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 어느 날, 일러스트레이터 보선은 TV 미식 프로그램을 보다 고기 뒤에 가려진 동물의 고통을 떠올렸다. 진실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비거니즘(채식주의)’을 실천하게 됐고, 달라진 일상을 『나의 비거니즘 만화』 로 기록했다.
채식주의는 완벽해야 하는 것 아닐까? 유독 엄격한 분위기 탓에, 사람들은 실천을 주저하기도 한다. 저자는 불완전한 실천이라도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일주일에 하루, 행동 하나만이라도 바꾸는 것. 이를 통해, 우리의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비건의 가치다. 부담을 내려놓고, 저자의 다정한 제안에 귀 기울여 보자. 알록달록한 비건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작가님은 어떤 계기로 비건을 실천하게 되셨나요?
핏자국 하나 없는 고급스러운 스튜디오에서 고기의 맛을 논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 있어요. 생각해보면 고기는 죽은 동물인데, 그저 ‘맛’으로 소비되는 모습이 불편하더라고요. 동물의 일생이란 없는 것처럼 느껴졌죠. 분명 비인간 동물과 인간은 지구 안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데 제가 느끼기에 세상은 인간만의 것 같았어요.
그러다 게리 유로프스키의 강연을 보았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게리 유로프스키는 ‘인도적인’ 강간이나 ‘인도적인’ 아동 학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도적인’ 도살장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저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생각해왔어요. 비인간 동물은 인간보다 감각이 둔하니까 갇혀 살아도 스트레스를 덜 받을 거라고, 숨이 끊어지는 것도 한순간이니 너무 비인도적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육식의 폭력성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동물을 고기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무척 폭력적이라는 진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변하지 않으면 무고한 생명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는 진실을 직면한 후 비건을 지향하게 됐습니다.
에세이집 『평범을 헤매다 별에게로』 이후 작가님의 2번째 책인데요. 비건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비건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치관을 담아 글과 그림을 짓는 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비거니즘을 널리 알리고 싶었어요. 사회가 비건 친화적으로 변하려면 완벽한 비건 한 명이 있는 것보다, 불완전한 비건 지향인 백 명이 있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처럼 다른 사람도 비거니즘을 만난다면 많은 것이 변할 거라 믿었어요. 비거니즘에 한걸음 다가오길 바라며 한 걸음 다가가는 만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은 비거니즘이 단순히 고기, 생선, 유제품을 먹는 게 아니라 ‘삶의 태도’라고 말하셨어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비거니즘’을 소개해주신다면요?
비거니즘이란 나를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삶을 존중하고, 모든 동물의 착취에 반대하는 삶의 방식이자 가치관이에요. 더불어 인간이 동물 위에 군림하는 종 차별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행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비거니즘은 일회용품 줄이기, 동물 서커스 반대하기, 가죽 제품 사용하지 않기 등으로 다양하게 실천할 수 있어요.
공장식 축산의 진실이 충격적이었어요.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사실 몇 가지를 소개해주신다면요?
제가 농장 동물에 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깨달았던 건, 바로 우유(소젖)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된 순간이었어요. 저는 우유가 나오는 젖소라는 품종이 따로 있는 줄 알았거든요. 실제로는 일반 소가 강제로 ‘임신’이 되어 젖을 만들어냈던 것이죠. 우리 인간은 소에게서 매일 40kg의 우유를 짜냅니다. 소는 태어난 지 1년이 지난 후부터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도록 지치면 도축되어 고기가 됩니다.
공장식 축산은 인간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축산업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전 세계 모든 교통수단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양보다 많습니다. 또 아마존 열대우림의 70%가 이미 축산업을 위해 벌목되었지요. 가축 분뇨의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아 강과 바다의 부영양화를 촉진합니다. 이렇듯 공장식 축산은 지구 온난화, 산림 파괴, 수질 오염 등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내는 일 같아요. 그럼에도 어떤 죄책감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고 잊히기도 하는데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자신이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자세를 버리고, 불완전한 실천의 가치를 믿는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아주 작은 일이라도 지금 당장 해보는 것이에요. 다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행동은 행동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타자와의 연결감이 끊어지지 않도록 나만의 생각 환기통을 마련해도 좋을 듯해요. 저는 가끔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으며 연결감을 되새깁니다.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괜찮아
이 책은 비건을 통해 삶의 태도를 바꿔나가는 ‘아멜리’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작가님은 비건 생활을 해나가면서 생활의 활력을 되찾고 만화를 그리게 되셨다고 하셨는데요. 비건을 시작하고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환경에 관심을 두게 된 일이요. 비건을 시작하고서 동물권에 관한 관심이 커질 거란 건 예상했지만, 환경 보호로 시야가 넓어질 줄은 몰랐어요. 어렸을 적 학교에선 환경 보호 포스터를 그리기도 하고, 미디어를 통해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도 숱하게 들어왔지만, 이런 소리들이 제 마음에 닿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지구 환경이라고 하면 너무나 거창해서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비건을 지향하며 개인의 영향력에 유념하게 되면서, 환경 오염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환경을 덜 해치지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동물권을 위해 비건을 실천하지만, 때로는 ‘내 행동이 너무 하찮아 보이기도 한다’고 느끼셨다고요. 그런 무력감을 느낄 때, 어떻게 기운을 차리고 실천을 이어가시나요?
