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소리
10여 년 전 여름을 베를린에서 보냈다. 베를린을 고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워낙 긴 여름방학인 만큼 잠시 서울에 다녀갈까도 했지만 스카이프로 연결된 저편에서 엄마는 네가 오지 않는게 좋겠다, 고 말했다. 엄마는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더 멀리 가거라, 가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접하면 얼마나 좋겠니. 유난히 습한 서울에 와서 무더위에 고생하기보다는 페스티벌에 가도 좋고…” 잘츠부르크나 루체른, 에든버러처럼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페스티벌들이 떠올랐다. “내 딸이 오면 반갑지만, 가면 더 반가운 여름 손님 되는 게 싫다”는 엄마의 말에 웃으며 “그럼 날씨 좋은 부활절 즈음 손님이 되겠다”고 답했다.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혀와 뇌가 말랑말랑할 때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 어학원들을 찾고 여름을 보낼 도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른 비결 없이 소리를 듣고 따라 하면서 언어를 익히는 터라, 발음이며 억양에서 지역색이 강한 도시는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음에 쏙 들었던 바이에른의 뮌헨과, 바흐와 멘델스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작센의 라이프치히를 지웠다. 기차로도 갈 수 있는 하노버, 아헨, 쾰른, 뒤셀도르프를 두고 한참 고민하다 결국 베를린행 항공권을 예매했다. 서울이 그리운 마음 때문이었을까. 베를린의 널따란 운하가 어딘가 한강의 풍경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아직 베를린필의 시즌 막바지 공연들이 남아 있었다. 1년에 단 이틀뿐인 발트뷔네 콘서트(시즌 가장 마지막 특별 야외 공연)까지 생각하면 베를린이 가장 매력적인 도시였다.
베를린의 중심 정원 티어가르텐을 지나 포츠다머 플라츠의 현대적인 빌딩들을 뒤로하고 조금 더 가면, 베를린이 자랑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안방인 필하모니가 있다. 언젠가는 공연이 끝나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포츠다머 플라츠를 향해 걷는데 밤하늘에 뜬 달이 유난히 희고 밝게 보여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대로 U반을 타고 돌아갈 수는 없겠다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샴페인을 한잔 마시러 발길을 돌린 적이 여러 번이었다. 파리에서도 다양한 공연을 한껏 접할 수 있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의 소리는 모든 것을 압도한다. 잘 단련된 남성 무용수의 힘있는 몸짓처럼 선명하면서도 강렬하고 밀도가 높은 소리를 지닌 베를린필을 실황으로 접하고 나면 다른 오케스트라들은 어딘가 시시하게 들린다. 나치 정권에 이어,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상주 홀을 잃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더부살이 생활을 하던 베를린필은 카라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빈야드(Vinyard; 포도밭) 형태를 갖춘 베를린 필하모니 홀을 갖게 되었고, 고유의 사운드 역시 큰 전환점을 맞았다. (카라얀은 콘서트홀이 완성되지 않으면 베를린을 떠나겠다는 의지를 표명할 만큼 필하모니 건축에 총력을 기울였다.)
소리를 어떤 물성을 지닌 것으로 표현한다면, 베를린 필하모닉의 소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백금처럼 순도가 높으며 차원이 다른 은하에서 온 광물처럼 탁월하게 눈부시다. 단원들 하나하나가 모두 세계적인 솔리스트로서 놀라운 기량을 발휘하는데 그중에서도 플루트 수석 에마뉘엘 파위는 마치 총천연색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의 바로 옆자리에서 오보에를 맡은 알브레히트 마이어는 호흡을 대체 언제 하는 걸까, 싶을 만큼 놀라운 경지의 소리를 뿜어낸다. 빈필의 수석이던 아버지의 대를 이은 오텐자머 집안의 막내 안드레아스는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로 가능한 표현의 한계를 가늠하게 해준다. 이들의 연주력은 어디에서도 대체될 수가 없으며 베를린 필하모닉의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무엇이다.
