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엄마를 따라 아는 사람의 연주회를 다녀왔다. 클래식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지만 베토벤의 음악인지라 어느 정도 알겠지 싶었다. 피아노 연주자와 바이올린 연주자가 나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곡들을 연주했고, 연주가 전개될수록 연주자의 표정을 따라 내 미간도 구겨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바이올린의 고음과 강약 조절이 만나 내는 소리의 강렬함 때문에 몰입이 더 빨랐다. 연주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은 순간은 격렬한 연주 뒤에 있었다. 연주가 끝났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손을 내리지 않고, 끝 음이 끝까지 울릴 때까지 행해지는 연주자의 동작 멈춤이 무척 아름다웠다. 격렬한 연주 뒤, 활이 멈추고 피아노의 페달까지 완전히 멈추었을 때 찾아오는 정적이 연주의 꽃 같았다.
연주뿐만이 아니다. 예전엔 기승전결 4단계 중, 극적인 고조를 향해 달려가는 ‘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결’말도 아니고 그 이후에 찾아오는 정적이야말로 모든 단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장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하는 까닭은, 아무래도 유년 시절을 함께 했던 시리즈물을 떠나보내고 나서이다. 10대를 함께 했던 해리포터를 떠나보내고, 20대를 함께 한 마블도 <엔드게임>이라는 정점을 찍었다. 고아한 취미를 가진 분들의 눈에서는 자본주의의 산물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 90년대 생들은 상실감을 맛보았을 것(통곡하거나 오열하는 친구들의 일도 참 많았다)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영화가 끝난 후 상영관이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어떠한 우주 한가운데에 잠식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 우주 한가운데서, 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너무 슬퍼서 자꾸만 그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하여 이제 세상 이치를 알 만하다고 느낄 무렵, 갑자기 부고를 듣는다. 예상치 못했던 어느 순간, 사랑하거나 미워했던 이의 부고를 듣는다. 무관심할 수 없는 어떤 이의 부고를 듣는다. (…)그런데 이 부고의 체험은 다른 성장 체험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알 것만도 같았던 삶과 세계를 갑자기 불가사의한 것으로 만든다. (...) 이 세계는 결코 전체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어떤 불가해한 흐름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일, 우리의 삶이란 불가해한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위태로운 선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 이 모든 것이 성장의 일이다.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중
물론 연주회나 시리즈물의 종결도 영향을 미쳤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듣게 되는 부고들이 많았기 때문에 결말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 많아졌다. 내가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좋지만 그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친구의 강아지가 구름다리를 건너는 일이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많아진다. 나아가 나의 ‘끝’을,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이의 부재를 상상하고, 부재라는 결말 뒤 찾아올 정적을 생각해본다.
김영민 교수의 말처럼 성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상실을 통한 성장은 슬프고 비통하지만, 강렬하다. 이런 게 ‘순리’고 ‘이치’구나 싶고, 끝이 있어야 정점도 아름답구나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허무감도 찾아와서,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지금 인생의 최고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나 보다. (살짝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문장으로 읽힐 수 있겠으나, 지극히 정상이다.) 열심히 최고점을 향해 나아갈수록, 그 다음 단계를 대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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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김영민 저 | 어크로스
다만 우리 모두가 불확실성을 삶으로 받아들이며, 큰 고통 없이 살아가는 데 좀 더 즐겁고 풍요로운 만남이 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한다. 찰나의 행복보다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는 그의 바람처럼.
김지연(예스24 굿즈MD)
좋아하는 것에는 아끼지 않습니다.