행동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자기 비하만 하다 보면 뭘 해도 안 될 거라는 패배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되새겨요. 그림 작업하며 느끼는 무력감을 이겨내는 방법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림 그리다 보면 저도 모르게 다른 작가의 멋진 작품과 제 작업을 비교하며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땐 스스로 특별한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고 기준을 제 자신에게 두려고 해요. 내 행동이 너무 하찮아 보이더라도 이 마음은 또다시 흘러 사라질 것이라 믿으며, 일단은 나에게 다정하려고 노력합니다.
‘비건’을 한다고 하면, 유독 가혹한 기준을 적용받는 것 같아요. 한 번 실수하면 비난을 받기도 하고요. 응원 대신 비난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시고 싶으신가요?
비거니즘은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거나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가치관이 아니에요. 비건을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불완전한 인간 한 명일 뿐이고, 그 시도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을 거예요. 비거니즘에 관해 너무 거창하게 바라보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어쩌면 여러분의 일상 속에 비거니즘이 이미 자리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가는 일, 쓰레기를 분리 배출하는 일, 식사를 남김없이 먹는 일, 등산할 때 도토리를 줍지 않는 일 등 생각보다 다양하죠? 보다 많은 존재가 덜 고통받길 바라는 우리의 따뜻한 마음을 서로 응원해주면 좋겠어요.
비건의 가치관에 공감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것부터 시작하면 좋아요’ 하고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SNS에 고기 사진이나 가죽 제품 사진을 올리지 않는 것이요. 보통 SNS에는 행복한 순간을 기록하기 때문에 동물 소비를 전시하는 일은 또 다른 동물 소비를 부추기는 일이 될 수 있거든요. 반대로 맛있는 채식, 멋진 친환경 제품을 소비하는 일상을 공유한다면 그것 자체로 선한 영향력이 될 수 있을 듯해요.
또 비건 맛집을 탐방하는 일도 추천합니다. 혹시 비건 로제 파스타를 드셔보셨나요? 당근색 소스가 꾸덕꾸덕하게 얹어진 파스타인데요. 크리미하면서도 상큼하고 고소하니 야금야금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게 됩니다. 독특하고 맛 좋은 채식의 세상으로 어서 놀러 오세요.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비건 레스토랑은 사당의 ‘남미 플랜트랩’, 용산의 ‘카페 시바’, 이태원의 ‘플랜트’, 망원의 ‘어라운드 그린’입니다.
어떤 독자가 이 책을 읽기를 바라시나요?
세상과 부지런히 부딪히며 삶을 사유하는 분들이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동물을 사랑하지 않고도 비건을 지향하고 있듯이, 비거니즘은 동물을 사랑하는 일과는 별개의 이야기 같아요. 비거니즘은 결국 비인간 동물만을 위한 가치관이 아니라, 타자와의 공존에 관한 사유라고 볼 수 있거든요. 나와 타자의 연결감이 커지고 사유의 대상이 확장하면 각자의 세상 또한 넓어질 거라 믿습니다.
향후 작가님의 집필 계획이 궁금합니다.
우울증 치료기를 그림 에세이로 지어보려고요. 저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우울을 의심하는 듯해요. ‘내가 엄살 부리는 게 아닐까’, ‘다들 이 정도는 힘들지 않을까’, ‘내 의지가 너무 약한 건가’ 하면서요. 공감을 주며 소소한 위로도 건네는 글과 그림을 짓고 싶어요. 지금은 새로운 주인공 캐릭터를 만들며 글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해 동안 SNS에 꾸준히 연재하는 것이 목표예요.
* 보선
그리고 쓰는 사람. 어두운 마음 안에서 작은 빛을 찾아 그려내길 좋아한다. 타자의 고통에 아픔을 느끼며 보다 많은 존재가 덜 고통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비건을 지향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타인의 삶을 탐구한 에세이집 『평범을 헤매다 별에게로』를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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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거니즘 만화보선 저 | 푸른숲
트위터에서 비건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을 때 쓰는 해시태그 “#나의_비거니즘_일기”에서 따온 제목이다. 비거니즘이라는 가치관을 소개하기 위해 이 만화는 나와 다른 존재를 존중하는 법, 동물을 몰개성화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 태도, 육식의 불편한 진실, 비인도적인 동물 착취 등에 대해 다룬다.
김윤주
좋은 책, 좋은 사람과 만날 때 가장 즐겁습니다. diotima1016@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