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남편이 소고기를 쏜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안 쓰고 있어 곡기를 끊어 마땅한 처지에 소고기가 웬 말이냐 한사코 거절해왔지만, 오늘부터 장마가 온다길래 그냥 얻어먹기로 했다. 장마랑 소고기가 무슨 상관이냐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얻어먹을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것이다. 귀한 소고기를 먹는데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이동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땀이라도 흘리기 위해 걷고 뛰며 마장동에 갔다. 이마와 목 뒤에 땀이 차니 다행히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소고기를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붉은 고기들로 즐비한 거대한 마장동 축산물 시장은 일상성에서 벗어난 풍경이어서 그런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으로 빨려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자칫하면 길을 잃을 것 같아 그냥 시장 입구에 위치한 먹자골목의 한 소고기 가게로 들어갔다. 오직 소고기와 술을 파는 것에만 집중한 꾸밈없는 가게 분위기를 즐기며 메뉴를 보는데 낯선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육우’.
나는 한우가 국내산 소고기를 통칭하는 단어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국내산 소고기는 소의 품종에 따라 한우, 육우, 젖소로 나뉘고, 육우는 한우보다 등급이 낮은 품종이라고 했다. 투 플러스, 원 플러스, 1등급, 2등급, 3등급의 한우와 육우, 그리고 젖소. 고기에 등급을 나누는 게 인간의 특유성인가? 내가 소라면 필시 나도 육우다. 인간이든 소든 등급화되는 세상에 반항하는 마음으로 앞으로는 한우 말고 육우를 사먹겠다 다짐했다. 500g에 5만 원인 육우 모듬을 시켰고, 양이 놀랍도록 많았다. 우리가 고깃집에서 소고기를 사 먹어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은 정성스럽게 고기를 한 점 한 점 올려서 구웠고, 나도 경건한 마음으로 한 점씩 입에 넣었다. 고기를 씹으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마음이 아려왔다. 고기란 무엇이길래 불판 앞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좋아 보일까. 또 한편으로는 다들 그래도 소고기는 먹고 사는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고, 이들과 한 팀이 되어 고기를 먹는 기분이 들어 퍽 좋았다. 하지만 고기를 씹을수록 슬퍼졌다. ‘한우니 육우니 다 똑같겠지 이게 다 인간의 편견이다’라는 마음으로 육우를 먹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육우는 내가 먹어왔던 한우와는 분명히 달랐다. 부모님이 사주시던 한우는 입에 넣으면 고소한 기름과 함께 녹아내렸는데, 육우는 녹지는 않았다. 충분히 맛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혀는 자꾸만 한우의 맛을 더듬더듬 찾아다녔다. 남편이 사주는 귀한 소고기를 최고라고 느끼지 못하며 평가하려 드는 내 혀가 미웠다. 내 혀가 자본주의고, 세상이다. 세상이 나를 등급화하고, 함부로 판단한다고 툴툴대던 내 혀가 문제다. 그래도 오랜만에 소고기를 열심히 구워서 나를 먹이며 행복해하는 남편을 보니 배가 두 배로 불렀다. 배부르면 장땡이지 혀는 무시하면 된다. 인생에 빵과 장미가 다 필요하지만, 지금은 빵에 만족해야 할 때다. 둘이 먹고도 배가 불러 미처 다 굽지 못한 남은 소고기 몇 점을 싸달라고 했다. 내일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먹어야지.
계산하려고 일어서 다들 맛있게 먹고 있나 싶어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는데 문득 묘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안에 손님들은 대부분 중장년층의 남성들이었다. 신기해서 남편이 계산하는 동안 대충 머릿수를 세어봤는데, 29명이 남성 나를 포함하여 4명이 여성이었다. 아니 이 성비는 나에게 매우 익숙한 성비 불균형이 아닌가. 흡사 영화판 감독 성비 비율 같았다. 가게를 나와 다른 가게들도 훑어봤지만, 역시나였다. 왜 마장동 먹자골목 고깃집에는 온통 중장년 남성일까. 보통 퇴근 후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해 혹은 삼삼오오 회식을 하기 위해 온 분위기였는데, 그렇다면 중장년층의 여성들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들은 소고기를 안 좋아하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지. 그렇다면 마장동 먹자골목의 가게 분위기가 그들의 취향이 아닌 것일까. 아니면 퇴근이 없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가사 노동을 하는 중장년 여성들은 퇴근도 없고 동료 직원도 없기에 소고기 가게에 못 오는 것은 아닐까. 소고기는 퇴근하는 자만의 특권일까. 지금 나는 남자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노브라에 화장도 안 했는데, 그래서 이들 틈에 끼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소고기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부딪히며 고단함을 털어내던 그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또 과한 것이겠지.
등급이 높든 안 높든, 비싸든 싸든 모든 고기는 생명이었고, 귀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에리히 프롬이 그랬다.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들며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무기력과 시름을 벌이고 있는 내가 자유를 되찾는 방법은 사람을 등급화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지 않는 노력이다.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살고 싶다.
이렇게 오늘 난 소고기를 잡아먹으며 소고기에서 한 수 배우고 간다. 배부른 돼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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