관, 그리고 그 분야가 다루는 개념적 장치와 논리를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일인데, 이 책은 교통의 세계 속 철도에 대해 바로 그런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이런 방향으로 철학이 나아가야 한국 학계의 지적 분업이 더 정교해지고 그로부터 사회 전체가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책을 펼치면 알듯 모를 듯한 그래픽이 장관을 이루더군요.
인천 집에서 출발해 서울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70~80분 정도 앉아 있는데, 그 시간 동안 지도 한 장을 대충 그릴 수 있어요. 인덱스의 경우는 일부러 경부선을 완주하며 작성했고요. 내려가는 건 ITX, 올라가는 건 KTX. 인덱스 양이 무지막지해서 하루 종일 걸려 반 정도 작성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꼼꼼한 서술과 통계, 그래프가 독자들에겐 친절하고 쉽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꼭 읽어줬으면 하는 추천 챕터가 있을까요?
‘철도라는 사회계약’이라는 타이틀을 단 3부를 추천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지출하는 교통비에 대한 설명이면서, 미래의 교통비에 대한 큰 그림을 다룬 부분이거든요. 특히 기후위기 대책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돈을 철도에 써야 할지 몰라요. 정말 그 돈을 쓸 가치가 있는지, 납세자이자 교통망 이용객으로서 깊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거대도시 철도개발지수를 따질 때, 서울엔 어떤 점수가 매겨졌나요?
철도개발지수가 높으려면 전국망 열차의 착발 능력이 높고, 철도의 밀도가 높고 이용객이 많아야 해요. 또한 거대도시권 중심 도시의 시계를 통과하는 철도망의 규모가 충분해야 하고, 시계 내부에 철도 병목도 적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울은 총점 면에서 어중간해요. 거대도시 50개 중 22등 수준. 물론 도시철도(지하철) 관련 지표에서는 한 자릿대 등수로 올라서지만, 비유하면 중간고사만 잘 본 학생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철도는 공기처럼 주변을 맴도는 교통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일반 독자에게 ‘철도의 매력’을 짧게 설명한다면요?
교통은 통행마다 이유가 달라요. 저는 승객들 각각이 가진 수백, 수천 가지 동기와 이유를 단 하나의 차량에 담아 나르는 열차를 보며 경이를 느끼곤 합니다. 철도는 공간적 개발의 초점이면서 이동의 기회를 형평성 있게 배분하는 대중교통 체계의 주축이에요. 더불어 기후위기 속에서 교통과 도시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데 무엇보다 의지할 만한 수단입니다.
계속 언급되는 기후위기가 부제에도 달려 있어요. ‘기후위기 시대의 미래 환승법’, 어떤 이유일까요?
여객 수송을 기준으로 도로나 항공에 비해 철도의 에너지 효율은 10배, 탄소 효율은 5배 높아요. 토지 소비 효율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면적의 철도 용지는 도로 용지에 비해 승객을 실제로 3배 많이 나릅니다. 재생 에너지로 만든 전기로 달리는 자동차라도, 에너지 효율 때문에 철도보다 훨씬 넓은 토지를 필요로 할테고요.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에 대한 장기 대책의 핵심은 자연 생태계와 인간 활동 사이에 거리를 두는 일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인간의 토지 소비량 자체를 줄이는 건 훌륭한 감염병 대책이기도 합니다. 기후 대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개발도상국의 저탄소 개발에서 철도가 가진 잠재력이야말로 실질적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이에요.
‘부캐’의 다음 행보 역시 철도 위를 달리는 일일까요?
과학철학 이야기를 다룬 책을 쓰는 일, 미국 전력망의 역사를 다룬 책을 번역하는 일과 더불어 수도권의 구체적 노선에 대해 이미 써둔 원고를 다시 살릴까 싶은 생각이 있어요. 이번 책보다는 이용객의 피부에 와닿는 분석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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