브란덴부르크를 지나며 숭례문을 생각하다
그 여름 베를린에서 구한 집은 우연찮게도 옛 동베를린 중심지 알렉산더 광장 부근이었다. 1900년대에 지어져 유난히 천장이 높았다. 동네 서점에 들어가 제목에 이끌려 우연히 고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알고 보니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알프레트 되블린의 장편이었다. 아무리 사전을 끼고 씨름해도 도시의 운명을 따라간 주인공의 속삭임은 채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목만 바라봐도 좋아서 책 표지가 닳도록 어디든 들고 다녔다. 어학원 수업이 없는 날이면 베를린 곳곳을 쏘다녔다. 티어가르텐을 열심히 걸었고, 더우면 곳곳의 작은 호수에 들어갔다. 호숫물은 서늘했고, 햇빛은 적당히 따사로워 몸을 말리기에 좋았다. 프로이센 왕국의 사냥터였던 장소답게, 공원이라기보다는 숲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햇빛을 쬐다가 배가 고파지면 카페 아인슈타인에 가서 넉넉한 크기의 아펠슈트루델(사과 파이)과 카푸치노를 마셨다.
게르만족이 아닌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서양 문화의 원형을 찾고자 했던 노력이 깃든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아들론 호텔의 로비에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을 읽다가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적기도 했다.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문자로 끄적이는 나를 보고 테이블에 찻잔을 놓아주던 서버가 어디에서 왔느냐며 말을 걸었다. 해가 질 즈음에는 아들론 호텔 바로 건너편에 조성된 홀로코스트 추모 비석 사이를 걸었다. 직육면체들의 향연인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의 돌비석들은 상자 혹은 관, 얼핏 이정표처럼 보였다. 긴 여름 해가 넘어가며 돌비석들의 그림자들이 길어질 때면 그림자의 예리한 모서리에 마음을 찔린 듯 어딘가 먹먹해지고는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20세기의 가장 참혹한 상흔까지, 훌쩍 세기를 뛰어넘으며 시간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모든 뉴스와 신문에서 거의 매번 비춰주었던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이 겪은 지난 세기의 순간마다 묵묵히 그 배경이 되었다. 영광과 승리, 통일의 기쁨은 물론 오욕과 패배의 순간에도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아들론 호텔에서 쓰던 노트는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길이 없으나 그날 오후, 나는 노트를 펼쳐두고 한참 숭례문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고 기억한다. 내가 파리로 떠나온 뒤, 서울에서 숭례문이 다 타서 사라져버렸다. 숭례문이 남대문이던 시절 그 앞을 지나던 전차를 타고 다녔다는 아빠는 전화 너머에서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수 세기의 시간이 스민 브란덴부르크 앞을 지나던 도중 불현듯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언제나 그곳에 변치 않고 존재하는 익숙한 무엇이 사라졌을 때, 그 헛헛한 마음을 그제서야 짐작할 수 있었다. 낯설고 먼 곳에 와서야 비로소 그 목소리에 묻어 있던 울먹거림을 얼마쯤 이해할 수 있게 된 스스로에게 물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멀리 가야 가까이 있는 마음들을 헤아릴 수 있을까. 몸은 U반을 타고 알렉산더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 한강을 서성이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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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알프레트 되블린 저/안인희 역 | 시공사
히틀러의 나치 정당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격동의 베를린을 무대로 하여 작가가 작품을 쓰던 실제 시간과 공간이 고스란히 소설 속에 녹아 있다. 베를린이 사라지기 전에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불멸의 고전이 탄생한 것이다.
김나희(클래식음악평론가)
파리에서 피아노와 법학을 공부했다. 새롭고 아름다운 것을 접하고 글로 남긴다. 바흐와 말러, 바그너, 피나 바우슈를 위해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다. 인터뷰집 <예술이라는 은하에서>를 썼다.
피아노
2019.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