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문숙 “중년, 삶을 천천히 들여다보기 좋은 시간”
중년이 되어 새롭게 느낀 것은 ‘천천히 보는 즐거움’이에요. 시간이 흘러가는 게 보일 만큼 한발 물러서서 나를 구경하는 것인데,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죠.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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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마음 같지 않게 흘러간 삶, 관계, 일상을 담담하게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전작  『전업주부입니다만』  을 통해 언제나 곁에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했던 존재, 전업주부의 삶을 고백을 토해내듯 단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언어로 담아내 많은 여성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라문숙 저자가 신작 에세이 『깊이에 눈뜨는 시간』  으로 돌아왔다.


저자는  『깊이에 눈뜨는 시간』  을 통해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몸과 마음,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된 생활 리듬,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 등 한 여성으로서 중년을 지나며 겪은 존재의 풍경, 마음의 풍경을 담담하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냈다. 화려하고 세련된 내용보다는 저자 자신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단단하게 하루를 쌓아가는 과정, 그리하여 자기답게 나이 들어가는 나날의 일상을 솔직하고 성실하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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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전작과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좀 받았습니다. 문장도 사유도 더 깊어진 느낌이었어요.

 

『전업주부입니다만』  은 브런치에 연재한 위클리 매거진을 기반으로 만든 책입니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던 때였습니다. 생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성취감을 느끼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글에 메시지를 담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쓰고 싶은 욕심으로 온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찾아온 기회였어요.

 

『깊이에 눈뜨는 시간』  은 내 안에 오래 고여 있던 생각들을 꺼내놓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겠다는 심정으로 두 계절을 보내며 집중해 쓴 글들입니다. 첫 초고가 한 권의 책으로 묶기에는 원고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더 써야 했는데 그 덕분에 오로지 한 권의 책을 목표로 글을 쓰는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그건 정말 가슴이 떨리는, 굉장한 느낌이었지요. 어려웠지만 한껏 즐겼습니다. 이번 원고는 오래 묵었던 감정들을 드러낸 것들이라서 호흡이 길고 깊은 느낌이 듭니다. 일상의 한순간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쓴 글이라 아무래도 전작들과는 다른 느낌이죠.


한 여성으로서 중년이라는 계절을 지나며 겪은 마음의 풍경을 이번 책에 담으셨는데요. 작가의 말 속 “한 시절이 끝나갈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란 문장이 인상 깊었습니다. 삶의 한 고개를 겨우 넘은 시기, 작가님에게 이 시기는 어떠했나요? 작가님 표현대로 한 시절이 끝나갈 때 시작되는 것들도 궁금합니다.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벽에 붙은 아르바이트 광고를 봤어요. 경력 무관, 학력 무관, 근무 시간 조정 가능, 그런데 나이 제한이 있었지요. 저는 그 나이 제한을 훌쩍 넘었더라고요.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정작 내가 거기 걸려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한동안 시장이나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나이를 가늠해보는 버릇도 생겼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점원들이 나를 ‘어머니’ 혹은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걸 알게 됐고요. 마음이 복잡해졌죠. 하지만 저는 느려지고 둥글어진 것 같아요. 할 수 없는 게 생겼다면 새롭게 할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한 시절을 건너가는 건 동시 진행되는 여러 편의 게임이에요. 어느 날은 마흔 언저리의 나로, 다음날은 쉰이 넘은 나로, 가끔은 열다섯의 나로 사는 거죠. 차츰 쉰 몇의 내가 익숙해지면서 이제는 돌아갈 수 없겠다는 걸 알게 되죠. 담아뒀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버리고 새로운 것들로 채워요. 그중 제일이 ‘천천히 보는 즐거움’이에요. 시간이 흘러가는 게 보일 만큼 한발 물러서서 나를 구경하는 것인데,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라 매일 아침은 여전히 신선합니다.

 

책 제목에서 ‘깊이’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오는데요. 눈에 보이는 수치, 결과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깊이와 넓이로 삶의 방향을 바꿔보고 싶다는 바람 같은 게 담긴 제목일까요?

 

날씨가 유난히 맑은 날, 햇볕 아래에 서보셨나요? 그늘진 곳은 어둠이 짙어 제대로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거기 뭔가가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어요. 제대로 보려면 다가가서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지요. 젊을 때는 이게 잘 안 돼요.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시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많잖아요.

 

