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8월 우수상 - 환불과 취소로부터의 사색
작년 여름은 페스티벌 사진들이 신나게 피드를 도배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올여름은 ‘취소’, ‘연기’, ‘환불’과 같은 단어들뿐이다.
글ㆍ사진 모범피(나도, 에세이스트)
20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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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ji Rock Festival Cancelled (후지락 페스티벌 취소)’

오늘 인스타그램을 열고 처음 본 포스팅이다. 작년 여름은 페스티벌 사진들이 신나게 피드를 도배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올여름은 ‘취소’, ‘연기’, ‘환불’과 같은 단어들뿐이다. 세계 유수의 페스티벌은 물론 국내 페스티벌들도 줄줄이 취소되었다. 매년 여름 내 조그만 캘린더 앱은 페스티벌 일정으로 빼곡했는데, 당연하게 예정되어있던 즐거움이 함께 취소, 연기, 환불된 것 같아 덩달아 힘이 쭉 빠진다.

당연한 일상은 사라졌지만 시간은 우직하게도 흘러 점점 여름의 한가운데로 진입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조금 무기력한 나도 여름이면 움츠렸던 몸을 활짝 펴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내 안의 뜨거운 것들을 마구 발산하는 편이다. 하지만 올해는 이 ‘환불된 즐거움’을 조금 다른 곳에 쏟아야만 한다.

우선 나만의 동굴을 만들었다. 올여름엔 어디로 훌쩍 떠날 수 없을 테니,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남쪽 나라를 내 방으로 옮겨 오기로 했다. 커튼 대신 발리에서 쓰는 사롱을 매달고, 긴 행잉 플랜트를 여러 개 달았다. 여행하면서 찍은 포르투갈 사진을 그림으로 옮긴 유화 캔버스 두 개를 작은 책장 위에 놓았고, 해변에서 상반신 나체로 태닝하고 있는 할머니 그림도 잊지 않았다. 침대는 이케아 소파베드에서 좀 더 이국적인 느낌의 원목 침대로 바꿨고, 패턴이 화려해 눈이 아플 지경인 노란색 이불을 깔아두었다. 힙한척하면서 매거진 B 를 창문 곁에 놓았고, 인도에서 들어온 코끼리 금장의 원목 인센스 홀더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단언컨대 박나래가 발리 느낌으로 꾸민 한남동 월세 1,000 만 원짜리 집 거실이 전혀 부럽지 않다.

덕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완전한 집순이가 되었다. 예정된 일정들이 취소되고 혼자 나만의 남국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세상이 이렇게까지 조용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조금 다른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새벽 4시쯤 길게 공명하는 봉은사 범종 소리나 새벽 5시쯤 이른 아침을 열면서 부지런히 지저귀는 새소리, 그리고 새벽 6시쯤 규칙적인 리듬으로 길거리를 쓸어내리는 비질 소리, 그리고 적막한 가운데 어렴풋이 내 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세상은 너무 시끄럽고 나는 항상 다른 소리에 집중해왔다. 상사의 목소리에 집중하여 회사에 나를 갈아 넣고, 모임에서는 주로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넷플릭스 배우나 유튜브 아이돌의 목소리에 현혹당하고,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몸을 맡겨왔다. 설사 간혹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인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의 소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많아진 시간과 나만의 공간에 고독하게 나를 맡기니 나이 서른이 넘은 이제서야 내 목소리가 들린다.

구 유고슬라비아 출생, 행위 예술가의 대모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테이블에 관객과 1:1로 마주 앉아 단지 가만히 서로의 눈을 응시하는 <예술가와 마주하다>라는 공연을 펼친 적 있다. 마리나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던 수많은 관객들은 그녀의 눈을 보며 대부분 눈물을 흘렸다. 내가 미처 그들의 눈물의 이유를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관객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고독한 순간에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날것의 나와 마주했을 것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바쁜 일상에 치여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 ‘멈춤의 미학’을 선물했다. 지금 나는 마치 마리나 건너편 의자에 앉은 사람이 된 것 같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이지? 내 인생의 마지막 엔딩 신은 어떻게 찍어야 할까?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뭘 해야 할까?’ 이 질문에 하나씩 충실하게 답하며 글로 남겨두고 있다. 친구들은 올여름 나의 계획이 ‘사색’이라 하면 웃음을 터트릴 것이고, 나는 여전히 유튜브에 현혹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아주 사적인 공간에서 나와 아주 사적인 대화를 할 예정이다. 이것이 환불과 취소가 가져다준 나의 새로운 여름 나기다.


모범피 불치의 사춘기를 앓으며 디제잉하고 글 쓰고 요가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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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8월 우수상 #환불과 취소 #모범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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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의 사춘기를 앓으며 디제잉하고 글 쓰고 요가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