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포스터
벌써 25년 전이다. 축구 국가대표팀이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선전해 국민들이 환호했고 그 열기가 꺼지기도 전에 기록적인 폭염이 찾아와 전국이 뜨거웠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긴장 모드가 조성됐고 성수대교 붕괴로 한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1994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벌새>의 중학교 2학년 소녀 은희(박지후)에게도 1994년은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될 것만 같다. 아빠(정인기)는 공부 잘하는 오빠(손상연)만 편애하고 학교 공부보다 놀기 바쁜 언니(박수연)에게는 욕설을 섞어가며 심한 잔소리를 서슴지 않는다.
바쁜 떡집 일 때문에 늘 피곤함에 절어 있는 엄마(이승연)는 아빠가 다른 여자와 몰래 만나는 걸 알면서도 별달리 반응하지 않다가 여편네가 딸 교육을 어떻게 했어! 거친 반응을 보이자 손에 잡히는 스탠드를 집어던져 상처를 입힌다. 이놈의 콩가루 같은 집구석이 견디기 힘든 은희는 한문 학원에서 영지(김새벽) 선생님을 만난다.
영화 <벌새>의 한 장면
날라리를 색출하겠다며 학생들에게 쪽지에 이름을 적어내라는 인간말종 담임과 다르게 존댓말로 자기소개를 하는 영지 선생님은 마음 둘 곳 없는 은희에게 너른 품을 열어주는 유일한 인연이다. 가부장 아빠, 이해하기 힘든 엄마, 화나면 때리는 오빠, 일탈하는 언니 등 은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만 같은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1994년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사고를 보고도?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수대교 붕괴라는 사건이 은희가 맺어온 관계의 붕괴를 보여주기도 하고 한국 사회에서 여러 붕괴가 일어날 때 이 아이가 어떤 식으로 삶을 헤쳐나가는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벌새>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의 말이다.
영화 <벌새>의 한 장면
1994년의 은희에게 감독의 말을 전해준다면 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다행인 건 가족과의 갈등, 단짝과의 오해, 남자 친구의 배신 등 여러 관계의 붕괴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의 한 방향으로 빠질 수 있는 은희에게 다른 면모를 볼 수 있게 시야를 넓혀준 영지 선생님의 존재가 있어서다.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도대체가 세상을 이해할 수 없어 체념하듯 묻는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은 빛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종종 한두 번 보고 목격한, 경험한 사실을 그 대상의 전부인 양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는 한다. 가부장 아빠는 딸이 심하게 아파도 전혀 마음 쓰지 않을까? 은희를 검도의 죽도로 때리는 오빠는 성수대교 붕괴로 잃은 친구들에게 어떤 슬픔도 느끼지 못할까? 언니의 일탈은, 친구의 배신은 근본이 안된 사람이기 때문에 저지른 일일까? 은희가 소리쳐 불러도 알아듣지 못하는 엄마는 나뭇잎 사이를 통과한 빛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해 못 할 일이다. 그래서 쉽게 단정할 일도 아니다. 자기 마음조차 모르는 게 우리 인간인데 그중에 몇이나 상대방의, 타인의 속내를 완벽하게, 아니 그 절반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선과 악, 낮과 밤, 생과 사 등 둘 중 하나로만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 이 영화의 제목 ‘벌새’처럼 벌일 수도, 새일 수도 있다는 양자의 가능성 및 극과 극 양자 ‘사이’에 우리는 점으로 존재하며 주변과 타인과 선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빛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어둠을 뚫고 주변을 환히 밝혀주기 때문이다. 인생이 아름답고 살만한 건 그걸 느끼기까지 견뎌야 하는 시간을 통과한 까닭이다. 결국, 빛을 본다는 건 거기에 수반한 그림자까지 인지하고 경험한다는 얘기다.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빛도 필요하지만, 비와 바람과 구름도 있어야 하는 이치다. 1994년 은희에게 찾아온 거대한 삶의, 사회의 미스터리. 2019년의 은희가 25년 전을 뒤돌아보며 빛으로 찬란했다고 기억한다면 ‘끊어진 관계의 성수대교’를 잘 헤쳐나와 더욱더 튼튼하게 이었기 때문일 테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그렇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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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찻잎미경
2019.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