‘깊이’란 심오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늘이나 달의 뒷면, 그러니까 분명히 존재함에도 숨겨진 것, 잘 안 보이는 것, 그리하여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에요. 그늘을 벗어나면 보이는 그림자를 그늘에 있으면서도 잊지 않는 것, 보다 섬세해지고 정확해지고 싶은 마음을 담은 제목입니다. 중년이란 천천히 들여다보기 좋은 시간이에요. 무심히 지나쳤던 것, 놓쳤던 것, 작지만 여전히 반짝이고 온기가 남아 있는 것들을 발견하기에는 천천히 들여다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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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내, 딸, 주부, 며느리라는 겹겹의 존재를 안고 살아가면서 지치고 흔들릴 때마다 다정과 정성, 읽기와 쓰기를 매일의 면역 기제이자 삶의 전략으로 삼았다고 하셨는데요. 우선 ‘다정과 정성’이 궁금합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너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고 하는 말이 가장 힘들었어요. 엄마는 이래야 하는 거야, 며느리니까 참아야지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내가 정말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주부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나는 그 역할을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역할 안에서도 나를 위한 일상을 꾸려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다했어요. 내 하루에도, 나 자신에게도요. 그때는 그게 내 스스로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지만 날이 갈수록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그런 시간 안에 자기 만족감들이 숨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예를 들어 복잡한 음식을 만들어야 하면 최대한 짧은 시간에 해치우려 전전긍긍하기보다 그 과정 자체에 집중하고 즐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요. 일하는 사람도 바로 나 자신이고 일을 하는 데 드는 시간도 나의 시간이기 때문이에요. 한순간도 자신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남들에게도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게 제 눈에도 보이더라고요,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일기장 대신 사용할 요량으로 블로그를 열었고 일기처럼 가슴 속에 묻어둔 감정을 글을 써 내려갔는데 많은 여성 독자들이 작가님 글에 따뜻한 끄덕임을 보내왔어요. 여러 감정이 교차하셨을 것 같아요.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을 쓰면 반응이 즉각적이죠. 특히 명절이 다가온다거나 방학이 끝날 즈음처럼 주부이자 엄마인 독자들이 공감할 여지가 많은 시기에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답답하고 억울한 감정들이 해일처럼 몰려왔다가 한꺼번에 휩쓸려 지나가던 순간들이 있어요. 달리는 댓글을 보고 감동했어요. 나만 그러는 게 아니었어, 내가 잘못된 게 아니었어, 내가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저절로 위로받았죠.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들이 함께 치유받는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댓글을 쓰고 거기에 답하는 것은 어렸을 때 골목길에 서서 나누던 엄마들의 수다 같은 거였는지도 몰라요. 구조화되지 못했으나 분명 존재했고,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마음들이 오가는 공간을 허공에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동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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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 브런치 누적 301만 뷰. 팔로워 수 1만 1천 명. 이제 작가님의 브런치는 소위 말하는 파워 브런치가 됐는데요. ‘쓰는 사람’이 되면서 모호했던 감정들이 선명해지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고 하셨어요. 쓰는 존재가 되면서 많은 것이 변한 셈이에요.

 

몰랐던 걸 많이 알게 됐어요. 처음에는 감정들을 알게 됐죠. 기쁨만큼 슬픔과 분노도 가치 있는 감정이란 걸 알게 됐어요. 감정을 정확하게 쓰고 나면 속이 풀어져요. 그러다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었죠. 나를 알고 내 감정의 면면들을 속속들이 알게 되니 답답함이 줄어들었어요.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죠.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평소와 다르면 나도 모르게 그 너머에 있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변화가 일종의 방향성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건 정말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언제부턴가 쓰지 못하면 가슴에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합니다. 쓴다는 것의 어려움만큼 쓰지 않고 사는 것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책에는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해 시몬 드 보부아르, 앨리스 먼로, 아고타 크리스토프 등 자신의 생을 녹여 읽기와 쓰기의 세계를 유영한 중년 여성 작가들의 문장이 많이 녹아 있는데요. 작가님 글과 어우러져 사유를 확장하게 만들어주어 특히 좋았습니다. 이들 작가의 문장을 아끼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 이유는 ‘공감’입니다. 대화를 주고받을 때, 자신과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 따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으면 처음 만난 사이라고 해도 편안함을 느낍니다.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설명을 생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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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누군가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는 것을 주저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대답이 나올까봐, 하기 싫은 자기를 눌러 납작해진 채로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위해 꾹 참고 해냈다는 뜻이니까, 그 속에 숨은 아픔을 외면하기 어려우니까, 그 눈빛을 받아 안기가 벅차니까요.


글 속에 인용한 작가들은 적어도 내게 왜 그랬느냐는 질문을 할 사람들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서로 묻지 않고도 대답을 들은 것만큼 상대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느껴요. 삶의 기쁨과 일상의 위대함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다른 작가(남성 작가들)들도 많지만 세상과 삶의 어느 부분은 인간 이해를 넘어 여성 이해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 라문숙


읽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단어벌레’라는 필명으로 네이버 블로그와 카카오 브런치에 글을 쓴다. 1만 1천여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파워 브런치 작가로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란 걸 매일 새롭게 깨닫고 있다. 갑옷처럼 걸친 표정과 감정을 걷어내고 몸에 새겨진 것들을 글로 풀어놓으며 삶이 명징해지는 걸 경험했다. 읽고 마음에 새긴 것들이 어느 순간 자신을 드러내 삶을 환하게 비추듯, 자신의 글 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빛으로 가닿기를 바란다. 일기처럼 써 내려간 글을 모아 『안녕하세요』『전업주부입니다만』『깊이에 눈뜨는 시간』을 냈다.

 


 

 

깊이에 눈뜨는 시간라문숙 저 | 은행나무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된 생활 리듬,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 등 한 여성으로서 중년을 지나며 겪은 존재의 풍경, 마음의 풍경을 담담하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냈다. 자기답게 나이 들어가는 나날의 일상을 솔직하고 성실하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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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