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모드 몽고메리
한 세대를 대변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들은 참 많다. 지금 30~40대 한국 여성들에게 그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열에 예닐곱은 주저 없이 만화 <빨강머리 앤>을 꼽을지도 모른다. 다른 성별이나 연령대의 사람이라면 만화영화 주인공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것도 20~30년이 흐른 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갸우뚱하겠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1980~199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여성들에게 앤은 단순히 만화 캐릭터가 아닌, 나를 보듬어주는 친구이자 롤모델이기도 하다. 보잘것없는 외모에 특출한 재능도 없는 한 고아 소녀가 특유의 상상력과 밝은 성격으로 가족과 친구와 마을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든 소녀들은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소녀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삶의 고비 고비마다 앤의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꿈꾸기를 열망하며, 소위 ‘앤 덕후’를 자처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빨강머리 앤』의 마지막 이야기(?),
매튜 아저씨의 죽음 이후 벌어진 이야기가 궁금했다
퀸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에이브리 장학금을 받으며 레드먼드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된 앤. 그러나 매튜 아저씨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릴라 아주머니의 시력이 나빠지면서 초록지붕 집마저 팔아야 할 위기가 닥쳐온다. 결국 앤은 대학을 포기하고 에이번리에 남아 마릴라 아주머니와 함께하기로 결정하는데…….
‘빨강머리 앤’을 만화영화로 접했든 소설로 접했든, 대부분 우리가 아는 마지막 이야기는 이것이다. 나는 그 이후가 궁금했다. 그래서 앤 셜리는 대학의 꿈, 글을 쓰는 꿈을 접고 말았을까? 어른이 되고 나서는 또 어떤 친구들을 만나 우정을 쌓았을까? 길버트와의 사랑은 진도가 나갔을까? 상상만 해도 설레고 흐뭇했다. 분명 우리의 친구 앤 셜리는 멋진 성인이 되었을 테니까.
이런 궁금증을 가진 이들이 현재의 『빨강머리 앤』 독자들만은 아니었나 보다. 1908년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저자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이 한 권의 책으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초판이 나온 뒤 5년 동안 32판을 거듭했으며,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출간되고 있으니, 출판 전까지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다.
당연히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뒷이야기 요청이 이어졌고 출판사의 속편에 대한 압박(?)으로 바로 다음해에 두 번째 작품 『에이번리의 앤』 이 탄생한다. 이 책을 탈고한 후 몽고메리는 “만약 남은 인생이 『빨강머리 앤』 이라는 폭주하는 마차에 끌려갈 운명이라면 앤을 ‘창조한’것을 통렬하게 후회할 것”이라고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니 평생 앤과 함께 묶일 운명을 일찍이 예감한 듯하다.
이후에도 <앤 시리즈>는 계속 후속편이 출간되는데, 몽고메리는 외전을 제외하고도 앤 이야기만 무려 총 8편이나 집필한다. ‘엇, 그렇다면 앤의 뒷이야기는 그저 독자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
만화 빨강머리 앤의 한 장면_타카하타 이사오
앤 셜리의 대학시절, 교사시절, 신혼시절을
단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는 책! 『스무 살, 빨강머리 앤』
<앤 시리즈> 속편들을 찾아 읽어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무려 앤이 결혼한 후 그녀의 성장한 자녀들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이야기까지 등장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독자들이 저마다 오랜 시간 상상하고 그리던 앤 셜리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몽고메리가 그려낸 어른 앤 셜리는 작은 실망감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럼에도 왜 어른이 된 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일까?
8권의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편집자의 마음에 성큼 들어온 것은 앤 셜리의 20대 시절 모습이었다. 어른이 되면 세상은 더 이상 천국일 수 없다. 때로는 정글처럼 가혹하고, 의도하지 않게 수많은 적들이 등장하기도 하며, 게다가 먹고사는 문제는 언제나 힘겨운 일이니까. 우리의 친구 앤 셜리에게도 세상은 마찬가지였다. 계속 거절당하는 소설들, 감당하기 어려운 집세, 이유도 모른 채 상대해야 하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 자꾸만 반복하는 실수들, 그리고 소중한 아이를 잃는 일까지.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기발하고, 밝고 긍정적이었으며, 시련과 고통을 당당하게 마주할 줄도 아는 멋진 성인으로 자라 있었다. 이른바 ‘앤 셜리식’의 삶의 태도가 담긴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슬픔과 외로움이 이해되었고, 그런 친구가 내 옆에 여전히 있다는 것만으로도 뭉클했다.
“이 세상은 퍽 괜찮은 곳이에요, 어쨌든. 그렇죠? 마릴라 아주머니? 저번에 린드 아주머니는 세상이 별로라고 푸념하셨거든요.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거라 잔뜩 기대할 때마다 반드시 어느 정도는 실망하게 된다면서……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래서 좋은 점도 있는걸요. 나쁜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기도 하니까요.”
앤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은 비단 편집자만은 아닐 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어른이 된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했다. 그래서 앤의 팬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소설 속 장면과 말들을 골라내 『스무 살, 빨강머리 앤』 한 권에 담아보기로 했다.
대학 대신 교사의 길을 가게 된 앤의 10대 후반 시절 이야기 『에이번리의 앤』 , 에이번리를 떠나 대학에서 다시 공부하게 된 스무 살 전후 이야기 『레드먼드의 앤』, 대학 졸업 후 서머사이드 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하던 시절 이야기 『윈디 윌로우즈의 앤』, 의사가 된 길버트와 결혼해 포 윈즈라는 항구마을에 정착해 살던 20대 중후반 시절이 담긴 『앤의 꿈의 집』 까지. 총 4권의 소설에서, 앤 셜리 특유의 긍정의 기운이 성숙함을 만나 한층 더 깊이 있어진 말들과 보기만 해도 뭉클해지는 장면들만 모았다.
‘앤의 서재’는 그 이름에서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한 것처럼 ‘빨강머리 앤’의 책장에는 어떤 책들이 꽂혀 있을까, 그 책장에 꽂힐법한 책들을 만들어보자는 목표를 세우고 만들어진 출판사이다. 그러다 보니 늘 앤 셜리의 스토리와 캐릭터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에 관한 책이 첫 책으로 탄생했다.
이 책을 통해 앤이 건네는 말들에 다시금 귀 기울여보자. 어른이 된 앤이 다정하게 내미는 손을 잡고, 잠시라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을 꺼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편집자로서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이루지 못한 꿈이 있어, 앤?”
“당연하지. 다들 그렇잖아. 꿈이 전부 다 이뤄지면 오히려 좋지 않을걸? 이루고 싶은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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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빨강머리 앤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저/허씨초코 그림/신선해 역 | 앤의서재
앤의 대학시절, 교사시절, 신혼시절 이야기를 엿보며 꿈을 잃지 않는 법, 세상과 당당하게 맞서는 법, 슬픔과 외로움을 이겨내는 법을 발견해보자.
한선화(앤의 서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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